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cho Florist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788
787화
레트라 단장은 패션은 늘 똑같은 제국 기사 갑옷이었다.
왕버섯 골짜기의 전투 당시엔 특수 복장을 하긴 했지만, 그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차치하고…….
그런데 지금 그의 스타일은 그때보다도 더 낯설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기사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공자 그 자체의 모습.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사의 흔적은 허리에 달린 검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런 복장으로 나타난 걸 보면 적어도 오늘 험한 꼴은 볼 일이 없다는 뜻이겠지.’
재호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레트라 단장은 왕버섯 골짜기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존재와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재호를 보호하겠다고 했었다.
‘제국이 갑자기 나랑 척질 일은 없으니까.’
계기도 없었으며, 이 일을 앞두고 사용을 미리 논의할 때도 황제는 호의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골짜기에서 만난 이는 제국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트라 단장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상대라면, 제국 쪽에서도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긴 하다는 뜻.
‘일단은 들어 보자.’
단, 이 추측을 자랑하듯 먼저 떠들 필요는 없었다.
“먼저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대왕님이 만족하실 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이기에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이 대륙에선 황제 폐하가 유일할 테니 말입니다.”
“…….”
갑자기 확 무거워지는 존재감.
“그들의 이름은 플리스트.”
“플리스트?”
낯설게만 들리는 이름.
“풍기던 분위기랑 다르게 꽤 부드러운 느낌이네.”
플로리스트와 비슷한 단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저희도 모릅니다. 그 정도 되는 존재들이라면 이름에도 어떠한 의미가 있겠지만, 그걸 궁금해하는 것은 저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뭐, 그건 일단 넘어가자고. 답도 없는 걸 붙잡고 있을 만큼 이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니까. 플리스트라는 걸 안 것만으로도 됐…….”
움찔-
“?”
그 순간, 재호의 늘 앞치마 주머니에서 거북목을 유발하는 것 말곤 하는 게 없던 알드리온이 오랜만에 반응을 보였다.
“…너 뭐야?”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굉장히 넓고 안락한 마법의 앞주머니 내부를 들여다보며 묻는 재호.
“커어…….”
알드리온은 갑자기 거세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수작질.
“야.”
“…….”
“야.”
“크헙? 으응?”
재호가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그제야 알드리온이 정신을 차린 척 눈을 떴다.
“으음… 잘 자고 있는데 왜 깨운 거냐?”
“뭔데? 또 뭘 숨기고 있어?”
“다짜고짜 무슨 소리지?”
“플리스트에 대해서 알고 있지?”
“…….”
“말해 줘. 그게 뭔데?”
“…정말 너무하는군. 내가 힘 좀 회복한다 싶으면 꼭 민감한 질문으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거! 제발 좀 그만해 줬으면 좋겠어.”
알드리온은 굉장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이 몸은 엘리시아 화원의 수호신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린 뒤, 단 한 번도 수호신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근데 또 힘을 뜯어 가겠다고?!”
“어…….”
생각보다 격한 반발에 재호는 당황했다.
동시에 알드리온의 힘에 영향이 간다는 걸 보면 플리스트가 이 세계의 비밀과 연관이 있는 모양.
“그리고 알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다짜고짜 나한테 묻는 건 너무하는군. 스스로 알아보려고 좀 해 보도록.”
“아니, 그야 난 플리스트에 대해 오늘 처음 들었으니까.”
-흠흠, 잠깐. 나 할 말 있어.
그때, 잠자코 있던 징징이가 슬쩍 말했다.
-왠지 알드리온이 화를 내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아서 말이지.
“뭐? 네가?”
-아는 척하지 마.
재호와 꼰대에게서 동시에 나온 불신 가득한 반응.
-아니… 알드리온이 말했잖아. 알아보려는 노력도 안 한다고.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건데 기억을 못하는 것뿐이야.
“내가 알고 있다고?”
하지만 재호는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에 없었다.
-흠흠… 근데 이걸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징징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레트라 단장을 슬쩍 쳐다봤다.
“아…….”
확실히 레트라 단장이 듣는 곳에서 이야기하기엔 눈치가 좀 보였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떠들어 놓곤 뒤늦게 감추는 것도 뭔가 이상한 느낌.
“전 괜찮습니다. 제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 따로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레트라 단장은 그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흠흠, 그럼 징징이 네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그럼 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레트라 단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플리스트에 관해 설명을 이어 나갔다.
“플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 역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제국의 정예 기사단원이 되면 플리스트에 대해 기본 교육을 받는데,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지요.”
[플리스트]그 존재에 대해 아는 이들은 보통 그들을 질서의 수호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이미지.
레트라 단장은 그들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질서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응?”
갑작스러운 질문.
“뭐… 일종의 평화 유지 같은 거겠지.”
“보통은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플리스트가 말하는 질서란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이 대륙에서 일어나는 세계의 흐름 그 자체를 바꾸지 않고 지켜보는 것.”
“음?”
