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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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5)
보다 친숙한 세계에서 한겨울 대령으로서의 일과를 마친 겨울은, 이제 바깥세상에서의 잠으로부터 깨어나 각오가 필요한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앤은 그런 겨울에게 정장을 입고 나갈 것을 권했다.
“편안한 모습도 나쁘지는 않지만, 정장은 사회적인 전투복이니까요.”
그녀는 겨울이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원해서 하는 일. 겨울도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폭군과의 재회를 앞두고 가슴 속의 응어리를 따라 굳어져가던 몸이 따뜻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어서.
겨울의 눈을 들여다보며 넥타이를 깔끔하게 매듭지어준 그녀는, 입가에 은근한 장난기를 띄우더니, 두 손으로 넥타이를 목줄처럼 감아쥐며 겨울을 끌어당겼다. 천천히, 그러나 도발적으로. 겨울이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실은 이걸 해보고 싶었던 거 아녜요?”
“억울한데요. 당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그럼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말로만?”
겨울은 앤에게 키스했다. 입술만 닿고 끝나는 가벼운 입맞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여운이 사라질 즈음 한 발짝 떨어진 앤은, 감아쥐었던 넥타이를 토닥토닥 잘 펼쳐주고는, 겨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흡족해했다.
“환상적이군요.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겠죠. 재단사가 봄이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신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앤이 겨울을 향해 팔을 벌리며 요구했다.
“나도 좀 도와줄래요?”
그녀는 수사관으로서 항상 입던 스타일의 정장을 골랐다. 하얀 셔츠에 새까만 블레이저. 양쪽 겨드랑이 아래엔 권총 홀스터까지 착용했다. 쓸 일이야 없겠지만, 빼놓자니 허전한 것이다. 허리띠를 채운 코트는 배색이 두드러지는 아이보리색이었다.
가죽장갑을 끼고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바깥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슬슬 출발하죠.”
후. 숨을 짧게 끊어 내쉰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는 두 사람을 가을이 배웅하러 나왔다. 가을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심란한 표정이었으나, 고건철을 만나지 않기로 한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전하고 싶은 말은 없어?”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겨울의 물음에도 가을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
“다녀와.”
그리고 그녀는 앤을 향해 조용히 목례했다.
“깁슨 씨. 겨울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같이 가주지 못하는 자리에까지 동행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였으되, 실제로는 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앤이 그녀를 향해 마주 목례했다.
“돌아왔을 땐 가을도 날 앤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럴게요.”
가을이 잠깐이나마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고 갈 헬기는 안전가옥으로부터 10분 거리에 주기되어있었다. 봄에게 조종을 맡길 수 있음에도, 앤은 굳이 자신이 조종을 맡겠다고 나섰다. 낯선 기종에 대한 적응은 고작 몇 초 만에 끝내버린다. 예전부터 앓아왔던 비행공포증도 이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실제로 해보는 건 역시 다르네요.”
그녀가 말하는 소감이었다.
이륙한 기체는 눈이 내렸어도 여전히 잿빛인 도시를 가로질러 혜성그룹의 본사로 향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본사는 주변을 짓누르는 듯 한 무게감의 성채였다. 그 주인의 성격과 취향이 십분 반영된 결과물일 터였다.
앤이 다루는 헬기는 낭비가 없는 하강으로 옥상의 이착륙장에 안착했다. 착륙장 가장자리엔 낯익은 한 사람이 겨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전익이 일으키는 바람에 옷자락을 여미며 버티고 있던 고아영은, 앤과 함께 내려선 겨울을 보고 조금씩 주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어색한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네.”
반갑기는 하나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조금은 긴장한 기색도 있었다. 봄이 가장 먼저 포섭한 협력자 가운데 하나인 그녀는, 마침내 확실해진 겨울과 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미 전달받은 상태였으니까.
또한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그만큼 서먹한 것이기도 했다. 근황을 들어 알고 있다는 것이 어색함을 줄여주지는 않았다. 봄이 보장해준 그녀의 처우 역시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부드럽게 끄덕였다.
“네, 오랜만이네요 송수아 박사님……이라고 불러드릴 필요는 없죠?”
짓궂은 말에 아영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 이름은 잊어줬으면 좋겠어. 내게도 아버지에게 들켜선 안 될 사정이 있었고, 그 사정이 아니었더라도 처음엔 맨 얼굴로 너를 볼 자신이 없었는걸.”
가벼운 농담이 분위기를 풀어놓았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분위기.
“그럼 전처럼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고아영 사장님, 은 너무 딱딱하게 느껴지니까요.”
겨울의 말에 아영이 동의했다.
“그래. 일단은 그러는 편이 낫겠다.”
예상보다 쉽게 끝난 관계설정에 안도하며, 그녀는 겨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늘이 많이 사라졌구나.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었다, 라. 그건 축하해야할 일이겠지.”
