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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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로딩 페이지 설명
접속자가 시간가속 기능을 사용하거나 퀘스트 진행에 따라 시간상의 단락이 발생할 경우 상황연산을 위한 로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로딩 화면에서는 관제 AI 또는 제작진이 접속자에게 남긴 조언이나 게임 시스템에 대한 설명, 상황이해를 돕는 단서, DLC 및 부가상품 광고 등 다양한 정보가 제공됩니다. 이를 「종말 이후」에서는 인터미션(Intermission)이라 합니다.
#Intermission, 저널과 시간가속
저널은 접속자의 진행상황과 배경을 기록하고 전달해주는 매체입니다. 접속자는 「감각동기화」를 통해 저널의 주요내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시간가속 기능을 사용했을 경우에도 그 사이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이 저널로서 기록되며, 때로는 접속자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전달하고, 간과하고 지나간 중요한 정보를 다시 보여주기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저널은 기록이기 때문에 다시 보기가 가능합니다. 관련된 상황에서 실시간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 이는 접속자의 역량에 따라 질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게임 내 모든 요소는 접속자의 역량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자동진행을 위한 시간가속은 세계관 내 시간이 실제시간과 동일하게 흐르는 풀 스케일 가상현실 세계관에서 게임 진행을 위해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만약 시간가속에 의한 자동진행 내용 중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최초 1회 한정으로 해당 시점에서 게임을 재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수동진행으로 시작되며, 일정 시간 동안 시간가속 기능이 비활성화 됩니다. 따라서 본래의 결과보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시간가속을 이용할 때 저널기록을 담당하는 가상인격은 전회차에 수집된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을 학습합니다. 따라서 가상인격은 「종말 이후」를 경험한 회수가 늘어날수록 당신을 닮아갑니다. 통상적으로 10회차 이상의 데이터가 누적되었을 때, 가상인격은 당신과 거의 유사한 행동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보다 원활한 진행을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저널, 29페이지, 캠프 로버츠
첫 번째 물자조달 임무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식량과 난방, 방한용품, 그리고 연료를 확보한다는 과제는 충분히 달성했지만, 부상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완전한 성공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미군이 난민 지원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교회로 파견되었던 쪽에서는 지원자들 간에 유혈극이 벌어졌다. 변종을 처치하고서, 물자를 나누는 비율을 두고 싸웠다. 변종을 죽인 사람이 공로를 따지며 모두 가지려 들자, 함께 갔던 다른 사람들이 뒤통수를 칼로 찍어 살해했다고 한다. 높아진 언성을 수상히 여긴 미군이 상처를 직접 확인하면서 이 참극이 드러났다.
캠프로 돌아왔을 때 총기를 밀반입하려던 지원자들도 있었다. 난민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면 미군 입장에선 난동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몸수색을 철저히 했는데, 적발되자 캠프에서 몸을 지켜야 한다며 애걸하는 자들이 많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덕분에 지원자들에 대한 믿음이 더더욱 내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내가 있었던 제분소에선 다수의 미군 병사들이 건물에 매몰되어 다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다. 대들보에 깔려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이 가장 심한 중상자였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미군 병사가 아니라 난민 지원자였다. 병사들은 대개 전치 1개월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사실 난데없이 출현한 열차와 탈선사고를 누구의 잘못으로 돌리긴 어렵겠으나, 그 직후 쏟아져 나온 변종을 상대로 지원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 문제였다.
유일하게 맞서 싸운 나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상승했지만, 지원자들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병사들이 새로운 물자조달 임무 수행을 거부했다.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을 검토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캠프 사령부는 여기에 긍정적이었다.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 병사 중 일부가 나를 경계해야한다고 보고했던 모양이다. 로버트 캡스턴 중위가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피어스 상사가 변호해주었다.
“겁쟁이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중대장. 중요한 건 이 조그만 놈이 끝까지 남아서 싸웠고, 나는 이놈을 믿어도 좋다고 판단했다는 거지요.”