조금 난해하게 들리는 개념이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과거 헬릭스 전투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대륙이 하나 되어 고대의 괴수를 저지하기 위해 싸웠었던 전투.
“하지만 플리스트가 말하는 질서는 헬릭스가 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재해였으나, 대왕님이 나서서 막은 것이니 말입니다.”
“그, 그렇게 되는 거야?”
“예. 플리스트는 이 세계의 일부가 아닌 이방자들. 즉, 임모탈리언을 무질서의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알 듯 말 듯한 개념.
‘쉽게 말해서 NPC들끼리는 뭔 짓을 하던 큰 틀에서 움직이는 존재들이니 상관없다는 거군. 하지만 플레이어는 그렇지 않고…….’
플레이어는 뉴월드 역사에 변곡점을 만들어 내는 이들.
물론 대부분은 큰 파도에 휩쓸려 가겠지만, 몇몇 예외의 존재들은 그렇지 않았으니…….
“어…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진작 플리스트를 만났어야 할 것 같은데?”
아마 플레이어 중, 가장 요란하게 역사의 흐름을 비틀고 쥐어 짜낸 사람이라고 하면 단연코 재호였다.
그런데 재호는 지금까지 플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아마 그들이 대왕님을 계속 주시하곤 있었을 겁니다.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플리스트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이번에 나타난 건 결국 날 내버려 두기만 할 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가?”
“그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플리스트의 개입은 임무 개시 직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던 겁니다. 다만 대왕님보다는 가디언 길드가 1순위 목표 아니었을까 추측 중입니다.”
레트라 단장이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플리스트는 저희 계획을 확인한 뒤, 가디언 길드 토벌에 도움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대왕님에게 향하는 적들의 핵심 전력을 모조리 차단한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내 주변이 썰렁했던 거구나.”
재호는 이제야 당시의 기묘한 분위기가 이해되었다.
“그런데 플리스트는 제국의 기사단보다 상위의 집단인가? 제국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거야?”
“제국의 기사가 되는 순간, 저희는 철저한 교육을 받습니다. 플리스트에 대해 절대 말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들에게 전적으로 협력하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강해서만은 아니겠지.”
제국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고작 힘의 차이 때문에 그들에게 굴욕적인 태도를 보일 리는 없었다.
아마 레트라 단장은 물론 다른 기사들에겐 전해지지 않은 비밀이 있을 터.
“우리 앞에 나타났던 플리스트는 우두머리인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플리스트는 수장 외의 이들은 결코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말입니다.”
“거참… 성가신 단체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이젠 갑자기 질서 타령을 하는 이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판.
“어쨌든 플리스트가 그렇게 나선 건 기사단 쪽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건 확실하지?”
“그렇습니다. 만약 그 장소에서 플리스트가 대왕님을 적대했다면, 저희 또한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대왕님과 엘리시아 화원은 황제 폐하, 그리고 제국의 혈맹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무력의 차이 때문에 그들에게 협조하는 건 아니었다.
제국이 우선시하는 가치는 분명히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플리스트 쪽에서 날 곧 찾아오겠다고 했잖아. 혹시 내가 대비해야 할 게 따로 있을까?”
“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먼저 만남을 예고한 경우는 한 번도 없던 것으로 알아서…….”
이후에 레트라 단장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본래 목적인 가디언 길드 토벌은 완료된 상황이었으니까.
그들의 위협이 걱정된다며 제국의 기사단이 졸졸 쫓아다니는 건 명분이 약했다.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치는 게 아닌 이상…….
“뭐, 좋아. 그렇다면 할 이야기는 이게 전부인 건가?”
“그렇습니다.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것도 너무나 제한적이라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핵심은 다 듣긴 했다.
왕버섯 골짜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그리고 플리스트가 어떠한 곳인지 등등.
“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만나는 것보다는 백배 나으니까. 도와줘서 고마워.”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럼 너희는 이제 제국으로 복귀하는 건가?”
“우선은 폐하께 보고를 드린 후, 다시 가디언 길드 추적에 나설 것입니다. 그들은 끝없이 부활하니 말입니다.”
“고생이 많네. 나도 일이 정리되면 황제 폐하 한번 찾아갈게.”
“감사합니다. 그럼 대왕님의 말씀도 황제 폐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난 레트라 단장.
-푸하!
근질근질한 입을 간신히 참고 있던 징징이가 그제야 크게 심호흡했다.
“자, 이제 이야기해 봐. 내가 플리스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응. 아,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 이야기한 플리스트와 같은 건지는 몰라. 어디까지나 단어가 같다는 거니까.
잠시 뜸을 들인 후, 징징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비우스 여왕 기억나?
“당연히 알지.”
제국의 초대 황제 피루스와 결전을 벌였던 고대의 패자.
-그럼 이비우스 여왕의 이름은?
“이름? 이비우스 아냐?”
-아니, 풀네임.
“글쎄……?”
-흐흐, 역시 기억을 못 하는군. 그렇다면 내가 알려 주지. 그건 바로…….
-플리스트 이비우스.
풀네임은 옆에 있던 꼰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