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58
“하지만 영주님께서, 유부녀가 최고라는 제 편협한 시각을 깨부숴 주셨습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도움이 됐다니까.”
마차가 대로를 질주했다. 숙소가 어느새 코 앞이었다. 로빈은 먼저 내려서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전부 내리고 나니까 로빈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내게 인사했다. 이렇게 인사받으려고 한게 아니엇는데, 이렇게까지 고마워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앞으로도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아니 뭘요. 그럼, 결혼식 할 때까지 몸조리 잘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도 숙소로 올라왔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 될 숙소는 짐 정리가 끝나서 말끔한 모습이었다. 시에리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로빈 씨 혼담이 무사히 성공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로잘린 유바 영애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에요. 제가 봐도 로빈은 아주 듬직한 사내니까, 그럴 수 밖에 없죠.”
“그…..”
“왜 그래요?”
“저는 그래도 루시우스가 더…..”
“제가 더 멋있어요?”
“네. 헤헤…..”
시에리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나는 시에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여기사 상황극 한 번만 해주실래요?”
“그, 그걸요?”
“네.”
여기사 상황극. 지금 내게는 에반젤린을 잡는 것 다음 목표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딸 칠때도 내 망상 속에 나타난 건 이브도, 시에리도 아닌 마리아였으니까. 그 분홍빛 머리카락이 땀에 젖고, 옷을 찢어발기고 억지로 범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는 모자랐다. 나는 다시 한 번 시에리에게 여기사 상황극을 요청했다.
시에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바닥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나를 살짝 밀며 말했다.
“그…. 크, 큿…. 죽여….라…..!”
“씁…. 먼가 모자란데. 더 열정적으로 해봐요. 정말 그 비장하게!”
“크….큿! 죽여라….차라리…..으으…! 못하겠어요! 어떻게 이런 걸 하라는 거에요!”
시에리가 내 가슴을 팡팡치며 울먹거렸다. 나는 시에리의 양손을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요 시에리. 잘 생각해보세요. 시에리는 이제 영주 부인이잖아요? 영주 부인은 위엄을 보여야 돼요. 기사같은 위엄! 언제 어디서나 아주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요. 아시겠어요?”
“그, 그게 이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제 앞에서도 위엄있는 어조로 말할 수 있다면, 남들에게도 고압적이고 위엄있는 어조로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자 다시 해보세요. 더 위엄있게!”
“그, 그런가요?”
“그럼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갯짓으로 재촉했다. 사실 이젠 시에리랑 상황극을 한다는 건 아무 상관없었다. 생각보다 연기가 어색해서 서던 좆이 팍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시에리를 놀린다. 지금 내 머리에 든 생각은 그것 뿐이었다. 시에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눈을 치뜨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시력 나쁜 할머니 같은 표정을 하며 시에리가 외쳤다.
“큿. 죽여…라!”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가를 실룩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참은 뒤 팔을 활짝 벌렸다.
“아주 잘했어요. 우리 시에리 너무 귀여워요!”
“귀, 귀여워요?”
“그럼요.”
나는 시에리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줬다. 시에리는 수줍은 표정으로 옷을 벗을듯 말듯 쇄골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 그러면 이 말투로 계속….할까요?”
“그럴까요?”
“크, 큿…죽여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에리가 다시 전매 특허 대사를 외치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내가 애무하자 시에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흐응….죽여랏…..”
씨발 뭔 녹음기랑 떡치는 것도 아니고.
“….시에리. 그 말 말고 다른 건 몰라요?”
“그…. 여기사님 말투를 몰라서…..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평소처럼 할까요?”
“네…. 저도 그게 좋아요….흐응…..”
수도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브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비가 유리창을 훑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내리는 영지의 모습은 마치 물을 흩뿌린 수채화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창틀을 훑으며 미약한 물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셀루가 수영장 밖에서 고개를 들어올린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물 맛을 보거나 머리를 감아내리며 히죽 웃었다. 셀루는 이브더러 나오라는 듯 집무실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이브는 이내 열린 창문마저 닫아버렸다. 셀루는 그 편이 더 좋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이브는 곡도를 손으로 훑으며 날을 살폈다. 이브의 지난 세월을 함께해온 이 곡도는 이브가 처음 인어섬으로 탈주를 감행할 때 뱃사람을 죽이고 가져온 물건이었다. 손잡이에는 반질반질 윤이 났고 피를 먹은 칼날은 항상 예리함을 유지했다.
