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80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마음 같아서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편의점 점장이 한 번만 더 손님이랑 싸우면 자른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인부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혀를 차며 나갔다. 나는 다시 걸레를 빨아야 했다. 누런 가래침 자국 옆에 지저분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씨발.”
오후 5시. 사장이 왔다. 5시부터 10시까지는 항상 사장이 가게를 지켰다. 그는 요즘 시대 사람답게 남을 믿는 것에 매우 서툴러서 야간 아르바이트와 주간 아르바이트를 모두 못미더워했다. 그는 깐깐한 얼굴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다시 나를 슬쩍 쳐다봤다. 저 눈빛. 그는 월급을 깎고 싶어 안달 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청소가 이게 뭐야?”
나는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점장 역시 자신이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모르리라. 그는 내가 말하는 대로 대충 문제점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했다. 오늘 그가 화내는 이유는 청소보다는 조금 더 고차원적이고,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복잡한 사정이 깃들어 있는 문제였을 테니까.
아마 카드 게임에서 대차게 져서 또 돈 백만원을 잃었거나, 잠자리가 부실해서 마누라에게 욕을 먹었으리라. 나는 오늘도 점장의 분풀이 도구에 불과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폐기 품목을 확인했다. 폐기 품목을 하나하나 세본 그는 내게 물었다.
“너 폐기 가져간 거 아니지?”
“아니에요.”
“새끼. 가져갈 거면 그거 찍고 돈 내고 먹어. 알았어? 남자가 궁상맞게 뭔 폐기를 먹으려고 그래.”
그는 혼자 중얼거리는 듯 투덜거리더니 다시 눈깔을 부라리며 내게 말했다.
“대답.”
“네.”
편의점이 끝났다. 생각보다 늦은 5시 15분. 나는 유니폼만 벗고 바로 번화가로 달려갔다. 편의점과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시작한 술집 서빙 아르바이트. 벌써 주방에서는 재료 손질에 한창이었다. 식당 주인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내가 오는 걸 보고 있었다.
“빨리 빨리 다녀 새끼야.”
“죄송합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손님들 앞에 섰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참아야 했다. 1시까지만 일하면 오늘 일과는 끝이었다.
주점에서의 일이 장점이라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는 점일까? 사람들은 바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손짓했고, 나는 그들이 전하는 메뉴들을 받아 적고 주방으로 넘기고 다시 다음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하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인 양. 손가락으로 숫자를 그리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야, 손님들이랑 이야기하는 데 왜 이리 맥아리가 없어. 야. 웃어. 웃으라고.”
사장의 손이 자기 입꼬리를 꾹 누르고 위로 치켜올렸다. 나는 억지로 마주 웃었다. 사장은 그런 내 표정이 만족스러운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그렇게. 잘하네.”
호출 벨이 울렸다. 나는 다시 손님들에게 갔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저희 여기 케이준 샐러드 하나랑요. 야, 너희 이거 먹어볼래? 저기요. 이거 맛있어요?”
“아……. 네. 저희 가게는 다 맛있답니다.”
나는 씩 웃었다. 웃으면서 몸이 떨려왔다. 어딘지 망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알 수 없었다.
새벽 1시. 퇴근 시간.
“씨발.”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신문 배달 장소에서는 집보단 병원이 더 가까웠다. 병실에는 오늘도 동생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그녀의 병색에는 차도가 없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라는 말이 종종 들려왔다. 그 말은 내겐 아주 우스운 것이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라니. 그럼 나는 뭘 위해서 살아온 거지?
여동생이 쓰러지면서, 내 인생은 온통 무의미한 것들로 가득 찼다. 무의미한 분노. 무의미한 새벽 신문 배달. 무의미한 서빙, 무의미한 점장, 무의미한 미소, 무의미한 간호. 그녀에게 간호 따윈 필요 없었다. 링거를 받아먹고 싸기만 하는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보았다.
지금 시각 1시 30분. 이제 잠이 들면 2시간 30분은 잘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씨발.”
*****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끔찍한 옛날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공포가 내 몸을 지배했다. 옆에서 깊게 잠들어있던 그녀는 내 비명에 놀라서 일어났다.
