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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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7)
폭군의 죽음으로부터 재차 시일이 경과하여, 바깥세상의 계절은 바야흐로 겨울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끝으로 다가서는 계절과 같은 이름을 지닌 청년은, 자신이 소년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높은 창가에서 회색 도시의 아침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아직은 겨울이라지만 쌓여있던 눈은 거의 다 녹아내린 뒤. 그러나 도시는 지금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종말이 유예된 세상에서는 백악관이 공식적으로 모겔론스 백신 개발 완료를 선언했다. 사실 완성 자체는 이미 예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마 겨울이 종말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았던 그 때가 아니었을지. 그럼에도 발표를 이제껏 미뤄온 이유는…….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겠지.’
이 순간 저편에서는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한겨울 대령으로서 하는 생각이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이중사고가 이따금 머릿속을 헝클어놓곤 하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나가는 중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사격처럼 집중을 요구하는 일도 가능해질 듯하다. 실전을 치르는 건 별개일지라도.
분리된 감각으로 듣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겨울의 짐작을 확인해주었다.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백신은 J&J, 릴리 Co., 리드 사이언스 3개사가 공동으로 생산하며, 옛 오염지역 및 신구(新舊) 봉쇄선 인근지역, 해안지역, 접경지역 등 잠재적 위험지대의 주민들에게 우선적으로 접종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보건당국은 보안과 절차상의 문제로 정확한 1차 접종물량을 밝히길 거부했으나, 관계자들은 “준비된 백신의 양이 최대로 잡아도 1,100만개를 넘지 못할 것이며, 미국 시민들 전체가 접종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제약업체의 입장에선 무작정 생산라인을 늘렸다간 접종완료 이후 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한편 잠재적 고위험군으로 지정된 지역들에서는 접종의 우선순위를 두고 갈등이 불거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외부인의 위장전입에 대한 비난이 거센데요, 위험지역 내의 각 주 정부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위장전입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재정난이 일상인 주 정부들이 과연 돈을 싸들고 오는 졸부들을 내쫓을 수 있겠느냐며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보기엔 합당한 우려였다. 위험지역의 각 주들은 지속적인 인구유출에 시달려왔고, 그것은 해당 지역정부의 재정난 심화로 이어졌으므로. 하루라도 먼저 접종을 받기 위해 수만 달러씩 풀어놓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거절하기 전에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위정자들의 관점에선 주민들에게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이다.
즉 적당히 눈감아줄 가치가 있는 필요악이었다.
그나마 이러한 갈등이 폭력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 건, 표면적으로는 크레이머 대통령이 백신의 무상접종을 선언한 덕분이었다.
「저는 일찍이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시민들의 권리를 수호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한 바 있습니다. 그런 제가 말씀드리건대, 모겔론스 백신 접종은 곧 미국 시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입니다. 시민들의 생존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이나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해선 안 됩니다. 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재난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과 같이 약속드립니다. 백신 접종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시민들에 대하여 무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국의 시민들은 조국의 안보라는 하나의 기준 앞에 모두가 평등한 주권자로서 합당한 순번을 배정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지키고자 하는 질서입니다. 여러분, 귀 기울이십시오.」
「미국의 종말은 끝났습니다.」
언제나처럼 힘이 넘쳐흐르는 담화였다.
이 같은 선언을 뒷받침하는 건 백신 밀거래를 단속하는 수사기관들의 실적, 특히 연방수사국의 활약이었다. 물밑에서 기계장치의 신이 우연의 실타래들을 모아 필연을 직조한다고는 해도, 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효율적이진 못했을 것이었다. 부유한 자들의 부정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제고하는데 큰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앤은 자신의 공로를 상급자인 수사국장과 공유했다. 이로서 국장은 자신이 원하던 정계입문의 길을 재확보했고, 앤은 차기 국장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그녀는 겨울에게 웃으며 말했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그녀가 말하는 오늘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언젠가는 앤이 대권에 도전하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겨울은 불가능하더라도 겨울의 아내에겐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행정부의 수장이 되는 것만으로는 영향력 면에서 현 시점의 겨울보다 낫다고 보기 어려울 터이지만, 그 이면에서 인류의 봄이 맑은 강처럼 흐르고 있다면야.
비슷한 일을 이곳 물리현실에서도 이루어나가려는 참이다.
「겨울.」
이쪽에서는 소일거리로서 비서실을 장악한 앤이 겨울의 뇌리에 목소리를 전달해왔다.
「호출한 사람이 왔는데, 바로 들여보낼까요?」
「그래요.」
겨울이 폭군의 이름으로 불러들인 이는 다름 아닌 사후보험 최후의 시스템 관리자였다.
사실 그 이상으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던 건 최초의 설계자들 쪽이었으나…….
‘그들이 정말로 다 죽어버렸다는 걸 알았을 땐 솔직히 좀 당황했지.’
신으로 거듭난 봄이 조회해본 그들의 생사는 예외가 없는 의문사였다. 그들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래도 죽음을 가장한 생존자가 하나라도 있으리라 여겼건만.
