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5
“여왕님. 이 편이 최선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로회의 장로들이 애타는 눈길로 여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힐데른 왕국의 여왕 아힐데른 샐리나는 그간 냉정하고도 정확한 결정과, 뛰어난 수완을 바탕으로 엘프 왕국을 이끌어온 인재였다. 지금 아힐데른 에리나에게 쏟아지는 사랑과 호감 역시 이런 아힐데른 샐리나 여왕의 우수함이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어떻게 봐도, 인간이고 더 후사를 낳을 수 없으며 아이의 친부도 아닌 용사 에이에이보다는 페타 루시우스를 부마로 삼는 게 현명한 결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로회의 장로가 조곤조곤 여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다그치기에는 너무 피곤해 보였고, 문제 자체가 너무도 복잡했다. 샐리나는 장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기각합니다. 페타 루시우스 본인의 인성에 대해 알 수 있는 바가 없고, 워낙 흉흉한 소문이 많은 인간인지라 부마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왕님. 그 역시 용사 에이에이에 맞먹는 업적을 쌓았고, 사생활은 더러울지언정 개인사에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거나 약자를 핍박했다는 부분 역시 찾을 수 없습니다. 마왕을 물리치고, 북부의 아인들을 평정한 그 업적은 아힐데른의 그 누구와도 견줄 수가 없지요. 이대로 친자 논란을 끌어안고 가는 건 왕실과 원로회 전체의 이미지와도 연관된 일입니다.”
“한 번 부마로 삼은 이를 내치는 것은 왕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부마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왕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인간 용사에게 큰 애정을 쏟고 계시는지요? 행여나 아힐데른 에리나 공주님에게 악소문이 쏟아질까 봐 보호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샐리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아이일 뿐입니다. 어찌 아이의 일에 그리 가혹한 결단을 강요하십니까? 페타 루시우스 본인도 제 아이가 임신한 사실은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한 번 임신한 공주를 내치고 인어를 부인으로 삼은 인간을 어찌 남편으로 삼도록 강요하십니까?”
여왕의 반박에 원로회 장로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진위를 모르지 않습니까? 이미 왕가는 아힐데른 에리나 공주님의 행동 한 번으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역사서에는 오늘 사건이 영원히 남을 것이고, 에리나 공주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여왕님은 아주 치욕적인 흠을 남기신 겁니다. 여왕님. 냉정하게 생각하시지요.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공주가 모두를 속이고 여자랑 결혼하려 들다니요!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히고, 아이의 친아버지를 데려오는 게 옳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여왕님!”
“늦지 않았습니다!”
원로회 일동이 고개를 숙였다. 샐리나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장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미 아이가 건강하게 출산했으니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아이의 아버지와 닮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키운다면 될 일입니다. 제 딸을 저 들개 같은 호사가들 사이에 던져주자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 딸의 권위는 추락하고, 아힐데른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되겠지요! 아무리 문란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였더라도 제 딸이고, 여왕이기 이전에 한 엘프의 엄마입니다. 어찌 어미 된 자에게 그리 잔혹한 결단을 내리라 하십니까?”
“여왕님 정녕, 스스로 결정을 내리시지 못하겠습니까?”
원로회의 누군가가 입을 열어 물었다. 샐리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장로의 뱀 같은 눈이 주변 장로들을 살피더니 샐리나에게 꽂혀 들어갔다. 샐리나가 말했다.
“결정은 내렸습니다. 용사 에이에이가 에리나의 적법한 남편이고, 아이의 일은 어떻게든 묻어볼 생각입니다.”
“원로회의 그 누구도 그 결정에 찬동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친부는 페타 루시우스고, 페타 루시우스는 부마의 자격이 충분하며, 아이의 추문을 계속 내버려 둔다면 왕손 본인에게도, 왕가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타격이 돌아올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반드시 이야기는 새어나가고 분란의 여지를 만들 것입니다.”
