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79
“루시우스. 오늘도 고생했어. 우리 아루스 때문에 힘들었지?”
“아니요. 제 딸인데요. 뭘.”
아루스가 새근새근 잠들었다. 아티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루스가 둥실 떠오르더니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아티는 여유롭게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내게 말했다.
“피곤하지?”
“네.”
아티가 내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지르고 있었다. 이건 모양새만 보기 좋지 내 머리를 프레스기 사이에 끼워놓고 마사지를 받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아티가 힘을 조금만 주면 머리가 터져나갈 수밖에 없는 행동. 강아지들은 배를 보이면서 상대에게 복종과 애정을 표한다고 하던가? 나는 지금 아티의 수컷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순간, 메이가의 맹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대체 아티는 어떻게 메이가의 맹세를 풀어낼 생각인 걸까? 이렇게 머리를 주물럭거려서 토해내게 만드는 건가?
“아티.”
“왜 그러니?”
“메이가의 맹세를 어떻게 풀려고 하나요?”
“음……. 기억을 헤집는 수밖에 없단다. 사실 마법으로 기억을 아예 날려버리려면, 그만큼의 충격을 뇌에 줘야 하는 데 마법을 쓸 때마다 그런 충격을 머리에 줄 리가 없잖니? 아마 어떤 특정한 암시를 걸어서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지워버리는 그런 원리일 거야.”
“그런가요?”
“그래. 그런 건 아무래도 계약의 범위에 따라 다르고, 이제 어떤 방식으로 압박을 주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엘프 여왕이라고 했잖니? 엘프들이 강해 봐야 엘프란다. 내가 머리를 주물럭거리는 건 일도 아니지.”
“만일 아티랑 비슷한 정도의 존재가 세뇌에 걸렸다면요?”
나는 아힐데른 밑바닥에 세뇌된 미미르가 생각나서 물었다. 아티는 그 말에 뭔가 생각하는 듯 멈칫했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하지만 그녀는 이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그 정도라면……. 아직은 모르지만, 일단 계약의 주체를 완전히 끊어내고 나서야 시도할 수 있을 거야. 나랑 비슷한 정도의 강자가……. 어떻게 그 세뇌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티를 쳐다봤다. 아티는 나를 쳐다보며 씩 웃고 있었다. 미미르에 대해 말해야 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미미르랑은 어떻게, 얼마나 친해요. 아티?”
“미미르가 예쁘긴 하지?”
“네.”
“미미르도 나도, 다곤도 시오테르도 전부 마계에선 서로 이름만 들어봤어. 지상에 떨어지고 딱 한 번 서로 마주했지. 그때 의기투합을 했다고 할까? 그때 약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 된단다. 각별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를 챙겨줄 사이는 되지.”
그 정도 사이라면 지금 당장 말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티를 불렀다.
“아티.”
“왜 그러니?”
“제 말 듣고 화내지 않을 거죠?”
아티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게 화내지 않아.”
“아티. 그……. 제가 미미르를 만났는데…….”
내가 운을 떼자, 그녀는 그 말만으로도 대충 내가 할 말을 파악한 듯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을 감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티에게서 떨어질 불호령을 감지하고 몸을 움츠렸다.
“미미르는 이미 제압된 상태였어요. [메이가의 맹세]를 미미르에게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싸늘한 한기가 몰아쳤다.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 누군가 내 가슴을 짓밟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야가 흔들리고, 동굴 전체에 암운이 드리운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한동안 내 머릿결을 가볍게 쓸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엘프는. 은혜를 모르는 아이들이네.”
그 말은 마치 사형선고 같이 들렸다. 오싹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내 머리 위로 아티의 손이 따뜻하게 내려왔다.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은 손은 내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괜찮아. 루시우스. 나는 화내지 않아. 알고 있잖니? 내 분노는 데오르곤 하나에만 향해 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아힐데른을 공격하거나, 날뛰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아티가 말했다.
“미미르를 이곳으로 데려와 주겠니? 그 아이를 고쳐줘야 하니까.”
분노는 일순간이었다. 아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이야기는 더 할 게 없지?”
“네. 그렇죠.”
“그럼, 루시우스. 오늘은 좀 편하게 자보지 않을래?”
“편하게요?”
아티는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나는 그녀를 따라 쫄래쫄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이라고 해도 바로 옆에 침대가 붙어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몇 걸음 걷지 않았다. 언제봐도 푹신하고 거대한 침대였다. 어제는 왜 소파에서 떡쳤지? 여기서 수영하는 것처럼 용솟음치며 퍽퍽 박아댔으면 개쩔었을텐데.
아티도 침대가 더 좋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번쩍 들어서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왁!”
