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of another world is well fed RAW novel - Chapter 333
에버그린에 여름이 찾아왔다.
“사장님, 여기 2학기 아카데미 유학생 명단이요.”
“다 합산한 거지?”
“네. 단기 유학생들이 앞이고요, 장기는 여기, 이 페이지부터예요.”
“좀 늘었네? 아웃랜드로도 가는 거지?”
“그럼요. 약초학이나 농학 쪽 유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미리 아웃랜드에 분교를 내길 잘했다 싶네요.”
“그쪽 학과들은 애초에 넓은 부지가 필요하니까.”
“아카데미 교수들한테 연락해서 쓸 만한 놈들은 미리미리 포섭하라고도 좀 전하고.”
“걱정 마세요.”
증축을 거듭한 에버그린 리조트는 문을 연지 벌써 수 년 째이지만 여전히 VIP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서비스면 서비스, 시설이면 시설.
무엇하나 빠질 게 없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리조트에서 한 달만 체류를 하면 서대륙은 물론 동대륙의 온갖 유명인사와 친분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에버그린 리조트에 머무는 가장 유력한 인사는 역시 도미닉, 자신이었다.
“오늘 파티도 참석 안 하실 거예요?”
“안 해. 그럴 기분 아니야.”
“그래도 손님들이 뵙기를 원하세요.”
“안 갈 거라니까. 이따 노영주님이랑 칼론 아저씨네 가서 술이나 마실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네? …혼나실 것 같은데.”
“스읍!”
벌써 성인이 된 라키가 제법 말대꾸를 했지만 도미닉의 말을 듣지 않을 리는 없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건 이게 끝?”
“네. 따로 급한 일 있으면 다시 오겠습니다. 식사하셔야죠?”
“이따가. 지금은 여유를 좀 즐겨야겠어.”
크게 기지개를 핀 도미닉은 스위트룸에서 바로 연결되는 전용 해변으로 나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푸앗!”
시원한 파도와 반짝이는 햇빛.
느리게 유영하는 바닷 속 거북이들까지.
“여기, 맥주 좀 가져다 줘!”
그의 여유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직원들에게 맥주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잠수를 하고 수영을 하며 물에 둥둥 떠다니다가 갈증을 느끼곤 파라솔 아래 누웠는데,
“술을 마셔?”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여, 여보!”
눈을 끔뻑거리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스스로 꼬집는 도미닉.
가벼운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혀를 끌끌 차는 건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아름다운 금발을 높게 틀어 올린 이안은 위엄이 흘러넘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정치며 귀족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보아도 대번에 어린이 영상극 속 멋있는 여왕님이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여긴 어떻게…?”
“그대가 갈 곳이 여기 밖에 더 있나? 루이제는?”
“지금 한창 낮잠 자고 있을 시간이잖아요.”
“좀 있으면 깨겠네. 유모에게 맡겨 두고 술을 마시는 건가?”
이안의 탐탁지 않은 목소리에 도미닉이 입을 삐죽거렸다.
“오랜만에 휴가인데 이 정도도 못 합니까?”
“그냥 물어본 거야.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
“…….”
“식사는?”
“아직이요. 폐하는 드셨습니까?”
“아직이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 아무 것도 안 드셨어요?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
“오랜만에 그대가 직접 해 주는 밥이 먹고 싶은데.”
“말했잖아요, 휴가라고. 그런데 꼭 그렇게 부려먹으셔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도미닉의 말에 이안이 그만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그만 골내고 가지. 내 이리 직접 오지 않았나.”
“…예. 일단 기다려 보세요. 식사부터 하고요. 오랜만에 짬뽕 어때요? 고춧가루 팍 팍 쳐서.”
“좋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가렛과 라키가 동시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해결된 것 같죠?”
“그런 것 같네요. 그럼 바로 수도로 다시 올라가시려나요?”
“아뇨. 폐하께서도 한 이 주 정도는 에버그린에 머무르실 생각을 하고 오셨거든요.”
“그럼 일단 침구 정리부터 해야겠네요. 저… 그런데 시녀장님. 이번에는 두 분, 왜 싸우신 거래요?”
“뭐겠어요?”
“아….”
질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마가렛의 표정에 안 봐도 무슨 일이었는지 짐작을 한 라키가 피식 웃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쪽도요.”
묘한 유대감에 서로를 응원하는 두 사람이었다.
“아니, 결혼한 지 벌써 삼 년도 넘으신 분들이 아직도 저렇게 질투가 심해서야…. 벌써 국서께서 에버그린으로 말도 없이 내려오신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니까요.”
“대신들에게 그놈의 후궁을 더 들이란 이야기를 안 나오게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냥 의례적으로 나오는 거잖아요, 그건. 사실 또 대신들의 마음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고요. 아직 두 분 사이에는 루이제 황녀님밖에 안 계시니까….”
도미닉이 에버그린으로 황녀까지 데리고 내려온 이유는 후궁 이슈 때문이었다.
[그 망할 놈의 영감탱이들은 모이면 그 소리야? 어째 좀 잠잠하다 했다! 짐 싸! 내려갈 거야!]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사고를 쳐서 가진 루이제.
하지만 결혼을 하고 꼬박 삼 년이 흘렀음에도 새로운 후계 소식이 없자 황권 안정을 이유로 후궁 이야기가 나오곤 했던 것이다.
도미닉도 미치고 팔딱 뛰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게 노력하는데 왜 안 생겨?’
밤낮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최선을 다했건만!
루이제가 생긴 것을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닐 텐데.
* * *
“도미닉, 왔냐? 어… 혹시…?”
“쉿!”