“마법으로 숨기면 되지 않습니까. 변신 마법을 사용해서…….”
“어린아이가 마나에 과하게 노출될 경우 어떤 부작용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에리나 공주의 안위를 위해서 왕손을 사지로 내모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저보고, 제 딸을 사지로 내몰라는 말씀입니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저희는 여왕님께 그런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원로회와 지도자의 의견이 갈린다면 결정을 내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한가지, 서, 설마…….”
샐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로회의 장로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가 입을 열었다.
“여왕이시여. 옛 조상들의 지혜를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미미르의 재판을 요구합니다.”
“그건…….”
“약조해주시지요. 여왕님. 미미르의 재판에서 나오는 결론대로 따르기로 말입니다.”
샐리나는 회의실의 문을 바라봤다. 저 문 너머에서 에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샐리나에게는 제 딸을 지킬 힘이 없었다. 샐리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문제로 조상님들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었다. 숨을 크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미미르의 재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샐리나의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원로회의 장로들이나 선대 왕들이 죽으면 미미르에서 영혼으로 재탄생된다. 선왕들과 선대 원로회 장로들에게 질책을 받을 걸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전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왕가의 문제로 미미르에게 들러야 하는 원로회의 장로들 역시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들이라고 왕가의 문제를 직접 들추는 게 기분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힐데른 샐리나는 지금껏 통치 기간에 있어 단 한 번에 흠결도 잡히지 않은 여인이었고, 원로회는 그런 그녀를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기 딸 문제로 판단력이 흐려진 모습을 보이자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대를 이어갈 아힐데른 에리나 공주의 무능함에 걱정이 앞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너무 예뻐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때 들었어야지.”
장로 중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몸을 움찔 떨었던 몇몇 장로들이 헛기침했고, 샐리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미르의 문이 열리고, 장로들과 샐리나가 홀에 들어섰다. 미미르는 오늘도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에 가득한 문신이, 그녀를 더욱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장로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래서, 이 미미르라는 존재는 대체 뭔지,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조상님들께서 직접 잡아두신 거대한 존재라는 데, 감이 잡히질 않아. 보아하니 그저 흉물스러운 문신을 한 인간일 뿐인데.”
“그러게 말일세.”
잡담하던 장로들이 조상님을 소환하기 위해 미미르를 건드렸다. 미미르를 몇 번 흔들자, 미미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천장에 점처럼 박혀있던 푸른빛들이 점점 가까이 내려오더니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들은 장로들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내려왔다. 장로들은 영혼들이 전부 왔는 지 세다가,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걸 깨달았다.
“페타 아르크투르스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저번에 미미르에 도전자들이 다녀간 이후 쭉 칩거 중이다.”
“그분의 의견이 꼭 필요했는데……. 아쉽군요.”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조상들이 매우 불안한 눈빛으로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장로들은 영혼들의 불안한 눈빛의 원인을 알 수 없어서 꺼림칙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볼 뿐이었다. 장로와 영혼들이 일제히 여왕인 샐리나를 바라봤다. 여기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인 듯했다.
“원로회와 아힐데른의 여왕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도움을 청하고자, 미미르의 재판대 앞에 섰습니다.”
수염을 길게 기른 영혼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더냐?”
샐리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건을 하나하나 설명할 때마다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에리나가 페타 루시우스의 아이를 밴 것, 그런데 그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에이에이와 결혼을 시킨 것, 아이가 페타 루시우스와 너무 닮아서 도저히 속일 수 없는 것. 이야기의 각 부분에 들어설 때마다 조상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눈에 보였다. 샐리나는 옷자락을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걸 직감한 탓이었다.
“흠……. 그래. 일단 들어보니, 딸의 문란함을 방만한 네 책임이 크다.”
조상의 목소리에 샐리나가 몸을 떨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에리나를 데려오지 않은 건, 이 건으로 문책을 당하는 걸 자기 자신으로 한정하기 위해서인가? 모성애가 일을 그르칠 날이 있을 게다. 이번 일은 반드시 반성토록 해라.”
