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75)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 (1)
겨울이 물리현실에서의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인 이후로, 종말이 유예된 세계에서는 또 다른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스쳐 지나갔다. 봄을 맞이하는 미국은 한때의 혼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방역전쟁은 사실상 마무리되었으며, 중국계 주민들의 이주는 대중의 인식 속에서 이미 익숙함으로 인한 일상성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아무런 사고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이 반년 넘게 이어져온 덕분이었다.
백신접종의 우선순위로 인한 갈등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국 시민 전체가 접종을 마치기까지는 아직도 수년의 시간이 남아있었으나, 최소한 고위험군 지역에서만큼은 접종률이 80%를 넘어갔다. 이는 급격한 감염폭발이 일어나려도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중점적으로 홍보하여 대다수 시민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물론 백신의 불법적인 거래를 시도하는 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겨울이 보기엔 일종의 특권의식, 혹은 계급의식에 젖어있는 자들이었다.
‘사회의 규율이야 어쨌든 나와 내 가족은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무엇 하나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뉴스에 등장하는 앤은 일반 시민들이 공권력의 힘과 공정성을 믿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여기에 더해 크레이머가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통과시킨 특별법은 무지막지한 벌금으로 범죄자들을 후려쳤다. 대중은 정부의 행보에 열렬한 지지의 갈채를 보냈다.
이렇게 찾아온 평화는 하루하루 종말에 부대끼던 미국인들에게 각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각별함이 깊어질수록 골치 아픈 문제는 잊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단했던 한 주를 보내고서 맞이한 주말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누워만 있는 사람의 심리상태와 비슷할 것이었다.
정세가 안정되었음에도 주류사회로부터 중국계 시민들의 처우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약하기에 악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흐름을 경고하는 경구일 터.
겨울은 시민들의 그러한 심리를 이해했다. 방역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여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길 즈음 찾아왔던 전 사회적인 혼란. 자연히 피로하지 않겠는가. 마지막 고비이리라 여기고 제로 그라운드에 다녀왔어도 앤과 결합하지 못했던 겨울이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당장은 재정착과 개척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지.’
이는 강화된 「통찰」로 내다본 전망이었다. 비참한 처지에 놓인 중국계 시민과 난민들은, 그래도 새로운 터전에서 절망 이외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도 찾아올 인류의 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을지.
이주민들이 맞이할 인고의 시간에 분명한 끝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 끝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나날의 연속이리라는 점은,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준비하려는 겨울과 앤의 부담을 적잖이 덜어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그토록 고대하던 때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첫걸음으로서, 겨울은 장장 80일에 달하는 휴가신청서를 제출했다.
미군은 규정상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매달 2.5일의 휴가를 받으며, 2년간 최대 60일까지 쌓아두는 것이 가능하다. 60일을 초과하는 미사용 휴가는 회계연도의 첫 날(10월 1일)을 기준으로 판매(Sell) 처리를 해야 했다. 이는 미사용 연차를 돈으로 돌려받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다만 임무수행으로 인해 휴가를 쓸 여유가 없었던 인원에게는 특별히 80일까지의 적립을 인정해준다. 제로 그라운드에 투입되랴, 본토 긴급대응체계의 초기 구축에 참여하랴 해서 도무지 휴가를 쓸 겨를이 없었던 겨울도 이 규정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현재 겨울이 사용 가능한 휴가는 총 95일. 지난해 10월 1일 초과분이 잘려나갔으나, 그 뒤로 다시 6개월간 2.5일씩 15일의 추가 적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금 80일을 써버려도 보름짜리 유급휴가가 남는다. 다음 회계연도가 시작될 무렵엔 30일까지 회복되어 있을 터였다. 이번에 앤의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는 것부터 결혼식과 신혼여행까지 해치워버리고도 연말 쯤 한두 번 더 좋은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한 일수였다.
당연하게도, 특수전사령부와 더불어 겨울이 이중으로 속해있는 긴급대응사령부의 인사담당자는 한 지역을 책임지는 핵심장교의 무지막지한 휴가계획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정국은 분명히 안정되어 있었고, 잠재적 적성국인 러시아도 현 시점까지는 미국과 매우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급변사태가 터진다 한들 휴가 나간 인원을 소환할 정도의 여유는 있을 터이니, 겨울의 휴가신청서를 반려시킬 근거가 마땅치 않았다. 하다못해 냉전기의 쿠바 위기 당시에도 조짐 자체는 수십일 전부터 있지 않았던가.
독립대대 간부들은 겨울이 그토록 긴 휴가를 승인 받은 데에 놀라움을 표했고, 휴가를 제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축하를 전해왔다.