보고가 어떻게 올라갔는지 몰라도, 이후 대대장 결정에 따라 나만 좋다면 나를 지원병으로 취급하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숙소도 미군 구역으로 바꾸어주고, 미군에게 주어질 복장과 장비를 비롯해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총기휴대는 금지되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우대를 받는 셈이었다.
부상자인 엘리엇 상병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었다.
“상부에서도 고민이 많아. 어쩌면 믿음직한 사람을 뽑아 미군에 편입시킬 가능성도 있어. 네가 지원병 취급을 받는 건 그 사전준비가 아닐까 싶은데. 나중엔 정규군이 될지도 모르지. 그럼 이병 기어우르가 되려나? 내 후임으로 들어오라고. 하하.”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상병은 재미있어했다.
“설마는 무슨. 미군만큼 이민자 출신이 많은 군대가 어디에 있다고. 귈레미도 시민권 때문에 입대한 녀석인걸. 미국은 지금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고, 캡스턴 중위님은 나한테도 전시임관 형식으로 장교나 부사관이 되라고 권유하고 있단 말이야. 그럼 당연히 병사가 부족해질 텐데, 다른 곳은 몰라도 고립된 이 캠프에서 병력자원을 어떻게 충당하겠어? 너 정도면 자격이 넘친다고 보는데.”
“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인류 멸망의 위기니까.”
담담하면서도 무거운 대답이었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혼자 쓰도록 배려 받은 텐트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누군가 짐을 뒤진 것이 분명했다. 사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을 가진 건 별로 없었으니 필시 배급표를 노렸을 것이었다. 샌 미구엘에 다녀온 대가로 받은 내 몫의 배급표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았다. 각자 받은 양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도 당연히 내가 더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과를 떠나, 위험을 감수한 대가는 동일해야 한다고.
배급표는 품에 넣고 다녔기에 도난당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되면 안심하고 잘 수 없을 것 같다.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편입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AI 도움말 (통찰 6등급) : 당신은 첫 보급 임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지원병 신분으로의 편입을 제안 받았습니다. 제안을 수락할 경우 추후 미군으로부터 부여받는 임무를 거부하기 어렵게 되어 행동의 자유도가 감소합니다. 임무의 성격에 따라서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각 조직의 포섭시도가 자주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안을 거부할 경우 적대적인 랜덤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며, 「생존감각」을 포함하여 충분한 기술을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신이 살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선택 : 제안을 받아들인다.」
결정을 내렸다. 망설이지 않고 로버트 캡스턴 중위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긴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위는 내 결정을 환영해주고는, 피어스 상사에게 나를 부탁했다. 숙소를 정해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대대장이 난민들을 모아놓고 나를 단상에 세웠다. 용감한 행동에 찬사를 보내며, 미군으로 편입한다는 발표였다.
요란하게 무대를 마련하는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저널, 30페이지, 캠프 로버츠
밤새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관리자 취급으로 텐트를 혼자 쓰다가, 낯선 사람들과 동숙하게 되어 불편한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같은 막사를 쓰는 미군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캠프 로버츠가 훈련 때에나 쓰이던 주방위군 시설이라 상당히 낙후되어있다고 한다. 최신식 막사에서는 보통 1인 1실, 많아도 3인 1실 정도를 쓰는 게 보통이라던가. 각 개인실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다 따로 구비되어있는 게 정상이란다.
그래도 막사가 구형이나마 수용능력에 한참 모자라는 인원이 쓰고 있어 공간이 많이 남았다. 커튼과 파티션을 동원해 임시로 쳐놓은 칸막이들이 인상적이었다. 개인공간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인가 보다.
