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85)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 (12)
앤이 결혼을 발표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던 것은, 친분이 두터운 기자들과 사전에 조율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기보도가 정확하고 상세할수록 저급한 유언비어가 나돌 확률이 줄어든다. 겨울의 유명세를 감안할 때, 평생에 한 번 뿐일 중요한 행사를 얼룩진 기억으로 남기지 않으려면 불가피했던 준비라고 봐야 한다. 우연이 사람을 돕고자 한들 그 사람이 스스로를 먼저 돕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겨울은 길버트 마르티노, 헬렌 타미리스, 데지레 런던, 조던 크룩 등 과거 명백한 해방 전선 종군기자단이었던 이들에게 반가운 연락을 돌렸다.
「드디어 엠바고가 풀렸군요. 일단 온라인 기사부터 띄우고, 오늘자 석간에 바로 내보내겠습니다.」
처음은 부재중이어서 두 번째에 연결된 마르티노의 말이었다.
“엠바고라…….”
겨울이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표현하니 되게 거창한 사건처럼 느껴지는군요.”
「흔한 셀럽의 결혼도 큰 화제가 되곤 하는데, 당신의 결혼이면 거창한 사건이 맞지요.」
“기사를 담백하게 잘 써주셨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그렇고. 서로 조금씩 다른 정보를 담은 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죠?”
기자들은 겨울이 사전에 기사를 읽어볼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마르티노가 겨울의 통찰을 긍정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일부러 더 찾아볼 테니까요. 대중의 호기심은 원래 한 번에 채워주면 안 됩니다. 본인에게 관심 깊은 소식일수록, 얼마나 알려주든 그 이상을 알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거든요. 기자로서의 양심을 파는 이들이 바로 그 욕구를 파고들죠. 그런즉 다양한 정보를 직접 찾아보았다, 라는 만족감을 얻을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 유익합니다. 그 만족감은 개인이 체감하는 정보의 신뢰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다들 여전히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겨울의 말에 마르티노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이번 일을 저한테만 귀띔해주셨으면 고민깨나 했을 겁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들이라지만, 이런 특종은 친구고 뭐고 독점하고 싶어지는 게 기자의 본능이니 말입니다.」
“하하.”
「인터뷰 약속하신 거 잊지 마십시오. 첫 타자는 접니다.」
“기억하고 있어요. 살살 해주시길 바랄 뿐이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선처하겠습니다.」
겨울도 그렇지만, 앤은 더더욱 명백한 공인이었다. 한 번쯤은 인터뷰를 해놔야 언론의 지분거림이 줄어들 터. 기왕 할 거라면 이 또한 친한 이들에게 맡기는 쪽이 낫다.
마르티노가 물었다.
「깁슨 부국장께선 잠시 업무에 복귀하셨던데, 독신자로서의 자유를 만끽할 마지막 기회를 어디서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80일을 연달아 쉬는 겨울과 달리, 직무상 휴가를 끊어서 쓸 수밖에 없었던 앤은 마르티노의 말대로 잠시 자신의 사무실에 복귀한 상태였다.
그래봐야 바깥세상에서는 매일매일 함께 있긴 하지만.
겨울이 반쯤 장난으로 대꾸했다.
“그것도 기사로 쓰시려고요?”
「이런. 들켰군요.」
“어휴, 좀 봐주세요.”
「목소리를 들으니 하나는 알겠군요. 예비신랑이 결혼을 앞두고 제법 들떠있다는 것.」
겨울의 가벼운 엄살이 기자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지금은 정말 뭘 하고 계십니까?」
“지인들을 만나면서 RSVP 카드를 돌리는 중이에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겐 어쩔 수 없이 우편으로 보내더라도, 비교적 가까이 머무는 이들은 가급적 만나보는 게 예의겠죠. 돌아다니는 김에 여행도 좀 하고.”
RSVP 카드는 청첩장을 말한다. 한국의 청첩장과 다른 점은, 참석하려면 회신이 필수라는 점이었다. 애당초 RSVP라는 두문자 자체가 “회신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문구(Repondez s’il vous plait)를 축약해놓은 것이다.
