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80)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 (7)
비록 샷 건을 무릎에 얹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앤의 양친이 달리 손님맞이 준비를 해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예비사위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가 아닌가.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 앤의 어머니는 밑 준비를 갖춰둔 식사를 빠르게 차려냈다. 메뉴는 치킨 수프를 곁들인 미트볼 스파게티였다.
“와…….”
겨울이 약간 질린 기색으로 탄성을 흘렸다. 메뉴는 간소할지언정 향과 양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 몫으로 나온 스파게티 위엔 잘 익은 미트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대충 3파운드 쯤 되는 같다. 면이 아예 보이질 않아서 미트볼만 담아줬나 싶을 정도였다.
식전기도를 외운 앤의 어머니, 수잔이 겨울에게 손짓했다.
“실컷 들어요. 군인은 고기를 잘 먹어야 힘이 나지.”
“네, 감사합니다.”
차분히 식기를 드는 겨울. 시선이 마주친 앤은 그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겨울이 겨우 먹는 걸로 탈이 나진 않을 테니까. 속이 부대껴 좀 힘들어할 수는 있을지라도.
겨울은 우선 치킨 수프부터 한 스푼 떠먹어보았다. 닭고기를 푹 고아낸 육수는 비어있던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맛이었다. 투박하기에 더 깊고 단순하기에 더 담백하다. 기본에 충실한 요리라는 느낌. 국물의 진하기에 비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름기는 조리에 들어간 정성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껍데기를 벗겨 손으로 일일이 찢어냈을 속살은 꼭꼭 씹을 때마다 뜨겁게 젖은 감칠맛이 배어나왔다.
삶이 고단한 누군가에게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되어줄 법한 음식이다. 항모 렉싱턴의 승조원들이 침몰하는 배의 갑판에서 퍼먹었던 아이스크림처럼.
이번엔 미트볼을 하나 먹어본다. 토마토소스에까지 고기를 갈아 넣어 한층 더 묵직해진 맛. 바삭하게 튀겨진 얇은 껍질 안쪽은 새콤한 소스가 중심까지 제대로 배어있었다. 곱게 다져 뭉친 고기는 적당히 단단하여 씹는 즐거움을 살려냈다.
“와.”
겨울이 다시 감탄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손이 많이 갔을 미트볼이네요.”
“그걸 알겠어요?”
신기해하는 수잔에게 겨울이 끄덕여 보였다.
“속에서도 소스 맛이 나니까요. 소스가 스미도록 해서 한 차례 익힌 다음 기름으로 빠르게 튀겨내고, 그 후 다시 소스와 함께 볶아낸 것 같습니다. 소스의 간도 각각 다르게 한 느낌이구요. 이런 음식을 먹게 되어서 기쁘네요.”
이걸 깨닫는 건 입맛과는 별개인 학습의 영역이었다.
수잔은 겨울의 찬사에 함뿍 미소 지었다.
“의외로군요. 요리를 좀 하는 모양이죠?”
“네. 취미입니다. 앤에게 만들어주는 것이 즐겁거든요.”
이러고서 겨울과 앤이 다정한 눈웃음을 교환하자, 흐뭇해하던 수잔이 남편을 돌아보았다.
“당신도 저런 걸 본받아 보는 게 어때요?”
갑작스레 유탄을 맞은 스티브가 먹다 말고 눈을 껌벅인다. 그리곤 눈을 찌푸렸다.
“뭐. 왜. 뭐. 시키는 대로 장이나 잘 봐오면 됐지.”
“어휴.”
“내 요리는 스테이크로 시작해서 스테이크로 끝난다. 그 이상은 무리야.”
귀한 재료를 버리는 짓이지. 스티브의 당당한 태도에 수잔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스티브는 그런 아내 대신 겨울과 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쩐지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티를 안 내려고 하면 더 티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겨울은 그의 우려를 알 것 같았다. 아버지로서 품을 법한 염려. 오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 대령. 내 딸은 어쩌다 만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앤의 양친은 식사가 느려질 수밖에 없을 만큼의 호기심을 쏟아냈다. 이제껏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딸의 연애사인 만큼 쌓여있던 궁금증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대답에 귀 기울이던 두 사람은 수시로 놀라움을 드러냈다. 비록 기밀로 지정된 이력에 대해선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으나, 자침을 앞둔 배에 나란히 갇혔었다는 사실쯤은 이야기해도 괜찮았다. 세부사항을 적당히 생략하면 그만이었다.