비공식적이나마 지원병 신분이 되면서 기껏 받은 배급표가 무의미해졌다. 병사들이 디-팩(Dining Facility), 또는 쵸우 홀(Chow Hall)이라 부르는 병영식당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난민들에게 배식되는 것과 차원을 달리했다. 이마저도 미군 병사들 입장에선 맛없다고 불만이 나왔으나, 나는 맛있게 먹었다. 다만 짜고 느끼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치즈 요리가 많았는데, 마을에서 가져온 것 중 치즈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지원병으로서 받은 평시임무는 통상훈련과 한국인 난민구역 순찰이었다. 경찰을 보조하는 역할이다. 미군과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합동으로 치안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생색내기에 불과했고, 아무래도 같은 난민이라면 거부감도 적고 좀 더 세밀한 부분까지 살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믿을만한 사람을 추려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아무래도 엘리엇이 말했던 게 사실인 모양이다.
보급관에게서 복장을 수령했다. 짬을 내어 찾아온 캡스턴 중위로부터 방탄복을 항상 입고 다니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 출신 지원병이 다른 국적의 난민들에게 미움을 사기 십상일거라는 우려에서였다. 방탄복은 방검복과 다르지만, 난민들이 숨기고 있을 짤막한 흉기 따위 얼마든지 방어 가능하다는 말도 함께 해주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다.
물론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커트 대위라는 사람은 내가 전투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다. 대대장 지시로 예비 지원병이 되었다고 했더니 기도 차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그 안의 정신까지 바뀌는 건 아니지. 바나나 새끼가.”
툭 뱉은 말이 꽤나 아팠다. 바나나, 겉은 노랗고 속이 하얀 이 과일은 백인 행세를 하려 드는 동양인을 비하하는 명칭이기도 했다.
본래 미군 내에서 인종차별은 강력한 금기였지만, 시국이 이렇다보니 노골적으로 저렇게 행동해도 항의하는 이가 없었다. 멸망해가는 세상은 사람을 많이 죽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애써 죽였던 많은 것들을 되살려냈다. 좋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본인에게도 손해일 텐데. 유색인종 병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러다가 프래깅(상관 살해)을 당할지 모른다. 생각이 짧다.
난민구역으로 갔더니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일부의 태도가 바뀌어있었다. 아첨하거나 낯설어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경원시하는 사람들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직접 가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당황하는 한편으로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날 더러 매국노란다.
성상납이나 받는 미군에게 알랑거리며 떡고물을 주워 먹더니, 이제는 미군 행세를 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한국인은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는 민족인데 넌 조직에 속하지 않았으니 욕먹어도 싸다고 마구 몰아붙였다. 어린놈이 간사하다고도 했다. 미군에게 가서 고자질이나 하라는데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부외자가 된 것 같았다.
#과거 (2), 거래전야, 고아영
혜성그룹 고건철 회장은 손끝으로 빈 잔을 두드렸다. 술이 아쉽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배신 이후로 술 없이는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같이 피곤하다. 거래를 앞두고 일주일은 술을 멀리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판단 때문이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회장은 무시했다.
“아버님, 저에요.”
하나 뿐인 딸의 목소리. 짜증이 치밀었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날카롭게 외친다.
“안다. 꺼져라.”
“…….”
딸, 고아영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걸 보고 회장은 만지작대던 유리잔을 집어던졌다. 확.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놀란 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넘어간 잔이 한참 뒤에서 깨진다. 쨍그랑. 파편 흩어지는 자잘한 소리가 사람 없는 복도를 채운다. 이를 듣고 고용인들이 청소도구를 들고 나타났다. 이쪽을 힐끗 훔쳐보더니,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있으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회장이 으르렁거렸다.
“내 앞에 나타날 땐 그 좆같은 얼굴 가리라고 했냐, 안했냐.”
“…죄송합니다.”
입술을 깨문 아영이 고개를 숙였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쏟아져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러고도 타고난 미색은, 조명 어두운 방 안에서도 빛을 발했다. 서른이 넘었는데 노화의 기미가 없다. 회장이 이를 씹었다. 여우같은 년. 한 때 그가 사랑했던 여자도 외모가 나이를 따라가지 않았다.