유라는 시원섭섭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최소한 하루 정도는 저희에게 할애해주시겠죠? 우리 부대는 단체휴가가 불가능하니까요.”
지휘관인 겨울이야 부대대장이나 대대 참모, 하다못해 선임중대장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지만, 독립대대 자체는 부대 단위의 휴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서부지역 비상대응체계에 큰 구멍이 뚫려버리는 까닭. 비상대응체계를 구성하는 공수부대들이 러시아 공수 전력에 대한 대응전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즉 독립대대 전체가 겨울의 결혼식에 참석하진 못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알려진 간부들이야 공보처의 배려 아닌 배려를 받겠지만.’
홍보는 방역전쟁이 소강기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였다. 같은 맥락에서 하급 장교들 중에서는 중국계 간부들이, 부사관들 중에서는 입양아 출신 병사들이 어찌어찌 하객에 포함될 지도 모르겠다. 크레이머 행정부의 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테니.
여하간, 겨울은 유라의 요청대로 간부들끼리의 회식에 참석했다. 지난 12월에 만 21세가 되었으므로 민간 업장에서 술을 마셔도 문제가 될 여지가 없었다.
회식에서 병사들이 제외된 것은 언론에게 꼬리를 밟힐까봐 걱정스러워서였다. 애초에 부대 특성상 다 모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휴가 첫날, 약속장소에 이르게 도착한 겨울이 야구 모자와 알 큰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혹시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다.
‘있네.’
겨울의 눈에 바에 앉아있는 유라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모이면 자리를 옮길 생각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여 책을 읽는 한편으로 먼저 위스키 한 잔 걸치고 있는 품새였다. 경력을 충실하게 쌓아온 장교로서의 느긋한 여유가 돋보인다.
“앗, 혹시 대장님?”
유라가 아니다.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막 들어선 한별이었다.
겨울이 선글라스를 살짝 들추는 동시에 입술에는 손가락을 대어보였다.
“쉿.”
“어? 왜 그러세요?……아하.”
유라를 발견한 한별은 겨울이 침묵을 요구한 이유를 깨닫고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가설 듯 다가설 듯 다가서지 못하는 모습에서 어리숙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저분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중얼거리는 한별의 의문을 겨울이 풀어주었다.
“백산호 사장님의 자제분이시네요.”
“아, 맞다!”
한별이 소리 죽여 손뼉을 쳤다.
“전에 소개받았었는데 살이 빠져서 알아보기 힘들었네요. 아마 백정남씨……였던가?”
“그런 이름이었죠.”
“어라. 저야 소개를 받았다지만 대장님은 저분을 어떻게 아세요? 보신 적 있으세요?”
“예. 전에 입대 문제로 한 번…….”
백산호의 아들은 천식 환자였다. 병세가 심하지는 않았으되 입대에 적합할 정도는 아니었다. 난민구역에 대한 의료지원이 충분치 않기도 했었고. 백산호는 그런 아들에게 어떻게든 제복을, 그것도 장교의 정복을 입혀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과거의 미군은 13번째 생일 이후 천식 발병 이력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에겐 무조건 입영 부적합 판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양용빈 상장의 테러로 인해 병력부족이 심화되고부터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천식 환자들을 비전투분야의 병력자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증상의 경중은 중요한 기준이었다.
‘비전투분야라고 전투훈련을 안 받는 게 아니니까.’
백정남은 완화된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 백산호는 전몰장병 유가족들을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며 간곡히 부탁했으나, 겨울은 백정남 본인을 위해서라도 군인이 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거부했다. 어디에 배치되더라도 건강상의 문제로 눈총을 받게 될 것이기에. 입영의 문턱이 낮아졌다고 요구되는 임무수행능력마저 낮아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중사가 소개를 받았었다고요? 저 사람을?”
겨울의 반문에 한별이 끄덕끄덕 긍정했다.
“선 보는 자리였죠 뭐. 제 정신머리가 이 꼴이라 거절하려고 했는데-”
오른손 엄지로 등 뒤에 늘어뜨린 지정사수 소총을 가리키는 한별. 겉보기엔 멀쩡해도 무기를 휴대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는 그녀였다. 권총으로는 조금 부족할 정도. 그녀의 집이 거의 무기고에 가깝다는 사실은 독립대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중매를 서는 아주머니께서 어찌나 끈질기시던지. 한 번만 받아주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하시길래……. 에잇, 눈 딱 감고 밥 한 끼만 먹자! 하는 생각에서 알겠다고 했죠. 안면이 아예 없는 사이도 아니고, 그 분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흠…….”
“근데 막상 만나보니까 저 분도 같은 마음으로 나오셨던데요?”
“그래요?”
