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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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장 – 유년기의 시작 (8)
“믿으세요. 낙원의 새 주인인 나는 내 새로운 사업에 어떠한 오점도 없기를 바랍니다. 거래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장의 손해……사후보험의 단기적 이미지 실추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사안을 들춰내려 하겠습니까?”
“그건……그렇지요.”
관리자가 힘들게 대답했다. 공정함에 대한 고건철의 집착은 세간에서도 유명한 것이어서, 지금의 겨울이 하는 말도 그가 어떻게든 납득 가능한 범위에 들어있었다.
기실 겨울이 추구하는 공정함과 고건철이 추구하던 공정함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었지만, 거기까지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기업인으로서의 고건철을 존경하는 이유였다.
“긴장하지 마세요. 이게 당신에게는 무척 큰일이더라도, 나에겐 이제부터 고쳐나갈 무수히 많은 불공정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당위성을 말하며, 겨울이 관리자를 안심시켰다.
“당신을 해치려는 시도는 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할 겁니다. 난 내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을 용납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는 대로 증언해보세요. 말씀드렸듯이, 시간은 많습니다.”
겨울의 설득이 먹혔는지, 관리자는 고민으로 힘겨워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파악했던 「노예시장」의 상세를 하나씩 하나씩 더듬거리며 내놓기 시작했다. 이는 최고등급 가입자들이 자신들의 호화로운 사후를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물리현실에 연고가 없는 가입자들, 혹은 연고는 있어도 면회기록이 없는 가입자들. 그런 저등급 가입자들은 파산에 의한 폐기를 앞두고 폐기절차를 전담하는 업체로부터 어떤 계약을 제안 받게 된다. 부유한 자들의 사후세계에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그 대가는 당장의 연명과 더불어 기약 없이 먼 미래의 자유였다.
최고등급의 가입자들이 대면하는 가상인격들은 돈을 들이면 들일수록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었다. 가입자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사치스러운 소비라는 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 때로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차이에까지 집착하곤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진공관 앰프로 듣는 소리가 일반 전자식 앰프에 비해 따뜻한 소리를 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가상인격을 일반 앰프라고 본다면, 자기 자신을 팔아야하는 저등급 가입자들은 고등급 가입자들에게 있어 사치품으로서의 진공관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엔 새로운 형태의 진공관이 유행하고 있었다. 달리 아무도 엿보지 않는 세상에서 일개 진공관에게 인권을 보장해줄 필요는 없었다. 팔려나간 이들의 생활이 한 결 같이 비참해지는 원인이었다.
진술의 말미에 관리자가 덧붙이는 말.
“……당연히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근로계약이라 법적 책임을 묻기도 어렵겠더군요. 현실의 근로기준으로는 걸리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사후보험 내 세계관에 물리현실의 노동법을 적용한 사례도 드물고 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요. 법은 저 같은 사람들의 편이 아니잖습니까.”
다시 말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세된 상황 속에서 명목상의 자유의지로 체결된 계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렵고 불쾌했던 게 사실이죠?”
“…….”
겨울의 물음에, 관리자는 찌푸린 얼굴로 긍정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혐오감이자, 사람이 완전한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이 나라에서 내부고발자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여론이 지켜주는 것도 잠깐이죠. 관심이 사라지고 나면 저는 그날부로 그냥…….”
흐리는 말끝에 많은 의미를 담아낸 관리자가 다시금 우려를 내비쳤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이걸 건드려도?”
겨울이 낙원그룹의 사주로서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사후보험 시스템 자체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폐기절차를 위탁 운영하던 정부계약 하청업체와 최고등급 가입자들의 공모로 빚어진 스캔들일 따름이죠. 그들을 시작으로 그 윗선까지 쳐내는 건 내게 장기적인 이득을 안겨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기여할 수 있는 공정함에 대해서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끄덕하는 관리자를 보며, 동시에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몸짓임을 읽어내며, 겨울은 내세워도 좋을 사람 하나를 건졌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역사에 남길 사람의 이름을.
사람에게 가능한 일은 사람의 손으로 해내야 한다. 우연을 다스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필요로 했다.
“여하간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실제 근로태도야 어쨌든, 자신이 관리하는 분야를 심도 있게 파악할 정도의 능력은 있는 분이셨군요.”
관리자는 겨울이 준비한 칭찬에 얼굴을 붉혔다. 속으로는 업무평가를 작성한 관제인격을 열심히 씹어대는 중일 터였다. 겨울이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히 관리자로서는 하실 일이 별로 없었지요? 앞으로는 행정적인 업무를 주로 처리하시게 될 겁니다. 아, 그 전에 쓸 데 없는 보안체계부터 치워버리고요.”
“관계법령에 규정된 역할이 있는데…….”
“개의치 마세요.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겨울이 워낙 태연하게 말했으므로, 관리자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권력자를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보다 의욕적인 직무수행을 기대해도 되겠죠?”