저 얼굴, 빌어먹을 제 어미를 소름끼치도록 닮은 낯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참아준다. 그나마 그 여자, 한 때 아내였던 잡년이 결혼하고 낳은 다섯 새끼 중 실제로 고건철의 피를 이은 유일한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데.”
아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거래를 재고해주시면 안 될까요?”
“왜?”
“…….”
“왜!”
회장이 성을 냈다.
“씨발년아! 아비가 젊은 몸 얻어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데 뭐가 불만이야! 아하, 그렇지. 내가 늙어 죽어야 네가 내 사업을 물려받겠지! 그런 속셈이지!”
“아니에요! 사업 따위 관심도 없다고요!”
“그럼 왜!”
“굳이 다른 사람 몸을 빼앗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버지 유전자로 복제체를 만들어서 이식하면 되는 거잖아요! 왜 법을 어기면서까지 남의 몸에 욕심을 내세요?!”
회장은 그의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하. 뭐야. 상품 관리를 맡겨놨더니……. 왜? 어린 놈 사는 꼴 보다보니 동정심이 들더냐?”
“…….”
맞다. 동정을 품었다. 고건철은 아영에게 상품관리과정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거래대상, 소년은 저도 모르는 사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중이다. 모두 보고 들은 입장에서, 아영은 소년이 처한 상황이 슬프다. 그 착한 아이는 가족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제 몸 팔아 남은 가족들의 삶이 편안하다는 사실에 그저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장이 말했다.
“좆같은 소리 하지 마라. 뭐든 자연산이 좋은 거야! 복제체? 클로닝(Clonning)? 하! 그건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다! 성장촉진제를 투여해서, 태아부터 이식 가능한 나이까지 고작 1년 만에 키워내는 그 몸뚱이가 나중에 무슨 문제가 있을 줄 알아? 암, 자연산이 최고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불법이잖아요? 바르지 않은 일이라고요.”
“바르지 않기는 개뿔이! 그건 법이 글러먹은 거야! 빨갱이들의 사상에 오염된 법이지! 자유주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개인에게는 스스로를 처분할 권리가 있다! 당사자가 동의했고 그 새끼 부모도 동의했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지랄이야! 이제 와서 거래를 철회하면 그 가난뱅이들이 어이구 고맙습니다 할 것 같으냐? 하, 꿈 깨라!”
딸을 비웃는 아버지가 숨을 고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거래가 깨지면 그 가난뱅이들이 받아먹은 걸 악착같이 돌려받을 거다.”
아영은 한층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거래를 취소하면 그 가족은 난처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은 그 소년의 부모들은 이미 계약금으로 받은 금액을 상당부분 써버렸으니까. 차를 벌써 두 대나 샀다. 외제. 남편 따로 아내 따로. 그들이 현재 거주하는 집마저도 계약의 대가로 준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겨울에 태어난 소년에게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꼈다. 부모를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자식의 삶은 온전히 자식의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국 그럴 순 없었지만.
“하나 있는 딸년이 어디 가서 병신 같은 소리로 내 체면까지 깎아먹기를 원치 않으니 하는 말이다만…….”
고건철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독일에서 창녀들과 여성단체들이 성매매를 합법화해달라고 시위를 벌였지. 자유주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온전히 개인에게 속하는 권리라고 말이야. 그렇지. 맞는 말이지. 누구랑 떡을 치는 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니까. 현실적인 이유도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생계 문제였지. 구직능력이 없어 매춘으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에게서 매춘 기회를 박탈하면 굶어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논리였다.”