이 카드는 단순 참석 여부뿐만 아니라, 초대받은 사람이 식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있는가를 묻는다. 경우에 따라선 해당 하객을 위해 특별한 식단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확인하기도 한다. 주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우편으로 부친 카드들은 우정공사의 악명을 고려하여 우선 특급(Priority express)을 이용했다. 이로써 순수한 우편요금만으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이 나갔다.
「만나시는 면면이 아주 화려하겠습니다.」
“뭘 기대하시는 진 알겠는데, 꼭 그렇지도 않아요. 여기는 뉴어크거든요.”
마르티노가 살짝 당황했다.
「……제가 아는 뉴어크가 맞습니까? 그 뉴욕 시 광역권의?」
“네. 처가에서 비교적 가깝기도 하고.”
「그 험한 동네에 거주하는 지인이라면 그럴듯한 거물보다는 참전용사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뉴어크는 이런 말이 바로 나올 만큼 치안이 좋지 않은 도시였다. 앞서 필라델피아 차이나타운 소요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캠든이 필라델피아 광역권의 그림자라면, 뉴어크는 뉴욕 광역권의 그림자쯤 되었다. 무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고이는 응달.
그래도 종말이 다가오던 시절 주민들이 결성한 자경단이 많아진 터라 과거에 비해 오히려 더 질서가 잡힌 측면이 존재했다.
“몇 사람 거쳐 전해 듣기로 이 동네에 자기 가게를 열었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뉴욕 근교에서 보기로 한 지인이 하나 더 있어서 와봤네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엑셀의 경매가 뉴욕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녀석에 관해서는 특별한 소식이 없으셨는지요? 그 큰돈을 선뜻 낸 낙찰자가 누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아서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엑셀의 최종 낙찰가는 무려 천칠백만 달러나 되었다. 그러나 겨울이 일찍이 예견했듯이, 낙찰자의 신원에 대해선 철저한 비밀유지가 이루어졌다. 겨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구입한 거라면 언젠간 알려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알려지는 것보다는 파장이 적을 터이므로.
“유감스럽게도 기삿거리가 될 만 한 건 딱히.”
겨울의 말에 마르티노는 멋쩍은 웃음을 곁들여 자책했다.
「이런. 제가 또 취재를 하고 있었군요.」
“직업병으로 이해해드려야죠.”
「하하……. 송구합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엑셀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마르티노가 다음을 기약했다.
「용건은 대충 끝났으니…….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예식장에서 뵙거나.」
“그래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간만에 목소리를 들어서 반가웠습니다. 전우 분들과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근교에서 보기로 한 지인은 전우가 아니었으나, 겨울은 굳이 기자의 착각을 교정해주지 않았다. 사적인 친분과 별개로 번거로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엑셀의 경매에 관해 추가로 보도된 뉴스는 페레이라가 850만 달러를 일시에 기부했다는 소식이 유일했다. 이를 비난을 피하려는 수작질이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어쨌든 선행은 선행이었기에 전체적인 비난의 강도는 한층 수그러들었다. 겨울에게 위로를 받았어도 그런 반응들을 못내 신경 쓰고 있었을 페레이라에겐 잘 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겨울이 걷는 길가엔 No Chinese라는 스티커가 줄줄이 붙어있었다. 단속반이 뜯고 뜯고 또 뜯어낸 흔적들 위로 새롭게 붙여놓은 것들이 이 도시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겨울은, 가게의 간판을 보고 짧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낯익은 얼굴이 촌스러울 만큼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진 간판엔 「서전트 초코 볼의 무시무시한 바나나 쉐이크」라는 상호명이 쓰여 있었다. 미리 듣지 못한바 아니나 직접 보니 헛웃음이 절로 배어나온다.
안을 들여다보던 겨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업원 하나가 종소리에 반응했다.
“어서 오세요-!”
겨울은 점퍼에 손을 넣은 채로 줄을 서서 옛 전우를 지켜보았다. 지난날 캠프 로버츠의 에이블 중대 소속이었을 때만 해도 병장이었던 매튜 코헨은, 이제 예비역 중사로서 손님들에게 음식과 미소를 파는 자영업자가 되어있었다.