아이라는 집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섬뜩한 장면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오다가 놓칠 뻔 했다. 이브는 뒤늦게 아이라가 들어온 걸 눈치채고 고개를 다시 바로하고 서류에 집중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아이라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며칠 전 ‘물장사’를 한다던 두 상인을 체포한 이후 이브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엘시가 인어를 데리러 간다고 간 뒤로 아직까지 귀환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브 씨?”
“왜?”
“그…. 기분 안좋은 일 있으세요?”
“비가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이브는 혀를 찼다. 아이라는 그 옛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이브가 고개를 젓는 옛날 일은 보통 자기 가족 이야기거나, 어릴 적 학대당한 이야기였으니까. 아이라는 대충 이브의 부모님이 비가 올 때 죽었다거나, 이브가 비 오는 날 많이 맞았다는 식의 이야기일거라고 예상했다.
“근데 엘시 얘는 왜 이렇게 안오냐? 지금 며칠 지났지?”
“나흘 쯤 지났죠?”
“원래 어제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 아니야?”
“걱정되세요?”
“씨발 엘시 죽으면 내가 신랑한테 뭔 욕을 들을지 몰라서 그런다 왜.”
이브는 걱정된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잔혹한 성품 뒤에도 그나마 인간성의 편린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한 아이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는 그녀가 한숨을 쉬는 게 마음에 안들었는 지 소리쳤다.
“뭔데. 뭐 하고싶은 말 있으면 말로 해. 좆같이 한숨 쉬지 말고”
“마, 말하면 때리실거잖아요…..”
“맞을만한 생각을 했단 거지?”
“아, 그,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아이라가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고 이브가 칼을 옆에 놔두고 손을 풀며 일어났다. 아이라는 며칠 전에 이브한테 이상한 농담을 던졌다가 딱밤 한대를 맞은 이후 다시 이브 두려움증이 도진 상태였다. 이브는 아직도 그 농담의 썰렁한 뒷맛이 남아있어서 아이라가 걷는 것만 봐도 괜히 짜증이 났다.
– 이브 씨. 이브 씨가 왜 옷빨이 잘받는 지 아세요?
– 왜 잘받는데?
– 옷을 잘’입으’니까요!
-……씨발년이
이브는 다시 한 번 떠오르는 그 저열한 농담에 몸서리를 치며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 씨발년아. 뭐? 옷을 ‘입으’니까? 어?”
“아, 아아악! 아, 아파요! 자, 잠깐만요! 저 그런거 한 번 더 맞으면 진짜 죽는다고요! 여기 혹났잖아요! 저, 저번에 한 번 때리셨으면서 왜 또 때리시려는 거에요!”
“씨발 불쾌한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었잖아. 내가 널 오늘 아주 유니콘으로 만들어줄테니까 대가리 잘 대고 있어봐 씨발.”
“악! 아악! 아아악!”
“야야야, 소리 지르지마. 아직 안때렸어. 어어? 야, 씨발 주먹으로 때린다? 어. 씨발 가만히 있으라니까?”
똑 똑 똑
실랑이 가운데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브는 손찌껌을 하려던 손을 내리고 문을 쳐다봤다. 기사단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페타 부인. 영주 호위병인 엘시를 비롯한 파견대원들이 복귀했습니다.”
“그래?”
이브는 아이라를 때리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옷을 챙겨서 문을 나섰다. 아이라는 방금 전 박살날 뻔한 자기 골통을 부여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엘시는 빗줄기를 맞으며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 옆에 있는 기사들은 갑옷이 비에 젖는 걸 신경쓰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착 달라붙은 엘시의 옷이나 물에 젖은 가죽 벨트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 지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들이 데려온 인어가 어떻게 될지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갑옷에 빗물이 묻으면 다시 다 닦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끔찍한 정비 시간이 다가올거라는 생각에 기사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기사들 바로 뒤에는 인어 한마리가 수레에 실려서 꼬리를 팔딱대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 있는 수영장이 신경쓰여서 그 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고, 엘시의 살랑거리를 꼬리를 손가락으로 자꾸만 콕콕 건드리려고 했다.
“엉덩이 찌르지마라. 기분나쁘다.”
“아.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