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487)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 (14)
케이크를 자를 때가 되자 사람들이 신랑과 신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케이크에 칼을 대기 전, 가장 아랫단에 깔린 부적을 뽑기 위함이었다. 부적에 리본을 엮어 밖에서부터 잡아당기는 방식. 이는 본디 남부의 전통(Cake pull)이었으나, 그럴 듯한 사진을 건지고 싶어 하는 정계의 하객들을 위해 준비했다. 오로지 신문 1면에 나갈 사진 한 장을 얻고자 참석한 인사들도 많은 것이다.
케이크는 최하단의 직경이 20인치에 달했으되 500인분의 부적을 깔아놓기엔 아무래도 부족했다. 그래서 고안한 대안이 부적을 넣은 컵케이크들을 쟁반에 따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 번에 둘러설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신랑 신부와 동시에 뽑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맛의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자, 다들 준비 되셨나요?”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앤이 자기 몫의 리본을 잡고 밝은 목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셋, 둘, 하나! 당기세요!”
부적들이 케이크 밖으로 끌려나왔다. 겨울의 것은 생크림이 많이 묻어있어 곧바로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다. 나란히 서있던 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난 별이에요. 당신은 어떤 게 나왔어요?”
“닦아봐야 알겠는데요.”
티슈를 찾는 겨울을 보고, 앤은 그럴 필요 없다며 성큼 다가섰다. 그리곤 허리를 굽히더니-
“얌!”
겨울이 늘어뜨리고 있던 부적을 낼름 물어버렸다. 리본을 놓으려고 하자 음음음음! 하며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까딱거린다. 그대로 잡고 있으라는 요구다. 폭 들어간 보조개,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시선과 곱게 휘어진 눈매로부터 생크림보다 진한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크림을 삼키는지 꼴깍 하고 침 넘기는 소리. 겨울은 저도 모르게 맛있겠다고 생각했다. 앤의 입속이라 더 달콤하지 않을지.
“으음…….”
혀끝으로 부적을 더듬던 앤의 표정이 한결 더 상냥해졌다.
“당신도 별이네요.”
봄이 조율했을 작은 우연이다.
마침내 다시 밖으로 나온 부적은 앤의 말대로 앙증맞은 별의 형상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별이 실내의 조명을 받아 흔들흔들 별빛처럼 반짝였다. 여기에 옛 종군기자단이 터트리는 플래시의 빛이 더해졌다.
하객 중 한 사람이자 정식으로 초청받은 기자로서, 헬렌 타미리스가 마이크를 들이댔다.
“두 분! 뭔가 간절하게 바라시는 소원이라도 있으신가요?”
별이 의미하는 바는 소원의 성취. 신혼부부가 나란히 별을 뽑았으니 당연히 나올 법한 질문이었다. 짧게 시선을 교환한 겨울과 앤이 짠 것처럼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 사람과 영원토록 함께하는 거요.”
이중창을 듣고 멈칫했던 헬렌은, 곧 괴로운 표정으로 하객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여러분! 이 커플 뭔가 짜증나지 않아요?”
하객들은 박수를 치며 좋다고 웃어댔다.
각자 뽑은 부적을 들고 여러 하객들과 추억이 될 사진들을 찍은 뒤, 겨울과 앤은 손가락으로 케이크의 크림을 찍어 서로의 볼에 조금씩 발라주었다. 그리고 작은 조각을 서로에게 손수 먹여주었다. 전통을 있는 그대로 지키자면 케이크를 썰어 서로의 얼굴에 사정없이 뭉개줘야 할 테지만, 겨울도 앤도 그건 좀 과하다고 생각했다. 각자 볼을 핥아주는 두 사람을 향해 또 한 차례 즐거운 야유가 쏟아졌다.
앤이 잠시 들어가 신부화장을 고치는 사이, 겨울은 원하는 사람들에게 케이크를 잘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앤이 소망했던 대로 겉은 하얗고 속은 까만 초콜릿 케이크였다. 날이 무딘데도 슥 누르면 포옥 들어가 버리는 칼이 케이크의 촉촉함과 부드러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크림에 덮여있던 카카오 향이 범람하듯 쏟아져 나온다.
평범하게 줄을 서서 케이크를 받아가는 사람 가운데엔 정치적인 거물들이 많았다. 면면은 다양했으되 누구도 특별대우를 요구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으로서든 타산적인 계산으로서든.
