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82)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 (9)
스티브와 수잔의 집으로부터 남동쪽으로 6마일쯤 내려간 곳엔 다수의 주유림(州有林/State forest)이 연달아 이어지는 훌륭한 사냥터가 존재했다. 서식지가 넓다는 건 그만큼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는 뜻.
비록 본격적인 사냥철은 아니었으되, 스티브는 봄이라 더 좋은 점도 있다고 말했다. 사슴이나 칠면조, 아메리카 흑곰처럼 그럴듯한 사냥감들의 수렵이 금지되는 기간임은 아쉽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냥꾼들의 숫자 또한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한적한 사냥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겐 가을이나 겨울보다 봄과 여름이 더 나은 것이다.
아침식사는 수잔과 앤이, 도시락은 겨울이 각각 준비했다. 도시락은 냄새를 적게 풍기는 재료들로 만든 샌드위치였다. 요리보다는 조립에 가깝다는 점에서 겨울로서도 만들기가 편했다. 거친 입맛을 연습으로 극복한 메뉴는 아직까지 그리 다양하지 못했다. 수잔은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겨울의 모습을 어제 이상으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딸과의 대화 끝에 마음을 보다 확실하게 정한 영향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앤은 식탁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아버지를 보며 입을 가리고 큭큭거렸다. 스티브는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일출을 곁들인 이른 식사는 자체의 기름으로 튀기다시피 구운 베이컨과 그 기름을 그대로 써서 토마토와 함께 볶아낸 스크램블 에그가 메인이었다. 여기에 두툼한 해시브라운까지 더해지니 열량 면에서 차고 넘치는 식단이 완성되었다.
기름기가 빠진 베이컨의 바삭바삭한 식감, 베이컨과 토마토의 향이 배어 감칠맛으로 가득한 스크램블 에그, 깊은 곳까지 고르게 익어 포슬포슬 부서지는 해시브라운의 하얀 속살은 서늘한 아침과 대비되는 따스함으로 겨울에게 작은 행복감을 선사해주었다.
“그럼 다녀오리다.”
배를 든든히 채운 스티브와 겨울이 현관을 나서자, 문가에 기댄 수잔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바비큐 준비를 해둘 테니 제대로 된 걸 잡아오도록 해요.”
“맥주는?”
“궤짝으로 쌓아놓은 게 부족하다고 할 셈은 아니겠죠?”
“…….”
스티브는 뒷머리를 한 번 긁고서 낡은 포드 픽업트럭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겨울 역시 배웅 나온 모녀에게 눈인사를 남기고는 옆자리에 착석했다.
트럭은 새벽의 푸르름에 물든 도로를 달려 해먼드 힐 주유림의 캠핑장에서 멈춰 섰다. 스티브가 예견했던 대로, 넓은 캠핑장은 굉장히 한산했다.
사슴 사냥이 한창일 무렵 같았으면 이 시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주 전체에 걸쳐 근 60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사냥을 나선다는 시기이고, 이곳은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사냥터였으니까.
쌓여있던 눈이 최근에야 녹아내린 숲은 낙엽에 덮인 땅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발소리가 줄어 사냥에 유리해지는 환경. 잠에서 깬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웅덩이를 지나,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길을 벗어난 숲속을 걸었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희미하면서도 다채로운 냄새들을 몰아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숲의 향취라 뭉뚱그리겠으나, 겨울은 그 결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저쪽으로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겨울이 방향을 가리기자 스티브는 별다른 이견 없이 동의했다. 그도 겨울의 전적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한 때 올레마 거점을 사냥으로만 먹여 살렸던 사람인데, 그 감각을 의심해서 뭣하겠는가. 겨울은 스티브에게도 흔적이 잘 보일만한 길을 선택했다. 그가 못 보고 넘어간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문자 그대로 여가로서의 사냥인 것을.
스티브가 작게 줄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랑 수잔은 말이지, 앤의 상대가 과연 멀쩡한 남자일지가 줄곧 의심스러웠다네.”
“그러셨군요.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있다곤 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알려줄 생각을 않았으니 말이야. 아무리 캐물어도 웃으면서 얼버무리기만 하고. 그래서 우린 노파심에, 혹시 이 애가 이번에도 확신이 서지 않는 상대를 사랑하게 된 것인가? 싶었지. 자기는 이미 불가항력으로 사랑에 빠져버렸지만, 전적을 아는 우리에겐 쉽게 털어놓기가 어려운 구석이 있는 남자를.”
“…….”