마침내 겨울의 차례가 돌아왔다.
“젊은 형씨. 뭘로 드릴까요?”
겨울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이상히 여길 즈음 짙고 큰 선글라스를 벗었다.
“오?”
눈과 입술을 동그랗게 만드는 코헨. 겨울이 손을 흔들었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죠? 그동안 잘 지냈어요?”
굳어있던 코헨이 발을 모으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우렁차게 경례했다.
“Sir!”
무슨 일인가 하고 훔쳐보던 종업원이 굳고, 그 연쇄반응이 손님들에게로 이어졌다. 가게 안은 짧은 시간 혼돈과 환호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울은 코헨과 재회의 반가움을 나누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포옹을 거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운 코헨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다.
“세상에! 당신께서 여긴 어쩐 일로!”
“친구를 보러 오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뭐, 오늘은 볼일이 있는 게 맞지만.”
“볼일이라면……?”
“이거요.”
“읭.”
겨울이 건네주는 엽서 봉투를 받고 갸우뚱했던 코헨은, 곧 카드를 꺼내 확인하곤 놀라움에 의한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한참 뜻 모를 고함을 지르고서야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결혼! 결혼을 하신다고요!”
이번엔 종업원과 손님들이 비명을 지를 차례였다. 멋모르고 새롭게 들어온 손님 하나는 실내의 광란을 보곤 기겁을 해서 돌아나가기도 했다. 곤란한 미소를 물고 미간을 좁히고 있던 겨울은,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간신히 끄덕여주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세상에!”
“놀랐어요?”
“그럼 안 놀라겠습니까? 어쩐지 연락도 없이 오시더라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여기저기서 스마트 폰의 플래시가 터졌다.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는 손님들의 모습. 코헨은 코헨대로 계속 난리를 피웠다. 친해 보이는 단골들에게 “이봐, 친구들! 내가 뭐랬어! 한겨울 대령하고 같이 싸운 사이라고 했잖아! 그때는 잘 안 믿었지?”라고 뻐겨대면서. 이들 사이에선 속사포 같은 슬랭(속어)이 오고갔다.
“근데 이거 제가 참석해도 되는 겁니까?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오는 자리일 텐데.”
뒤늦은 코헨의 물음에 겨울이 슬쩍 인상을 썼다.
“오히려 불참하면 섭섭하겠죠. 안 오기만 해봐요.”
“크하핫. 간만에 다른 전우들도 볼 기회로군요.”
유쾌하게 웃은 코헨이 메뉴를 권했다.
“기왕 오셨으니 뭐라도 주문하시죠! 최선을 다해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추천해줄만 한 거 있어요?”
“왜 없겠습니까! 우선은 여기 이 그럼블 사이즈 슈퍼 스테이크 샌드위치에-”
“……그럼블 사이즈?”
“니미 X할(Mother fuxxing) 사이즈의 바나나 쉐이크를 곁들이면 좋습니다!”
“하하……. 그럼 그걸로 둘.”
“Yes sir.”
권하는 대로 주문을 하긴 했지만, 빵의 크기를 보면 하나로도 둘이 먹기에 부족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쉐이크 역시 마찬가지. 세심하게 만드는 손길을 지켜보던 겨울이 물었다.
“어쩌다 여기에 가게를 열게 됐어요? 난 당신이 캘리포니아에 있을 줄 알았거든요.”
“이쪽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말입니다.”
“아하.”
잠시 후 포장된 음식을 받은 겨울은, 식사를 하며 그와 짧은 담소를 나눈 뒤 사진과 사인을 남기고서 점포를 나섰다. 반가움에 비하면 짧은 만남이었지만, 영업 중인 점포에 오래 머물기도 곤란할 노릇. 어차피 조만간 결혼식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겨울은 렌트한 차를 타고 다음 약속 장소로 향했다.