딸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딸 앞에서 성매매를 말하면서도 아버지는 조금도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모욕하려는 의도였다. 딸에 대한 애증은 곧잘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반면 같은 시절 이 나라의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들은 성매매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여성의 인권과 인간적 존엄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인간을, 여성을 상품화하지 말아라…이런 뜻이었다. 뭐, 좋아. 명분이 옳다는 건 인정해. 그런데 말이지, 당장 매춘을 단속함으로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윤락여성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단 말씀이야. 물론 직업훈련의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 이 나라의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란 게 대개 그렇듯이, 졸속행정이었지만, 여성단체들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결과엔 관심도 없었어. 왜냐고? 그것들은 처음부터 윤락여성들이 아니라 자기들을 존중해달라고 나선 것이었으니까! 그런 일에 종사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해서 성을 낸 것이었으니까! 창녀들이야 죽던지 말던지!”
아영은 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박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과 그게 당연하다는 건 많이 다른 개념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방치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개선을 도모하는 게 맞다. 회장 스스로도 명분은 옳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삶이 곧 하나 뿐인 정답인줄 아는 사람이다. 반박은 역효과만 불러올 따름일지라,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매매에 관해 말하자면, 원래 화려한 소수가 눈에 띄는 법.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언론은 그 소수에게 더 많은 화면과 지면을 할당했다. 사실이 어떻든 시청률이 잘 나오면 그만이니까. 자극적이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하다.
과연, 이어지는 고건철 회장의 말이 그녀의 예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 골빈 년들의 진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몸 파는 여성동지 여러분, 당신들이 뭘 해서 먹고살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몸 파는 건 여성 모두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 그만 두셨으면 좋겠군요. 달리 할 일이 없다고요? 그건 당신들 사정이죠. 굶어 죽겠다고요? 당신들이 게을러서 그래요. 차라리 죽으세요. 여성의 존엄을 훼손하면서까지 살고 싶은가요?”
다혈질의 회장은 벌떡 일어서서, 우스꽝스럽게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가며 비아냥거렸다. 칠십 넘은 나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다. 이런 성격이라 그룹 중진들도 회장에게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한다. 밉보였다간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리니까.
“현실적인 대안 없이 그따위 요구를 하는 건 결국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 애새끼가 불쌍하더냐? 네 알량한 동정심과 양심을 만족시키고 나면, 그 놈은 과연 너에게 고마워할까? 하루하루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면서, 그래도 나는 인간으로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라도 하겠느냔 말이야. 하하!”
“…그만해주세요.”
“그만하긴 뭘 그만해! 네년이 시작한 거다!”
탕. 테이블을 내려치는 손길에 힘이 과했다.
“젊음! 너무나도 볼품없이 흘러간 젊음! 잡년이 훔쳐간 내 삶의 절반! 아비가 그걸 찾겠다는데 시답잖은 개소리로 기분을 잡치게 만들어놓고, 누구 마음대로 그만 둬!”
“잘못했으니까, 그만해주세요.”
결국은 이렇다. 사랑 없이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은 모두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아영은 마음을 지우려 애썼다. 스스로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흥.”
회장이 자리에 주저앉아 턱을 괴었다.
“김이 빠지는군. 한심한 것. 누구를 닮아 이렇게 한심한지 모르겠어. 분명히 내 피도 물려받았을 텐데, 실감이 나질 않아.”
“…….”
“나가. 그동안 맡긴 일은, 내일 상품 상태를 확인하고 최종 평가할 테니.”
“…좋은 밤 되세요.”
“되긴 글렀다.”
휘휘 내젓는 손. 파리를 쫓는 것과 비슷하다. 패배감, 자괴감, 모멸감. 어두운 감정을 느끼며 아영은 아버지의 방을 나선다. 복도를 마주보니 힘이 빠진다. 길고, 넓고, 공허하다. 고작 둘 뿐인 가족이 머물기에 저택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단란하던 한 때, 어머니의 부정을 아버지가 몰랐던 그 시절만큼은 따뜻했던 집이었다.
아영은 흔들거리며 복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