겨울을 보는 아영의 시선이 새삼스러워진다. 예전부터 겨울이 어딘가 특별하다고 느꼈던 그녀이지만, 그 특별함이 봄을 개화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헌데 이쪽 분은?”
아영이 앤을 돌아보며 갸우뚱했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이제부터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갈 참에 신분이 불분명한 이가 동행하는 것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겨울이 홀로 오리라 여겼던가보다. 혼자서도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기에. 봄이 여기까진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
곱씹어보건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에 있어서 사소한 부분까지 관여하는 게 도리어 더 큰 어색함을 빚어낼 수는 있겠다.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도 가치가 있을 테니……. 그나저나, 낯익다고 여기는 걸 보면 봄의 변조가 시작되기 전에 시청을 그만두었나보구나.’
아니었다면 앤은 고사하고 겨울조차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심리치료를 빙자한 만남이 중단된 이후로도, 겨울은 그녀가 한동안 자신을 지켜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민이라는 게 한순간에 끊어지는 감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아영으로선 자신의 거짓말이 겨울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을 터였다. 겨울은 친구로서의 고아영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정확합니다.」
봄은 겨울의 심상에 흐르는 모든 추측을 한 마디로 긍정해주었다.
되짚어 봐도 아영에게 앤의 정체를 감출 이유는 없다. 가장 중요한 비밀, 봄의 진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인 것을. 겨울이 그녀에게 자신의 연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조안나 깁슨입니다. 제 아내가 될 사람이죠.”
“아, 아내?”
적잖이 당황한 아영은, 앤의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더니 곧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조안나 깁슨이라면, 네 사후세계에 있던 FBI 감독관……?”
“역시 알고 계시네요.”
“세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아영에게, 앤이 잠시 선글라스를 벗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테니까요.”
“…….”
침묵하던 아영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앤이 청하는 악수에 응했다.
“제가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미래로군요. 저 또한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미 봄의 존재를 알고 봄의 설득을 받은 그녀인 만큼 마음과 물리적 실체를 획득한 가상인격의 등장을 예상하기는 했을 것이었다. 따라서 앤은 하나의 상징이며, 아영이 말한 미래는 자신의 미래가 아닌 이 세상의 미래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시대를.
악수를 나누는 아영의 모습은 겨울의 눈엔 계약을 체결하는 기업가로 비쳐졌다. 친구로서의 그녀가 보여준 적 없었던 생소한 면모였다. 불우하게 자라기는 했을지언정, 그녀는 어쨌든 폭군의 딸인 것이다.
아영의 눈길이 겨울에게로 돌아왔다.
“이 이상의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도 좋겠지.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고.”
심호흡을 하는 그녀.
“너만 괜찮다면, 이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게.”
겨울이 아영의 협조 하에 혜성과 낙원 양대 그룹을 장악하는 것은, 인류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분인증절차는 봄을 구성하는 시스템의 일부나 마찬가지이고…….’
아영은 고건철의 유일한 가족이다. 그녀만 침묵한다면, 겨울이 고건철을 대신하는 데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폭군의 광기를 아는 측근들은, 대외적인 후계자로서 아영이 대신 상대하도록 하면 그만이었으니. 혹은 겨울이 울분에 찬 폭군을 연기하거나.
그런 상황에서 달리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폭군은 겨울의 옛 육체에 깃들어있는 것을. 한 순간에 사라진 쇠약함은 육체를 새로이 배양한 탓이라고 둘러댈 수 있다.
그 대가로서 아영이 얻는 것은 진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식을 기를 권리.
그러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겨울이 물었다.
“선생님께선,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세요?”
멈칫 했던 아영이 되묻는다.
“가을 씨의 마음을 얻는 것 외에……달리 살릴 방도 같은 건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니?”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고건철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인 이상 그를 구원할 다른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봄의 능력으로 물리적인 죽음을 끝없이 지연시킬 수야 있겠으나, 그건 그를 지금보다 심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묻는 핵심은 수단의 유무가 아니었다.
“방법이 있느냐와는 별개로, 선생님께 이 순간이 후회로 남을지는 않을까 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애증은 애정으로부터 싹트는 감정이잖아요. 가족 사이의 감정이 순수한 증오인 경우는 드물 것이고요.”
“…….”
아영의 낯빛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글쎄……. 배려는 고마워. 하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선 애증조차도 사라진지 오래인걸.”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추운 계절의 고목처럼 말라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아버지,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정이 밝혀졌던 날 죽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남아있는 건 내 아버지였던 사람이 남긴 여분……같은 거지. 다른 부분들은 다 죽어버리고, 그날 밤 새겨진 상처만 남아서 사람의 형상으로 숨을 쉬고 있는.”
그리고 입김을 흘리며 짧게 눈을 감는 그녀.
“벌써 오래 전부터 죽음만도 못한 삶을 억지로, 억지로 연장시켜왔던 거야. 그도 그럴게, 죽는 것조차도 화가 나는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