어떻게 보면 납득은 가는 일이다. 운용 데이터를 축적한 트리니티 코어는 스스로를 개량한 끝에 설계자들의 이해조차도 벗어난 기계가 되었고, 제2의 트리니티 코어를 제작하는 건 예산낭비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한국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숨이 붙어있는 설계자들은 잠재적인 위험요소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생사를 어찌나 간단히 결정한 것인지. 당시의 회의록을 열람한 겨울은 일상적이기까지 한 논의의 가벼움에 전율했다.
문 너머의 인기척이 겨울을 상념으로부터 일깨웠다. 비서실장을 연기하는 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회장님. 사후보험 시스템 관리자인 박정명 씨입니다.”
이윽고 나타난 남자는 무척이나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것만이 아닌데?’
겨울은 그가 심한 복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안내자로서의 앤은 닫히는 문틈으로 윙크를 남기고 돌아섰다. 쿵-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 화들짝 놀란 관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가늘게 떨면서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겨울이 손짓했다.
“그렇게 서있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에게 겨울이 인사 대신으로 묻는다.
“괜찮으십니까?”
“예?”
“어딘가 많이 불편해보이시는데요.”
“아…….”
관리자가 이마에 맺히는 땀을 훔치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제가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어서 말입니다. 긴장해서 아픈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증상을 알고 있던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편안한 분위기에서의 대화를 원합니다. 저쪽에 화장실이 있으니 천천히 쓰고 나오시죠.”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건 뭡니까. 시간은 넉넉합니다.”
관리자의 얼굴에 미혹이 떠올랐다. 말로만 듣던 폭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일까? 평소의 폭군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겨울도 어려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이 기존의 측근들과 만날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어,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관리자 안정명은 못내 미심쩍어하면서도 서두르는 걸음으로 화장실을 찾아갔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신경들을 조절해줄 수야 있겠지만, 통증을 둔화시키며 괄약근을 조여 주는 것보다는 쾌변을 보도록 도와주는 쪽이 훨씬 더 인도적인 조치일 것이다…….
인도적? 겨울은 스스로의 생각에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변비를 해결해주는 기계장치의 신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개념이었다. 신의 시대에도 이토록 질박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날 만나기 전에 미리 치료해주지 않았을까? 이 만남 또한 예측했을 텐데.’
겨울이 의문을 품자 봄이 대답했다.
「제게는 관리자를 특별히 취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질환의 완화 및 제거는 세계적 규모의 문제가 됩니다.」
「관련된 증상이 전 세계에 걸쳐 일시에 사라지면 필연적으로 의혹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 정도로 가시적인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뒷받침할 인류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결정하신 저는 인류에게 있어서 행위를 유도하는 환경이지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아아.’
합당한 해명이었다.
「오늘 관리자를 호출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과업에 동참시킬 행위자로서 적합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 말입니다.」
‘그렇지. 이해했어.’
겨울은 아직 사람을 직접 보고 판단하는데서 안정감을 느낀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관리자는 경건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겨울을 한 번 더 웃음 짓게 만들었다. 이 웃음을 보고 현실감각을 되찾는 관리자였으나, 아까에 비해서는 경직된 정도가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겨울이 손을 내밀었다.
“조금 늦었지만 정식으로 소개하죠. 혜성그룹 회장 고건철입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소개하는 말에 어색함은 없었다.
“앗, 예. 이미 아시겠지만, 가상현실 사업부 수석 시스템 관리자 안정명입니다.”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른 관리자가 겨울의 손을 맞잡았다. 낙원그룹의 실제 소유자가 고아영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헌데 회장님께서 저를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는지…….”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겨울이 느긋한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
긴장한 관리자가 착석하기를 기다려, 겨울이 말했다.
“우선, 그동안 유일한 시스템 관리자로서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관제인격이 제출한 업무평가가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컥.”
“당신 혼자서는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노력은 결코 만능열쇠가 아니며, 관리자로서 무력감에 빠져있었던 것도 허용범위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처럼 힘 있는 핵심관계자가 도와준다면, 적어도 사람으로서 해결 가능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라지겠죠.”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당신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겨볼까 합니다.”
얼떨떨한 관리자 앞에서, 겨울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안정명 씨. 사후보험의 보장기간 종료로 폐기 처분을 당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사실은 일부가 보존되어 자산의 일종으로서 거래되어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계셨지요?”
관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생존본능으로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눈치였다.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르는 척을 해야 하나. 겨울이 언급한 것이 그에겐 그만큼 무거운 사안이었을 터였다. 그동안은 알고도 모르는 척 해올 수밖에 없었던.
“솔직하게 털어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겨울이 그를 안심시켰다.
“당신이 과거 관리자 권한으로 열람했던 특정 보안회선 이용기록들을 살펴보건대, 은폐된 거래를 유추했을 확률이 높다고 봤거든요. 다만 이렇게 질문을 드리는 건 과연 어디까지 추측을 했으며, 그 추측이 내가 이미 아는 전모와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확인해보려는 것뿐입니다. 새로운 역할을 맡기기에 앞서 당신의 능력을 검증하는 절차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관리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또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말로 몰라서 시험하려는 건 아니었다. 겨울에게는 봄이 있었고, 겨울은 봄의 안목을 믿는다. 다만 이렇게 확인해두어야 훗날 관리자가 어색함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었다.
‘내 눈으로 이 사람의 반응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지.’
생각하는 겨울에게 망설이던 관리자가 물었다.
“……제 안전은 보장되는 겁니까?”
겨울이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