“우선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렇게 몇 번이나 앤의 목숨을 구해줬다니.”
스티브의 말에 겨울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도 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이러는 사이에 수잔은 딸을 열심히 타박했다. 위험한 일 안 한다며. 안 한다며! 라고 화를 내면서. 찰싹찰싹 맞던 앤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밥 좀 먹자고 불평한다. 겨울의 눈엔 그 소극적인 저항조차도 귀여워 보였다.
스티브가 묻는다.
“헌데, 우리 애가 먼저 고백을 했다고?”
“예.”
“허.”
앤을 돌아보는 스티브.
“너 참 용기가 대단했구나.”
수잔이 말했다.
“용기 있는 자가 마땅한 대가를 얻는다잖아요.(None but the brave deserves the fair) 목숨 내놓고 다닌 건 며칠쯤 더 혼나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뭐…….”
“칭찬해줘야겠죠?”
끼어드는 앤을 향해 수잔이 다시 도끼눈을 뜬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싶네만.”
스티브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애가 내 딸이긴 해도, 솔직히 그리 예뻐 보였을 것 같진 않은데. 지금은 놀랄 만큼 달라지긴 했지만……. 예전엔 당췌 스스로를 가꿀 생각을 하질 않았던 터라. 사랑 같은 거 다시는 안 하겠다는 소리나 하고 앉았고.”
겨울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아름다웠거든요.”
“흠.”
“앤과 저는 서로를 돕고 서로를 알아가며 천천히 무르익은 사이라 생각합니다. 착실하게 쌓아올린 감정이고 관계이니 가벼운 변덕으로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흐-음.”
“저는 저를 사랑해주는 앤의 존재가 기쁘면서도 고맙습니다. 이 마음은 해가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달라지지 않더군요. 앤 역시 같은 마음이겠죠.”
“……그런가. 해가 거듭 바뀌었어도 말이지.”
스티브는 눈길을 내리깔며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수잔이 이번엔 남편을 타박했다.
“이 좋은 날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요?”
“그러게. 왜일까.”
겨울은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활도 많고 총도 많군요. 모으는 취미가 있으신가 봅니다.”
고갯짓으로 가리킨 건 벽면에 가득 걸린 각종 무기들이었다.
“의외로 라이플이 몇 자루 안 되네요.”
겨울의 의문에 앤이 대답했다.
“이 카운티에선 라이플을 이용한 사냥을 금지하고 있어서요.”
“아하.”
“다른 무기는 다 괜찮아도 라이플만 안 된다니. 무슨 기준이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인명 사고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거나? 라이플은 유효사거리가 길잖아요.”
“그거야 슬러그 탄을 장전한 샷 건도 마찬가지인걸요. 물론 그래도 소총 쪽의 사거리가 훨씬 더 길 테지만, 대부분은 어차피 굴곡 많은 지형의 숲에서 쓰는 건데요. 지형장벽과 장애물 때문에 투사범위가 한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자 간에 괄목할 만한 차이는 없어요.”
슬러그 탄은 샷 건에 사용하는 단일탄체로, 산탄에 비해선 당연히 사정거리가 길었다. 조준사격으로는 보통 100야드(약 91미터) 정도를 한계로 보지만, 어디까지나 조준사격의 한계일 뿐 탄 자체는 그보다 훨씬 더 긴 거리를 날아간다.
어차피 사고가 조준사격으로 생기는 건 아닌 만큼, 어떤 의미로는 슬러그가 장전된 샷 건이 소총 이상으로 위험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맞으면 방탄복을 입고 있어도 죽기 십상이었다.
“역병이 퍼지고 나서 깨달은 건데, 샷 건은 미국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시민의 권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네.”
스티브가 스푼을 놓고 진지하게 하는 말.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샷 건을 한 자루씩 가지고 있었다면 방역전쟁은 아마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을 거야. 모두가 사이좋게 변종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날려버리고 웃으면서 승리를 자축했겠지. 하지만 중국인들은 샷 건을 소지할 수 없었어. 어째서인가? 그들이 시민으로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야. 부패한 정치가들이 시민들의 무장을 용납할 리가 있나.”
“하하.”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는 자유인이고, 그렇기에 자유로운 시민들의 나라인 미국엔 역병을 이겨낼 저력이 있었다!”