겨울은 존경 받는 전직 대통령 부부의 접시에 차례로 케이크 조각을 올려주었다.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의 인사에 맥밀런은 시침을 떼듯 고개를 저었다.
“은퇴한 중늙은이가 바쁠 일이 뭐 있겠나.”
당연히 바쁠 것이다. 크레이머 행정부가 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와중에, 반대당파가 그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뿌리가 맥밀런 전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겸양이 지나치시네요.”
“거만하게 구는 것보다야 도움이 되지.”
현직에 있을 때보다 많이 늙은 전직 대통령은 다양한 감회를 담아 겨울을 바라보았다.
“귀관 한 사람에게 주는 부담이 너무 무거워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지던 게 바로 엊그제 같건만, 방역전쟁의 영웅이자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자네가 지금 이렇게 행복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 새삼스레 놀라게 되는군.”
“각하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입니다.”
“같은 말을 자네에게도 돌려주지.”
겨울이 미소 지었다.
“하기야 각하와 저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나마 같은 전쟁을 치른 사이니까요.”
“어허. 듣기 좋군. 빈말이 아니라고 믿겠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은 뼈 있는 덕담을 해주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남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는 법. 있다고 해도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야. 귀관을 포함하여, 그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을 필요악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요구했던 내가 떳떳하게 할 소린 아니겠지만.”
“…….”
“그러니 진정으로 행복해지게나. 귀관에겐 그럴 자격이 있어. 어느 누구보다 행복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어주게.”
“알겠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행복하게 해줘야 할 사람은 당연히 아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맥밀런은 느긋한 표정으로 농담을 했다,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걸 잊고 살아서 요즘 여러모로 후환을 겪는 중이라네.”
“이이가 정말.”
부인이 남편의 뱃살을 콱 꼬집었다. 어이쿠. 겨울은 맥밀런의 엄살에 웃음 지었다. 전직 대통령이고 뭐고 아내 앞에선 그저 한 사람의 남편일 뿐인 것이다. 배가 나오면 살 빼라고 구박을 받기도 하는. 겨울이 기분 좋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훗날 만에 하나라도 원망을 받는 일이 없도록 아내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되겠습니다.”
“그래.”
대화 도중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면, 그 중심엔 크레이머 대통령이 있었다. 맥밀런과 시선이 마주치자 까딱 목례를 보내온다. 맥밀런 또한 적당한 미소를 머금고 같은 목례를 보내주었다.
“지금의 미국은 더없이 영광스럽게 빛나고 있지만, 따르는 그림자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어지고 있어.”
그가 회수하는 눈길이 잠시 겨울의 손목에 걸린 별 모양 액세서리를 스친다.
“난 귀관이 그 어두운 자리에 뜰 별이라고 믿네. 지난날 그랬듯이 말이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 같은 날 부담을 줘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저와 앤이 함께 바라는 바니까요.”
“부부가 이런 부분에서까지 사이가 좋은가.”
“제 가장 깊은 곳까지 알고, 또 이해해주는 사람입니다. 같은 꿈을 꾸고 있죠.”
맥밀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악수를 나누고 떠나가며, 선물로 버번 한 병을 가져다두었다고 귀띔해주었다. 집 앞에 묻어두었다가 뜻깊은 날 꺼내어 마시는 것이 고향의 풍습이라면서. 겨울은 결혼 1주년에 웨딩 케이크에 곁들여 마시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케이크 분배가 끝난 뒤, 몇몇 하객들에겐 겨울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도 했다. 우메하라 아츠 해장보(海?補)도 그 중 하나였다. 해장보는 준장 내지 소장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과거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활동하던 때보다 많이 높아진 셈이었다. 고작 두 단계 차이일지라도, 영관급과 장성급의 간극은 굉장히 큰 것이다.
우메하라 해장보는 겨울을 향해 쓴웃음을 내보였다. 나눌 말이 많지 않은데도 일부러 긴 시간을 머물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려해줘서 고맙습니다, 대령.”
“전우 사이에 배려는요.”
“전우……입니까.”
쓴웃음이 짙어진다. 겨울은 그에게 말을 편하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말은 편해져도 마음은 불편해질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몰락한 나라의 장교가 겪는 고충을 왜 모르겠는가. 이쪽에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독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홋카이도 개척단에 들어가셨다고요.”