다음 지인이 겨울을 초대한 장소는 교외에 위치한 별장이었다. 주유림과 호수에 면해있어 불어오는 바람이 맑고, 주변엔 민가가 뜸하여 한적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차에서 내리는 겨울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점잖고 정중하게 안내하는 고용인은 전형적인 집사의 차림새였다. 무기를 휴대한 것으로 보아 경호원 역할을 겸하는 듯하다. 이외에 몇 명의 다른 경호원들이 눈에 띄었다.
‘안전에 민감할 사람이지.’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던 별장 주인이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겨울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 길을 와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은인.”
고개를 든 주웨이는 핏기 없는 얼굴에 죄스러운 표정을 띄웠다.
“몸이 좋지 않아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건방지다 여기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그런 염려 놓으시고, 일단 앉으세요. 정말로 힘들어 보이시네요.”
농담이 아니라 제 자리에서 서있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듯하다. 한 번 더 고개 숙여 겨울에게 양해를 구한 그녀는 자리에 느리게 앉아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봄이 무르익는 시기, 실내에서 케이프를 두르고도 조금은 쌀쌀함을 느끼는 기색이다.
맞은편에 겨울이 앉자 주웨이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용건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제게 주실 것이 있으시지요?”
전화로 먼저 알려준 일이기도 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진 않을 것이기에, 겨울은 품에서 청첩장을 꺼내어 테이블 위로 밀어놓았다.
집사로부터 페이퍼 나이프를 받아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투를 개봉한 주웨이는, 별 내용 없는 청첩장을 꼭꼭 씹어 삼키듯 찬찬히 읽어 내린 끝에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다시금 사과하는 그녀. 겨울은 주웨이가 눈물을 닦아내는 것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청첩장을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토록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건만, 다른 누구보다 제게 먼저 소식을 전해주셨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진실로 분에 넘치는 배려였습니다.”
잔혹하게 느껴지더라도 직접 알려주는 게 예의라 생각한 겨울이었다. 다른 경로로 알게 되는 것이 도리어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겠는가 하고.
“오늘 이렇게 은인을 초대한 것은, 결혼을 축하드리는 의미로 미리 작은 선물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사람으로서 염치를 따지자면 응당 혼례에 참석하여 은인의 앞날을 웃으며 축복해드려야 하겠으나,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심신으로는 그리 하기가 힘들 듯 하여…….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조차 힘겨운지라 별 수 없이 이곳으로 은인을 모셨습니다. 부디 너른 아량으로 양해해주시길.”
“음…….”
겨울은 그녀가 뉴욕 근교에 있는 이유와 선물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주웨이가 준비한 선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선 이것부터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손짓에, 집사가 겨울에게도 눈에 익은 보관함을 내어왔다. 크레이머가 겨울에게 돌려준 것 말고, 소유자를 알 수 없었던 나머지 하나의 기념주화였다.
집사는 테이블 위에서 보관함을 열어보였다. 인증서가 첨부된 금화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걸 당신이 가지고 있었군요. 선물로 받기엔 지나칩니다.”
겨울이 곤혹감을 드러내니 주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저 제 마음을 정리하려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담겨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한낱 외물(外物)에 의지하여 이루지 못할 연정을 달래 왔던 것이니……. 저를 돕는다 생각하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은인 외에 달리 누가 있어 이 미련을 거두어 가겠습니까.”
“…….”
겨울은 뜸을 들인 끝에 짧은 한숨을 붙여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하나의 선물은,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여기 로빈슨에게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로빈슨은 집사의 성씨인 모양이다. 겨울과 시선이 마주친 집사가 말없이 목례했다.
주웨이가 부드럽게 청했다.
“용건은 이걸로 끝입니다만, 바쁘지만 않으시다면, 그리고 저를 대하기가 불편하지만 않으시다면 이곳에서 반나절쯤 쉬다가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향 깊은 차와 맛 좋은 다과를 준비시켜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이어진 대화는 대단할 것 없이 소소하기만 한 잡담들이었다. 스스로의 말처럼, 주웨이는 남은 마음을 정리하고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 같았다.
그러한 노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겨울은 떠나는 순간까지 입 밖으로 내는 모든 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