앤의 어머니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스티브가 멋쩍어했다.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별로였나?”
이에 대한 수잔의 대꾸.
“총기협회 사람들은 좋아하겠네요. 시답잖은 소리 그만 두고 밥이나 먹어요.”
“알았어…….”
웃음을 참으려는 겨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농담보다는 그 이후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이 집안의 최고 실세는 앤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식후엔 디저트로 치즈를 넣은 애플파이가 나왔다. 이것도 꽤나 중량감이 넘치는 크기인지라 겨울은 조금 곤혹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래도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 배는 불러도 입으로는 당기는 음식이었다. 곁들인 차와 잘 어울릴 듯 하다.
수잔의 정성을 생각해서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겨울.
“……?”
바삭한 파이 너머로 아삭한 식감까지는 좋았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뭔가가 이상하다. 비강을 콱 찌르는 암모니아 향에 진하고 꼬릿한 냄새가 더해졌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아니라 속으로 갸우뚱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크림처럼 부드럽고 고소하기도 한 것이, 굉장히 기묘한 맛이었다. 잘 구워진 파이가 강한 향을 꽉 묶어놓고 있는 느낌. 오래도록 발효시킨 블루치즈의 일종인 듯하다.
잘 먹는 겨울을 보고 찰나 간 이채를 띠었던 수잔이 딸에게도 손수 파이를 덜어주었다.
“너도 얼른 먹으렴. 좋아하는 거잖니.”
“배부른데…….”
“한 쪽만 들어.”
“흐음.”
앤은 찻잔을 내려놓고 파이를 받아들었다. 수잔의 장난기를 느낀 겨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앤이 때때로 내비치곤 하는 짓궂음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파이를 우물거리던 앤의 표정이 서서히 굳더니, 이내 팍 일그러졌다.
“어때? 감쪽같이 속았지? 네게 먹이려고 엄청 연습했단다.”
“엄마!”
배를 잡고 웃는 수잔에게, 입안에 있던 걸 간신히 삼킨 앤이 항의한다.
“나 이런 치즈 엄청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이거 꼭 발 냄새 같단 말예요!”
아. 겨울이 내심 동의했다. 확실히 발 냄새와 유사하다.
“그래도 맛은 있잖니. 얼마나 비싼 건데. 발 냄새도 맡다보면 좋아진단다.”
“좋기는 무슨! 겨울의 발 냄새도 아니고!”
“……오.”
수잔이 입을 다물었다. 스티브는 그 옆에서 먹던 동작을 멈추고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응시하는 양친 앞에서 앤이 눈길을 피한다. 그녀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부모 앞이라 더더욱 창피한 말실수였다. 겨울도 꽤나 민망했다.
잠시 후 스티브가 침묵을 깼다.
“하여간 마누라고 딸이고……. 먹는데 자꾸 더러운 이야기 좀 하지 마. 커리 먹으면서 똥 이야기 하는 거랑 뭐가 달라. 음식 소중한 줄 알아야지.”
그리고 딸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 이번엔 얼마나 머물다 갈 생각이냐?”
“……음, 글쎄요. 작정하고 휴가를 낸 거라서.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보름 이상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여기서 겨울과 하고 싶었던 게 많거든요.”
“우리야 네가 길게 있어줄수록 좋다만.”
그는 겨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겨울……자네와 나도 시간이 꽤 많은 셈이군. 혹시 사냥 좋아하나?”
“싫어하진 않습니다.”
“한 번 같이 나가보세. 나가서 남자 대 남자로 진지한 대화도 해보고…….”
말끝을 흐린 스티브가 확인하듯 묻는다.
“사냥 면허는 있는가?”
“아뇨, 그럴 여유가 없었던지라.”
“잘 됐군. 이번 기회에 하나 받아놓게. 앤이랑 때때로 즐기기에도 좋지 않은가. 마침 내일 요 근처에서 안전교육 일정이 잡혀있거든……. 신청이야 진즉에 마감되었겠지만, 강사와 아는 사이이니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걸세. 너도 괜찮겠지?”
마지막은 딸을 향한 질문이었다. 사냥 면허 현장교육은 오전과 오후에 걸쳐있는 8시간짜리 코스였다. 즉 하루의 낮을 통째로 날리는 셈. 어떻게 보면 아깝기도 하다. 그러나 앤은 반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아는 까닭이었다. 그가 아버지로서 못내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도. 예비사위에게 확신을 얻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