“예. 그게 축하받을 일일지는 의문입니다만…….”
장정 9호 격침의 공로로 미 의회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그는, 일본 망명정부로부터 중용과 견제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명예는 높여주되 실권을 제한하거나, 영웅으로 대우해주면서 실패할 확률이 높은 위험한 임무를 맡기거나 하는 등.
“우메하라 제독께선 닻을 뽑으셨네요.”
“아, 이거요.”
겨울이 손목에 매달린 액세서리를 가리키자, 우메하라 해장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재미로 치는 점이라도 공교롭기는 하더군요. 바닷사람에게 닻이라니.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죽으라는 뜻인가 봅니다.”
무겁게 말하는 죽음은 아니었으되 마음에 없는 가벼운 농담도 아니었다.
겨울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닻은 정착을 뜻하기도 하죠.”
정확하게 말하면 웨딩 케이크에서 뽑는 닻은 모험을 의미하는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루어지는 정착을 뜻하지만, 거기까지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꼭 성공하실 겁니다. 제독께서 성공하시면 다른 나라 사람들도 큰 희망을 얻겠죠.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뜻깊은 한 걸음이 될 거라 믿습니다.”
우메하라 아츠 해장보는 사람의 역사에 남을 사람의 이름이었다. 봄빛 우연의 마중물로 끌어올려질 자격이 충분한 사람의 노력인 것이다.
“이걸 드리죠. 제독의 소원이 성취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겨울은 자신이 뽑았던 별을 풀어 해장보에게 건네주었다. 우메하라 해장보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 오늘을 기념하는 물건인데, 이걸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아내 분께서 기분 상하진 않으실까 염려됩니다.”
“괜찮아요. 앤은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겨울이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앤과 저는 부부니까요. 앤의 별이 제 별이기도 하니, 부부 사이에 별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죠. 받으세요.”
우메하라가 머뭇거리며 겨울의 별을 받아들였다. 헬렌 타미리스는 이 장면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차례차례 담소를 나누다가 태너 롱을 발견한 겨울이 밝은 인사를 건네었다.
“Alpha_team_1147님도 오셨군요.”
롱 중령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멀어졌다. 마리 패터슨의 채널을 구독할 그린베레 알파 팀이 달리 누가 있겠는가, 싶어 반쯤 넘겨짚었는데 정확하게 맞춰버린 모양. 어느덧 돌아와 있던 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이후 만찬을 마친 뒤 시작된 파티에서, 겨울과 앤은 오늘의 주인공으로서 누구보다 먼저 춤을 춰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알죠? 연습한 대로.”
앤이 향기롭게 속삭이는 말. 겨울은 웃으며 그녀의 귓불 아래에 입 맞췄다. 하객들을 즐겁게 해줘야 할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감미로운 발라드에 맞춰 평범하게 우아한 춤을 추었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손을 마주잡고 리듬에 맞게 원을 그리며 걸음을 옮긴다. 앤이 겨울에게 몸을 맡긴 채로 함께 기울어졌다가 일어서거나, 겨울이 앤의 허리를 받쳐 들고서 치맛자락이 물결처럼 펼쳐지도록 몇 바퀴 빙그르르 돌아서 내려주기도 했다.
어떤 동작에서도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해 두는 것이 다정함을 표현하는 핵심이었다.
시계 방향으로,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는 관성을 담아 서로를 풀어주었다가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앤이 팔을 교차시키며 겨울에게 폭 안기는 부분은 하객들의 짧은 박수를 받았다.
첫 번째 춤을 끝낸 앤은 겨울의 손을 잡고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보냈다. 한쪽 발을 뒤로 빼며 치마를 붙잡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녀.
그러던 중에 음악이 바뀌었다. 이제까지 흐르던 발라드와는 완전히 다른, 어느 유명한 첩보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새로운 춤을 앞두고 겨울과 앤이 선글라스를 끼자 하객들이 웃음을 섞어 환호했다.