“노,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이후 겨울은 관리자를 보내기 전에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차 고건철의 새로운 측근 중 하나로 키워낼 이가 아닌가. 사람으로서의 과업을 함께 해나가려면 친분과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가까운 후일을 기약하며 그를 보낸 뒤, 해가 지기까지 고건철로서 업무를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처결하는 사안들의 중요성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으나, 봄이 겨울에게 자신을 주었기도 하거니와 낙원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고아영이 분담하는 부분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사람의 역사에 남을 사람의 이름이었으므로.
별개로, 그녀는 겨울을 자주 찾아오는 벗이기도 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아이와 함께 꼭 얼굴을 보고 돌아간다. 일이 남아있어도 그러했다. 어차피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터라 오가기는 쉬웠지만.
겨울은 잦은 방문을 조금도 번거로이 여기지 않았다. 과거에 그녀를 거부했던 건 언제 폐기될지 모를 처지에 우정을 쌓고 싶지 않았던 까닭. 이제는 방해요소가 없으니 친분을 쌓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약간의 불안과 타산이 있긴 해도.’
아영 스스로도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그녀의 속내에는, 겨울에 대하여 더 굳은 확신을 얻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겨울은 장차 그녀의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계의 실질적 지배자인 것이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바람.
그녀의 불안을 덜어주는 건 친구로서의 겨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커피 드실래요?”
아영의 아이는 봄이 친구 삼아 만들어준 인공지능 로봇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집무실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던 아영은, 겨울이 묻는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응? 뭐라고?”
“커피 드실 거냐고 물었어요.”
“아. 좋지.”
봄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는 이상, 아영 역시 늦은 시간에 섭취하는 카페인의 반감기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겨울은 아영이 보는 앞에서 최근에 연습한 방식으로 커피를 탔다. 각설탕을 준비했으나 그냥 넣는 것이 아니다. 도수 높은 브랜디를 스푼에 부어, 각설탕을 올린 다음 불을 붙인다. 적당히 그을린 설탕으로부터 카라멜 향이 솔솔 올라올 즈음에서야 뜨거워진 술과 함께 커피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흘려 넣는 설탕이 한 스푼, 두 스푼, 세 스푼…….
아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칵테일?”
“커피입니다. 카페 로얄이죠.”
앤이 있었다면 아마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하여.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닮아가는 법이었다.
“그리고, 술을 딱히 싫어하진 않으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미심쩍어하며 잔을 받은 아영은, 한 모금 조심스레 맛을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모양. 겨울도 만족했다. 이 역시 조금 억지를 쓰면 요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굳어진 입맛을 교정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 아버지로서 업무를 보는 건 좀 어때? 익숙해졌어?”
아영의 물음에, 겨울은 살짝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대체로 괜찮아요. 이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는 순간들이 있긴 해도.”
“그래…….”
“어떤 의미로는, 제가 이 자리를 빌려 이루어낼 일들이 고건철 씨의 영전에 바칠 꽃다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이 탄생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거니까. 적어도 그 사람의 일부는…….”
폭군과의 만남을 짧게 회상한 겨울이 끊었던 말을 잇는다.
“그로 하여금 딸에게 사과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도록 만들었던 일부는……. 선생님과 제가 자신의 유산을 토대로 빚어내려는 세상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영은 쓴맛 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일부야말로 당신께서 기억하시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가깝겠죠.”
“…….”
아영은 침묵했다. 겨울의 말에 언뜻 슬픈 감상이 스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전에 쇠락해버린 감정이었다. 비록 기억은 희미해졌으나, 분명 그녀도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랑은 서툴지언정 무척이나 진한 것이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진짜 고건철이라는 사람은 이미 옛날에 죽고, 그 잔해만이 남아 겉모습만 사람으로서 숨을 쉬고 있었던 거라고. 그 잔해 가운데 그나마 본연의 마음에 가까울 부분을 더 긍정해주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겠죠……. 중요한 건, 유일한 가족인 선생님께서 어떻게 느끼시는가가 아닐까요?”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에게도 존재의 연속성이 성립하는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잔해의 어느 일부가 더 예전의 고건철에 가까울 것인가? 그걸 구분하는 역할은 하나 뿐인 딸의 몫이라는 논지였다.
“어차피.”
겨울의 말이 이어졌다.
“추모라는 건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일이에요. 죽어버린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하죠. 연민도, 원망도, 그리고 용서도……. 그래서 제가 꽃다발이라고 표현했던 거예요. 영전에 꽃다발을 바친들,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굉장히 와 닿는 말이네.”
“제법 어른스럽죠?”
“풋.”
아영이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실소했다.
“이제 와서 무슨……. 넌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내 입장에선 예전부터 기이할 정도로 어른스러웠어. 그래서 봄을 그렇게 잘 키워낼 수 있었던 거겠지. 겨울이 넌 이미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부모야.”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고요.”
이때 아이와 로봇이 잠시 시끄러웠다. 겨울과 아영이 돌아보면, 봄에게 종속된 시스템으로서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구체형 로봇은 자꾸만 우주로 가고 싶다고 되뇌고 있었다.