처음엔 아마 다른 의미로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확신이. 그녀가 확신을 얻게 된 건 호텔 만다린 오리엔탈에서 피투성이가 된 겨울과 마주친 이후의 일이었을 터였다. 그날 이후 그녀의 침묵은 성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애는 남자를 보는 안목이 좀……그랬거든. 솔직히.”
옛날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스티브.
“제 병을 고치는 의사는 드물다더니, 범죄자들은 그토록 잘 분석하는 녀석이 연애를 할 땐 거의 장님이 되어버리다시피 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네. 남자의 알맹이를 보는 법을 잘 몰랐어……. 그래서 앤이 다음 남자를 데려올 때에는, 본인 말을 믿는다면 그 다음 남자라는 게 과연 있을지는 의문이었네만, 경우에 따라서는 샷 건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지.”
“쫓아내실 작정이셨습니까?”
“세상엔 반쯤 체념하다시피 떠밀리듯 결혼을 결심하는 사례도 많지 않은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리고 앤에게도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러려고 했었네. 총을 들이대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어이쿠 젠장 똥 밟았구나 하고 달아나지 않겠나? 글러먹은 놈 치고 대담한 놈은 드문 법이니까.”
“그렇지요.”
“반대로 남자가 책임을 피하고 싶어 하는데도 앤이 이 사람 없인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한다면, 혹은 벌써 돌이키지 못할 만큼 늦어버린 상태라면, 최악의 경우 협박을 해서라도 남편 혹은 아버지 노릇을 하도록 만들어 줘야겠다고 여겼지.”
속도위반 결혼을 샷 건 매리지(Shotgun marriage)라고 부르는 것은, 총을 들이대서라도 책임을 지게 만든다는 의미의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스티브의 말처럼 그걸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부모는,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무척이나 희귀한 편이었다. 요즘은 친자확인만 되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으므로. 어쨌든 범죄 행위이기도 하고.
“자네는 진심으로 내 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가? 이 사람이야말로 내 삶의 절반이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예.”
“즉답이로구먼.”
“고민할 여지가 없는 질문을 주셨으니까요.”
애매하게 끄덕이는 스티브.
그로부터 40분 뒤, 스티브는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동물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배설물 근처의 낙엽을 헤집자 크고 작은 발자국들이 드러났다. 낙엽 때문에 무디게 찍힌 자국들이었으나, 경험 많은 사냥꾼이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미와 새끼들로 이루어진 멧돼지 무리. 배설물의 축축함은 이 무리가 멀리 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찾아볼까? 첫 사냥감으로 괜찮겠어.”
“그러시죠.”
겨울이 동의했다. 멧돼지처럼 해로운 동물은 일 년 내내 사냥이 허가되어있을뿐더러 일일 사냥제한(Bag limit)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코요테와 라쿤, 여우 등이 그러하듯이.
멧돼지 추적엔 스티브가 앞장섰다. 겨울은 그가 흔적을 놓칠 때만 잠깐씩 앞으로 나섰다. 천천히 걸었으나 중간에 끊김이 없다보니, 불과 반시간 남짓 이동한 끝에 목표로 삼았던 무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돼지들이 먹이를 탐색하느라 굼뜨게 움직인 덕분이기도 했고. 지금은 땅을 파헤쳐 뭔가를 파먹는 중이다.
수풀에 의지하여 자세를 낮춘 스티브가 속삭이듯 말했다.
“흠. 새끼들까지 합쳐 여덟 마리나 되는군. 나 혼자였다면 운이 따라줘도 둘을 잡는 게 고작이었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겨울을 돌아보는 그. 겨울이 끄덕였다.
“일단 표적을 둘씩 분담하고, 나머지는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해보죠. 추가로 두 마리까지는 어떻게든 될 겁니다.”
“샷 건으로 임기응변이라. 재밌는 구경을 하겠어.”
어제의 안전교육 때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무장은 오버 앤 언더 형식의 더블 배럴 샷 건이었다. 멧돼지들은 총성이 울리는 즉시 반응하므로, 보통은 두 발을 쏴서 두 마리를 연달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겨울이 미소 지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하실 텐데요.”
“이럴 땐 자신감 있게 큰소리를 쳐야지. 나한테 점수를 따야 할 입장 아닌가.”
“하하.”
작게 웃은 겨울이 견착을 단단히 했다. 오른쪽 손가락 사이엔 장전할 탄을 끼워놓은 채로.
“준비 되면 먼저 쏘세요, 스티브. 따로 신호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아. 어미를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세. 내가 어미와 바로 왼쪽에 있는 새끼를 쏘지.”