두 번째 춤은 빠른 박자에 무언의 상황극을 섞어 넣은 것이었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수사관이 턱시도를 입은 첩보원을 구속했다. 수사관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첩보원의 목을 슥 훑어 올렸다. 그러다가는 자신에게로 멱살을 쥐듯 확 끌어당겨, 바싹 붙은 채로 다리를 얽으며 고혹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잠시 후엔 관계가 역전되었다. 수사관은 보이지 않는 수갑에 묶여 첩보원이 움직이는 대로 끌려 다녔다. 짐짓 분한 듯한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분함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음악이 끝난 뒤, 겨울은 앤과 더불어 다시금 하객들을 향해 인사를 보냈다.
앤과 스티브, 겨울과 수잔이 차례로 춤을 춘 다음에는 하객들도 한 사람씩 파트너를 찾아 차례로 흥겨운 음악에 몸을 맡겼다.
부케와 가터 링 던지기는 이렇듯 흥을 잔뜩 끌어올린 다음의 일이었다.
“자, 갑니다! 정말로 가요!”
앤이 들뜬 목소리로 외치며 던질 듯 말 듯 간을 보자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 원망 섞인 웃음이 흐른다. 이윽고.
“이얍!” 휙 던져지는 부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꽃다발은 미리부터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던 예비신부의 손에 붙잡혔다.
“제프리! 내가 잡았어요!”
평소에 보이던 침착한 모습과 달리 팔을 크게 흔들며 있는 힘껏 기뻐하는 캐슬린 헤이랜드 보안관. 제프리 또한 주먹을 불끈 쥐며 두 팔을 번쩍 들고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 지른다. 주변 사람들이 예비부부를 향해 응원과 축복을 쏟아냈다.
이번엔 카터 링을 던질 차례. 겨울은 의자에 앉은 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앤은 아까부터 줄곧 겨우 참는 웃음을 물고 있었다. 이 상황이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겨울은 그녀의 드레스 안쪽으로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링을 찾아 더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볼이 상기된 앤은 입을 가리고 계속해서 키득거렸다.
곧 가터 링을 찾아낸 겨울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끌어냈다.
자리에서 일어선 겨울이 우르를 몰려온 남자들을 향해 가터를 들어보였다.
“던집니다!”
“어서!”
몸이 단 누군가의 외침이 왁자한 폭소를 끌어냈다.
그대로 돌아선 겨울이 던진 가터는, 아우성치는 이들의 안타까운 헛손질에 퉁겨져 엉뚱한 구경꾼에게로 날아들었다. 날아오는 걸 얼결에 받아낸 유라가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시선들 앞에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더듬는다.
“엥? 나? 내가? 왜? 뭐예요 이거?”
겨울이 농담을 건넸다.
“뭐긴 뭐예요. 대위가 가까운 시일 내로 신부를 맞아야 한다는 뜻이죠.”
“네?!”
기겁을 하는 유라의 모습이 모두를 폭소하게 만들었다.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행사를 마친 뒤, 겨울과 앤은 기분 좋은 피로감 속에서 호텔 최상층의 조용한 방에 들어섰다. 지금 느끼는 피로는 육체적인 고단함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진이 빠진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서로만 보면 불가항력으로 웃음이 새는 두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수도 없이 웃어 볼이 아플 지경인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방 한쪽에서 커다란 거울을 발견한 앤이 겨울의 손을 잡고 그 앞으로 이끌었다.
“이리로 와 봐요. 어서요.”
겨울은 아내의 손길에 순순히 끌려갔다.
이윽고 거울 앞에 나란히 서게 되자, 앤은 겨울의 팔짱을 끼고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나도 굉장히 행복해보이네요.”
“그러게요.”
겨울도 동의했다. 정말로 행복에 겨워 보이는 한 쌍이었다. 부부로서 서있는 모습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전과는 감흥이 다를 수밖에.
“흠흠.”
목을 가다듬은 앤이 거울 속의 겨울을 향해 말을 걸었다.
“보이세요?”
그녀는 한없는 상냥함으로 반복했다.
“보이세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
겨울도 거기에 어울려, 거울 속 앤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
팔짱을 낀 팔이 한층 더 꼬옥 죄어온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앤의 눈가에 떨리는 눈물 한 방울이 맺혀있었다. 겨울 역시 미소를 머금고서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깍지를 끼고 서로의 이마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따스한 충만함이 차올랐다. 감각의 장벽을 넘는 단 하나의 감정이었다.
어느 시구처럼 따뜻한 계절로 녹아내린 겨울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5월의 신부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입 맞추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겨울과 앤은 나누지 못할 하나로서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후일담 – 앤의 위시리스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