화들짝 놀란 내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로 떨어졌다. 푹신한 감촉이 덮쳐왔다. 당황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뭐지? 오늘은 역강간 플레이인가? 그건 그거대로 좀 무서웠다. 아티가 힘만 잘못 주면 내 골반이나 어깨는 으깨진 계란 과자처럼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줄래?”
아티는 그렇게 말하고 침대 옆 찬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팔을 올리자 드레스 자락이 올라갔다. 짧은 치마 사이로 허벅지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팬티 끝부분을 살짝 견식 하며 나는 발기한 좆을 손으로 훑었다.
“찾았다. 자, 여기 누워봐.”
“아티. 오늘은 섹스 안해요?”
“나는 루시우스 네게 몸만 원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단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섹스하겠다고 달려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공작대회에서 자신이 만든 발명품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도무지 뿌리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수정구슬이 들고 있었다. 뭐지? 드디어 영상구 플레이로 넘어가는 건가? 혹시 어제 했던 섹스를 녹화해서 오늘 다시 보는 음란한 플레이?
“이건 잠이 잘 오게 해주는 구슬이야.”
“잠이 잘 오게 해주는 구슬이요…….”
“어라? 뭔가 마음에 안 드니?”
“아니요.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저도 잠이 부족하다 느꼈거든요.”
섹스만 생각했던 나 자신의 더러움을 살짝 반성했다. 그녀는 내 반응이 조금 의아한 듯 보였다. 나는 아티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럼 아티. 이건 어떻게 쓰는 건가요?”
“여기 누워보렴.”
아티는 수정구슬을 사이에 놔두더니, 내 손을 꼭 잡고 훗훗하고 웃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웃게 됐다. 아티는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침대가 푹신해서 수정구는 매트릭스 안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아티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볼을 쓰다듬더니 수정구를 톡 건드렸다. 은은한 향이 퍼지면서 수정구가 기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루쯤은 이렇게 가만히 누워서 자고 싶었어. 내가 사랑하는 이랑,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잠드는 거지.”
“좋네요. 이건 무슨 효과가 있나요?”
“향수에 젖게 해주는 구슬이야. 어린 시절이나, 기억에 남았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단다.”
“옛날 일?”
눈이 몽롱했다. 나는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져서 눈을 비볐다. 아티도 졸음이 오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음악 소리가 뿌옇게 들렸다. 수정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방을 감쌌다. 아티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네가 없을 때, 항상 이걸로 너를 처음 만난 날의 꿈을 꾸곤 했어. 루시우스. 너도 내 꿈을 꿔줄 거니?”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깊이,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
삐익 – 삐익 – 삐익 -.
알람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4시. 신문 배달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여동생이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비쩍 말라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는 병색이 완연하여 ‘나는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말 없이 병실 문을 닫고 병원을 나섰다. 내가 오늘 할 구역을 정해준 신문사 아저씨는 담배를 뻐끔뻐끔 태우며 난로를 쬐고 있었다. 나는 오토바이에 신문을 싣고 새벽 거리를 달렸다.
우편함에 마지막 신문을 꽂을 때쯤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산꼭대기에 있는 동네 계단에 주저앉아서 일출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맑은 날씨에, 햇살은 희망차게도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씨발.”
새벽녘의 한기가 스러진 아침. 나는 편의점 출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대충 벗고나 간 옷이 여전히 세탁기에 쌓여있었다. 나는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화장실에 쭈그리고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세면대와 변기가 서로 겹쳐질 듯이 맞닿은 이 공간에서는 항상 세면대에 절을 하면서 샤워를 해야 했다.
샴푸는 없었다. 비누로 대충 머리를 감아야 했다. 거울에는 구석구석 물때가 끼어있었다. 이것도 언젠가 청소를 해야 하는 데,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한 번도 이 물때를 청소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게 핑계라고 말하지만, 나에겐 현실이었다.
9시. 나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는 퀭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인수인계 사항을 대충 전해준 그는 내가 돈 계산을 끝내자마자 유령처럼 행인들 틈에 스며들었다. 나는 걸레를 들고 진열대 및 식탁을 닦아냈다. 편의점 점장의 무심한 문자가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출근 보고] [네. 출근해서 현재 청소 중입니다. 사장님.]“씨발.”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박고 다시 걸레질했다. 점심쯤에 근처 공사판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들어와서 이상한 담배를 찾았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담배는 가판대에 없었다. 그는 내가 담배를 찾을 줄 모르는 거라며 욕설을 했다.
“이야, 씨발. 담배도 안 팔아? 좆같네. 야. 거 커피 좀 줘라.”
그는 내게 동전을 던지며 그렇게 말했다. 1000원. 커피 한 캔의 가격이었다. 나는 말 없이 가판대에서 빠져나가 캔커피를 건넸다. 공사장 인부는 내가 내민 커피를 보더니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야, 어른한테 줄 거면 두 손으로 줘야지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