“알겠습니다.”
겨울은 스티브가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신체적 긴장이 점점 팽팽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노라면, 신호가 없어도 그가 방아쇠를 당길 순간을 예감할 수 있었다.
타탕! 타앙!
두 사람의 첫 사격은 하나인 것처럼 절묘하게 겹쳐졌다. 차이는 연속 사격의 속도. 스티브가 두 발 째를 조준할 때 겨울은 벌써 총을 꺾어 약실을 열고 있었다. 한 쌍의 탄피가 툭 튀는 즉시 곧바로 채워 넣는 두 발의 탄환. 약실을 폐쇄하는 마찰음은 스티브의 두 번째 총성에 파묻혔다. 그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겨울의 세 번째, 네 번째 사격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또다시 찰나의 재장전. 동시에, 쓰러진 멧돼지들의 곁으로 뛰쳐나간 겨울이 도주하는 네 마리의 뒷모습을 무릎쏴 자세로 포착했다. 이대로 쏴버리면 뒤에서 앞으로 관통된 돼지는 내장이 터져 고기를 다 버리게 될 터. 한 마리가 방향전환을 하는 순간, 그 머리통이 겨울의 조준선 상에 들어왔다. 그리고, 쾅! 즉각적인 격발이 작은 돼지의 두개골을 터트렸다. 피와 살이 대각선으로 튀었다. 몸뚱이는 해머로 얻어맞은 것처럼 나뒹굴었다. 슬러그 탄의 무거운 중량 때문이었다.
나머지 한 발은 끝끝내 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살아서 도망친 것은 세 마리.
장전을 마친 스티브가 총을 어깨에 얹고 겨울과 경련하는 돼지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보는 건 역시 많이 다른 느낌이군.”
겨울이 마지막으로 노렸던 사선을 눈으로 쫓으며 내놓는 소감이었다.
즉석에서 피를 뺀 돼지들은 썰매처럼 생긴 카트에 차곡차곡 겹쳐서 실어놓았다. 끈을 허리에 묶어 끌고 다니는 방식이었다.
“이거야 원, 벌써부터 한 번 돌아갔다 와야겠는걸.”
“바쁠 것 없잖습니까. 천천히 다녀오죠.”
“어미 쪽은 기부하라고 맡기는 게 좋겠어.”
“기부요?”
“사냥을 해서 다 먹는 건 아니니까. 버릴 거면 차라리 기부하는 게 나아.”
“그런 서비스도 있는 모양이군요.”
“방역전쟁기에 생긴 자선단체의 일종이라던데. 기부 받은 사냥감들을 모아다 구호식량으로 가공한다고. 전쟁은 끝났어도 배고픈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세상이잖나. 비용 면에선 효율적이지 못하지만, 애초에 비용 생각하면서 사냥을 하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즐거움과 만족감이지.”
그가 설명했다. 가족한테 자랑하는 건 기부할 때 받는 모형으로 충분하다고, 기부자에겐 기부하는 동물의 모형을 준다는 모양이다.
카트를 질질 끌면서 돌아가는 길에, 스티브는 맥락 없이 입을 열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고 해. 그 왜, 유명한 재즈 가수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 개인은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반쪽을 찾고 그 사람의 반쪽이 되어주는 데엔 영 서툴렀던 거지.”
“…….”
“나는 그게 그 사람이 힘들고 불우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보네……. 이쯤에서 잠깐 쉬었다가 갈까?”
“예.”
쓰러진 나무 위로 먼저 앉은 스티브가 겨울에게 손짓했다. 겨울이 옆에 나란히 앉자, 그는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이어서 말해보자면, 과거가 불행했던 사람은 아무래도 행복의 기준치가 낮아지기 마련이거든. 삶이 힘겨운 사람일수록 당장 작은 행복이라도 누리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야. 그것조차도 간절한 거지. 간절한 만큼 크게 느껴지고, 그래서 그 작은 행복을 주는 사람에게 쉽게 사랑을 품고 말아…….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압니다. 많이 봐왔으니까요.”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SALHAE의 이름이었다. 한때 겨울의 사후를 엿보던 바깥세상의 관객들 또한 같은 부류에 속했다. 그저 하루를 견디기 위해 딱 그 정도의 즐거움을, 즉각적인 형태의 행복을 갈구하던 이들.
“하기야, 자넨 군인이었지. 자주 볼 수밖에 없었겠군.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만큼 삶이 고단한 이들도 드문 법이니.”
“제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의심스럽기는 하네.”
스티브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