「우주로 간다. 나는 간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우주. 간다.」
아직 말이 미숙한 아이가 방긋거리며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를 되새김질했다.
“우주! 우주!”
「우우우우우우주!」
“꺄하!”
봄은 대체 저 기묘한 기계 친구의 구성요소를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아이와 인공지능이 한데 어울려 우주를 외치는 광경은, 우스운 한편으로 제법 상징적인 것이기도 했다. 겨울과 아영이 농담 반 진담 반인 감상을 공유했다.
“미래네요.”
“미래구나.”
시선을 되돌린 아영이 하는 말.
“나는 보다 가까운 앞날 쪽이 궁금한걸.”
못내 표면으로 드러나는 불안이었다.
“우선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되돌려놓는 일부터 착수하려고요.”
겨울의 대답에, 관리자를 만난 이유를 알고 있던 아영이 확인하듯 묻는다.
“사후세계에 대한 그들의 꿈에 찬물을 끼얹어서?”
“네. 힘겨운 삶의 유일한 희망을 위협받은 격이니 다들 화를 많이 낼 거라고 생각해요. 감정이 깊고 강렬할수록, 그 감정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엔 최소한의 유대감과 동질감이 생겨나겠죠.”
“후우…….”
이번엔 아영이 한숨을 쉰다.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각오한 일이에요.”
“새삼스럽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거니?”
“그들 모두에게 사람으로서 현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오직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할 세상을 준비하고서야 겨우 싹트기를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지?”
겨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보기에, 이 세상은 이제까지 겨울처럼 추웠어요. 따뜻한 계절에 피어야 할 꽃이 겨울에는 피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잖아요.”
“…….”
“세상엔 자신이 안전해지고서야, 자신이 풍족해지고서야 비로소 선해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사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죠.”
가깝게는 시스템 관리자에서부터 멀게는 시에루 중장까지 포함된다. 겨울은 타인의 절박한 끼니를 빼앗은 적 없느냐는 질문에 대한 시에루 중장의 답변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장과의 대화를 요약해서 들려준 겨울은, 이어 중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저는 그분이 평범하게 나쁘고 비범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분이 자신의 출세욕과 재물욕을 채우지 못했다면, 비범하게 좋은 사람은 사라지고 평범하게 나쁜 사람만이 남았겠죠. 세상에 그렇듯 평범하게 나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그러네. 듣고 보니…….”
“별을 보며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삶이 따뜻할 때만 드러나는 선함도 아름다운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거겠죠. 그렇다면 그걸 싹 틔우고 지켜주려는 노력에도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모든 이들에게, 그 사람의 선의가 배신당하지 않을 세계를.
“그 노력은 영영 보답 받지 못할지도 몰라.”
“말 그대로 모르는 거잖아요.”
겨울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는 이제까지 이 세상이 흘러온 물길을 벗어나, 다 같이 비범한 사람이 되어서, 모두가 함께 물 밖으로 헤엄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눈에 파묻힌 꽃씨의 입장에선 얼어붙은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온실의 꽃을 나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차가운 세상 쪽을 어찌할 능력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렇게 학습한 체념을 인류의 신포도라고 해도 무방할 터. 최소한 겨울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겨울을 빤히 바라보던 아영이 소감을 말했다.
“봄이 왜 그토록 너를 따르는지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 들어.”
“부끄럽네요…….”
“아니, 정말로. 이미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자신에게 불안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영은, 처음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카페 로얄을 홀짝거렸다. 사실 봄과 겨울이 진정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그녀를 기만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사람에게는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차원의 문제였을 따름. 커피의 온도는 그것을 타준 사람의 따뜻함이었다.
잠시 후 아영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만 갈게.”
“벌써요?”
“그동안 내가 순수한 친구는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 애인 있는 사람의 저녁시간을 여기서 더 빼앗고 싶지도 않고.”
“이런.”
“내일은 좀 더 좋은 친구가 되어서 오도록 할게.”
자신을 따라 일어서는 겨울을 향해, 아영은 외투를 챙기며 친근하게 웃어보였다.
“나오지 마. 그리고…….”
“……?”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아버지.”
겨울이 고건철의 유산을 대하는 태도를 긍정하는 농담이었다.
그녀가 떠난 뒤 홀로 남은 겨울은, 아침과 달라진 창가로 다가가 땅거미가 내려앉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손을 대니 늦겨울의 냉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투명한 차가움이 체온으로 물들기까지는 둔하게 흐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바라보는 풍경은 겉보기로만 어두운 것이 아닐 터였다. 봄과 공유하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한 겨울은, 밝은 낮에도 어두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고단한 하루를 정리하는 모습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일과를 끝내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여전히 사후의 희망을 꿈꾸며 타인의 사후를 엿보는 자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관조하며, 겨울은 생각했다.
이토록 차갑고 쓸쓸하기만 한 세상에-
‘봄이 있으라.’
#납골당의 어린 왕자, 완결.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로 이어집니다.
#앤의 위시리스트는 1월 14일부터 연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이용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