“…..네.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조상들이 서로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희는 어떤 걸 결정해주길 원하느냐?”
장로 중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조상들께서, 용사 에이에이와 페타 루시우스 중 어느 쪽을 왕실의 부마로 삼아야 하는지…….”
“에이에이!!!! 무조건 에이에이다!!! 무조건 에이에이란 말이다!!!”
격렬한 외침이 하늘에서 들렸다. 푸른 점이 점멸하더니 삽시간에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조상들과 장로들 사이에 떨어졌다. 칩거했다던 페타 가문의 조상. 페타 아르크투르스였다. 새파란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어조로 소리쳤다.
“알겠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에이다! 그 망나니 놈이 왕가를 어지럽히는 걸 볼 수 없단 말이다!!! 에이에이!!! 무조건 에이에이가 남편이다!!!”
“페타 아르크투르스님. 어찌하여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닥쳐라!! 이 무능한 놈들아!! 권력욕에 미쳐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모르는 네 놈은! 전부 혀를 깨물고 죽어 마땅하다!!! 너희들도 어디 말해 보아라!! 내 자손 페타 루시우스 그 빌어먹을 망나니 놈과 에이에이!!! 둘 중 누가 더 부마에 어울리더냐?!!!”
페타 아르크투르스가 다른 영혼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페타 아르크투르스의 시선을 피했다. 반대로 샐리나의 얼굴에는 활기가 돌았다. 아르크투르스가 장로들을 뚫고 샐리나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그 불쌍한 에리나가 속은 거야! 암! 그렇고말고! 미미르여! 내 의견으로 결론을 내려라! 정실은……. 아니, 부마는 에이에이다!!!”
미미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잠시 후, 떨떠름한 표정의 장로들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샐리나가 미미르에서 걸어 나왔다.
“피가 필요하다고?”
셀루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바늘을 든 채 그녀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네. 많이는 필요 없고 사람 하나 뿅 갈 정도면 충분해요.”
“이상한 데 쓰려는 거 아니지?”
셀루가 더욱더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자기 몸을 팔로 가렸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셀루의 피는 이번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고순도의 인어 피는 미약이나 다름없었고, 이 피를 정제하면 고급 미약이 만들어졌다. 나는 자기 피를 뽑는다는 말에 질겁한 셀루를 다시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 구하는 일이에요.”
“의도가 좋다고 해도……. 나는 인어 중에서도 우두머리급이라 피가 엄청 강하다? 에스타에서 정신 나간 여자들 못 봤어? 걔들 다 내 피 섞인 물 먹고 맛이 가버렸어. 혹시 시에리나 엘시한테 쓰려는 거면 하지 마.”
“한 방울이면 돼요. 여자를 따먹으려고 달라는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네가 하는 말이라 더 수상해.”
셀루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레 바늘로 그녀의 손가락을 콕 찔렀다. 파란색 피가 물감처럼 방울져 부풀었다. 혹시나 수영장 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병에 핏방울을 담은 뒤,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서 다시 피가 멎도록 압박했다. 셀루는 자기 손에 감긴 붕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웃었다.
“헤흐.”
“아팠어요?”
“아팠지만, 네가 붕대를 감아주니까 좋아.”
“여전히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시네요. 한 10분 정도 감고 있으면 피가 멎을 거예요. 그 전까지는 풀지 마세요.”
“알았어.”
나는 피를 담은 병을 들어서 공방으로 향했다. 저택 1층 구석진 곳에 있는 소야의 공방에서는 오늘도 방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구가 한창이었다. 내가 오는 것도 몰랐던지 문 너머에서도 격렬하게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니아 야이반? 해줘야 할 게 있어서 왔어요.”
“흥…. 영주님…. 흐읏……. 영주님……. 아……. 아아…. 영주니이이이임!!”
우당탕 뭔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뭐지 씨발. 나는 문을 열고, 황급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