“네에. 제가 먼저 이러저러해서 죄송하게 되었다, 하니까 저분도 웃으면서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하시던걸요.”
한별은 볼을 긁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아버지께 군인을 좋아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거기서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그건 자기가 반한 사람이 군인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 군복 입은 여성이 이상형이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서 죄송하게 되었다고……. 말이 좀 어눌할 뿐 인상 자체는 괜찮았었죠.”
회상을 마친 한별이 빙그레 웃는다.
“흐. 이제 보니 좋아한다는 사람이 우리 중댐이었던 모양이군요.”
“중댐?”
“중대장님이요.”
“아하.”
“흥미진진하네요. 단기간에 살을 쫙 뺄 정도면 보통 정성이 아닌데.”
유산소 운동을 하기 벅찬 천식환자가 상당한 감량을 했으니, 겨울이 보기에도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성격 면에서 아들이 꼭 아버지를 닮으라는 법은 없었다.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모습으로부터 백산호의 능글능글함을 연상하기는 힘들었다.
텁! 읽던 책을 덮은 유라가 살짝 짜증이 난 얼굴로 숫기 부족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되게 정신 사납네요. 앉든가 가든가 둘 중 하나만 해주실래요?”
“…….”
망부석처럼 굳어 눈을 굴리던 정남의 시선이 유라가 읽던 책에 고정된다.
“오, 오스카 와일드 좋아하시나 봐요.”
“네, 좋아해요.”
맥락이 전혀 없는 말이었으나, 유라는 일단 끄덕여 주며 말했다.
“그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말을 했죠. 「어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은 갈 때마다 행복을 가져다준다.(Some cause happiness wherever they go; others whenever they go.)」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 아니요. 그, 그, 그치만 아주 멋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멋진 말?”
갸우뚱 하는 유라.
“아무튼, 정남 씨는 자신이 어느 쪽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세요?”
“그, 글쎄요.”
“제 입장에서 지금의 정남 씨는 뒤쪽에 속하시는 분 같거든요. 적당히 다른 자리로 가주시면 제가 행복해질 것 같은데.”
“……네. 죄송했습니다.”
와, 세다. 한별이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시선과 어깨가 축 늘어진 정남은 겨울과 한별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채로 문을 나섰다. 물론 눈으로 그 뒤를 좇던 유라는 두 사람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겨울에게 유라가 볼멘소리를 냈다.
“뭐 좋은 거라고 보고만 계셨어요?”
“하하…….”
겨울이 멋쩍게 웃는 사이 한별이 유라에게 말을 걸었다.
“중댐 보기보다 가차 없으시네요. 저 정도면 사지 멀쩡하겠다, 성격도 아주 못난 건 아니고 가진 돈도 많겠다, 남자 가뭄이 심한 요즘 기준으로는 괜찮은 편에 속하지 않나요?”
“괜찮기는 개뿔이.”
위스키를 홀짝이며, 유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진 건 오직 아버지의 후광 뿐 스스로 이룬 건 하나도 없어. 거기다 아버지의 뜻을 거부할 만한 강단도 없지. 엮이면 사사건건 귀찮아질 거야. 방금도 봤잖아? 말 붙일 엄두도 못 내다가 말 한 마디 차갑게 했다고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 거. 변종의 멱살을 잡고 대검으로 찍어 죽일 정도는 못 되더라도 거절당했을 때 한 번 더 말을 붙여볼 정도의 용기는 있어야지.”
“그런가…….”
“그리고, 남자 가뭄이 심하다지만 우리가 남자가 없어서 쩔쩔 맬 처지는 아니지?”
유라나 한별쯤 되면 오히려 넘쳐나서 문제일 것이었다.
“그렇긴 해두…….”
한별이 한숨지으며 턱을 괸다.
“대장님께서 결혼을 하신다니까 왠지 모르게 심란해지는 거 있죠? 나도 슬슬 생각해두지 않으면 곤란한가, 싶고. 그렇다고 마음이 동하는 건 아니고.”
“서두를 것 없잖아? 너나 나나 아직 이십대인걸.”
“에이. 몇 년 안 남았죠. 평화로운 1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돌이켜보세요. 넋 놓고 있으면 금방 서른 될 걸요. 중댐은 가뜩이나 눈도 높아지셨는데.”
눈이 동그래지는 유라.
“무슨 소리야? 난 눈 별로 안 높아. 우리 대장님을 기준으로 절반만 되어도 충분해. 성격이랑 능력 면에서 말이지. 아, 능력에서 전투력은 당연히 제외. 전투력은 대장님 반만 되어도 트릭스터가 자살하고 싶어지는 수준일 테니.”
“성격과 능력이 대장님의 절반……그런데 눈이 높지 않다고…….”
한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