도미닉이 온다는 건 미리 라키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안까지 같이 올 줄은 몰랐기에 칼론 아저씨가 깜짝 놀라 허둥댔다.
“몰래 온 거니까, 제발 일 크게 만들지 마요!”
“아, 그런 거냐?”
“오늘은 황제가 아니라 어촌계 막내로 왔습니다.”
“아이고, 말을 낮추세요!”
“막내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오랜만에 고향에 온 기분이니 예전처럼 대해 주세요, 어르신.”
목걸이로 오랜만에 얼굴을 바꾸며 정체를 감춘 이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까 그럼?”
칼론 아저씨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황제가 그러랬다고 망설임 없이 말을 놓곤 껄껄대는 모습이라니.
“일단 이쪽으로. 그 얼굴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방으로 갑시다. 술은?”
“요즘 유행하는 거 뭐 있어요?”
“갖다 주마.”
“아, 저는 술은 괜찮고 좀 얼큰한 국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까도 짬뽕 드셨잖아요? 오랜만에 남부 오니까 매운 게 땡기시는구만?”
원래도 매운 것을 좋아하던 이안이었다.
황위에 오른 뒤, 남부 음식을 그리워하며 남부 출신 주방장을 채용했지만 역시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그 정취는 흉내 내기 어려웠다.
그 탓인지 에버그린으로 도미닉이 내려올 때마다 달래 준다는 핑계로 함께 와서는 꼭 매운 음식에 한 맺힌 사람처럼 먹고 가곤 했던 것이다.
“맥주라도 시켜 드려요?”
“괜찮다. 속이 별로라.”
“또 배 멀미 하셨나 보네.”
결국 안주를 기다리며 도미닉 혼자 요즘 남부에서 유행한다는 술을 차례로 마시고 있는데 문밖에서 우당탕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진짜 오셨네!”
“얼마만입니까! 매번 오셔도 몰래 왔다가 금방 가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으하하하!”
이안이 칼론의 식당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주름살이 늘어난 옛 어촌계 식구들이 하나 둘 몰려온 것이다.
“기분이다, 아저씨. 오늘 이 가게 매상 제가 책임집니다. 술이고 안주고, 있는 거 다 가져다주세요!”
“진심이냐?”
“제가 언제 헛소리한 적 있어요?”
술이 한 두 잔 돌았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자 흥이 오른 도미닉이 과감하게 골든벨을 외쳤다.
“오늘 일반 손님들 그만 받고, 싹 연락 돌려라. 도미닉 이놈 자식 지갑 한 번 털어 보자.”
“예, 형님!”
“얼른 애들 보내서 총관도 불러오라고. 그 양반들도 오늘은 야근 그만하고 와서 술이나 마시라고 해!”
“아카데미 쪽도 다녀올까요?”
“말해 뭐 해!”
신이 나서 종업원들을 보낼 곳을 정리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되먹지 못한 놈들! 공짜 술이 있는데 이 몸을 안부를 생각이었던 거냐! 이래서 인간들은 안 된다니까!”
“스톤해머 님? 노영주님도 오셨어요?”
“우하하하! 인간, 신수가 훤하구나!”
“스승님!”
칼론 아저씨가 얼른 일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비운 뒤, 자리를 다시 배치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소란 끝에 술판이 벌어졌고 끝도 없이 요리들이 나왔다.
“형님, 바깥에서 음식 포장도 좀 해 와도 됩니까?”
“물론이지!”
심지어 칼론 아저씨네 식당에서 팔지 않는 메뉴들까지 식탁 위로 깔리기 시작하자 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카림! 올리! 페롯 양!”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반가운 얼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일 때문에 타지에 나가 있는 남부 마탑주나 에바, 안톤 등이 제외되기는 했지만 지금 이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만 따져도 능히 한 지역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이들이 모인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들 오랜만에 만난 이안과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어느새 뜻 맞는 이들끼리 테이블을 잡고 수다를 떨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이 맛에 고향을 찾는 거라고요.”
“확실히 그렇긴 하군.”
그 사이에 벌써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시뻘게진 얼굴을 하곤 이안의 옆에 달라붙어 헤실대는 도미닉.
이안은 익숙한 듯 그 술주정을 모두 받아주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밤이 지나갔다.
* * *
“아우, 머리야.”
다음 날.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던지 중간부터는 아예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은 도미닉이 뎅 뎅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을 보니 이미 이안은 아침 훈련에 나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마신 거야?”
혼잣말을 하는데 입에서 술 냄새가 휙 풍겨나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그때, 도미닉의 눈에 협탁 위에 칼론 아저씨의 필체로 적힌 영수증이 눈에 띄었다.
“어제 마신 건가? 보자…. 일, 십, 백… 뭐?”
믿을 수 없는 금액에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지만 영수증의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벗겨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나를 벗겨 먹으려고!”
얼른 뒷장의 상세 영수증을 보는데 도미닉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드워프가 낀 술자리는 함부로 돈 내는 게 아닌데.”
말술인데 심지어 입도 고급인 드워프.
중간에 찾아온 술고래 엘프까지 더해져 이 사단이 난 것이었다.
“쯧-”
아침부터 영 좋지 않은 것을 봤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루이제가 방문을 열고 오도도도 달려왔다.
“아빠!”
“루이제!”
매우 다행스럽게도 엄마를 꼭 빼닮아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루이제.
체력마저 엄마를 닮아서 날렵하게 도미닉의 등 뒤에 매달리며 귀를 잡아당겼다.
“아프잖아!”
“아기가 있어!”
“응?”
“아기가 있다고!”
루이제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에 도미닉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엄마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아빠한테만 말해 주는 거야! 엄마 뱃속에 있지, 아기가 있어!”
그렇게 기다리던 둘째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