“루시우스? 왜 그래? 응? 왜 그러니?”
“아…….”
여긴 현실이다. 혹시 몰라서 몇 번이나 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여긴 분명한 현실이었다. 나는 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준 수정구슬 때문에 내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냥, 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아직도 기억들이 생생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너무나도.
그렇게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섹스와 부정에 뒤덮인 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티의 레어는 사람 한 명이 더 살기에 딱 좋은 아늑함을 지니고 있어서 떠나기 싫을 지경이었다. 아루스는 나랑 정이 들어서 나를 보내기 싫어했다.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고 내가 가겠다는 걸 말리고 있었다.
“아루스? 아빠 좀 놔줄래요?”
“싫어!”
아루스는 나를 꼭 끌어안고 매달리고 있었다. 드래곤이라 그런 걸까?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그녀가 매달려있으니 나로서도 꽤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밀도에서 차원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티가 아루스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아루스. 아빠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해요. 왜냐면 데오르곤 아저씨를 죽여버리려면, 더 강해져야 하거든. 데오르곤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는 아빠랑 같이 살 수 없어.”
“힝……. 그것도 싫은데…….”
“또 올게요. 아루스. 아빠가 아루스 사랑하는 거 알죠?”
“그래두…….”
아루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땅을 보고 있었다. 이 맛에 딸을 키우는 건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부는 살이 10kg 정도 더 찐 상태였다. 창고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맛있는 것들만 받아먹고 있어서 생긴 결과였다. 그는 끄윽 트림하면서 무념무상의 자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루스를 떼어내고 아티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티. 그런데, 그…. 제게 다른 부인이 있다는 건 아루스에게 어떻게 설명하려고요?”
“어머, 그런 건 아빠가 설명해야지. 나는 여기 갇혀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모른단다.”
아티는 나는 전혀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나중에 아루스한테 맞는 거 아니겠지? 그렇다고 지금 ‘아루스, 아빠는 이제부터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갈 거예요. 아빠는 두 집 살림하고 있거든요.’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아무튼, 그러면 다시 올게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렴.”
“맞다. 아티. 이 마차가 마력을 충전해서 순간이동 하는 방식인데, 혹시 따로 마차를 충전할 방법이 있을까요?”
“마차를 충전? 음……. 잠시만 기다려 보겠니?”
아티는 창고에 포탈을 열더니 손을 집어넣고 이것저것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찾아다니던 그녀는 창고 안에서 작은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름모꼴 모양에 뾰족한 돌에서는 마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아티는 그 돌을 건네주며 말했다.
“고순도 마력석이란다. 안에 마력이 농축되어 있는데, 마차가 주변 마력을 흡수하는 원리라면, 아마 그걸 가까이 대고 있으면 충전 효율이 오를 거야. 밖에서는 구하기 힘든 거니까 다른 곳엔 쓰지 말렴?”
“네.”
나는 마력석을 받아들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는 다시 한번 트림하고 내게 사과했다.
“끄윽, 아이고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먹고 자기만 했더니 체했나 봅니다.”
“아니에요. 마부. 마부한테 더 좋은 대접을 해줘야 했는데. 공간이 공간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밖에 대접을 못 해줬네요. 창고에서 지내게 해서 미안해요.”
“아이고, 아닙니다. 살면서 이렇게 호사스럽게 먹어본 건 또 처음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애님께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하죠. 영애님! 죄송했습니다!”
마부는 아루스에게 ‘영애’라고 불러주며 사과했다. 아루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티를 보며 물었다.
“영애가 뭐예요?”
“우리 아루스를 부르는 말이란다. 우리 아빠가 영주니까. 영주의 딸인 아루스는 영애가 되는 거야.”
“어라? 영주가 드래곤보다 더 높은 거에요?”
“아니. 어라? 그러면 잘못된 표현인가?”
아티도 헷갈리는 제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갑자기 고민이 됐다. 영주와 드래곤이 결혼했을 때, 그 딸을 영애라고 부르면 낮춰 부르는 건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마부는 다소 복잡한 고민 속에서 슬쩍슬쩍 눈치를 봤다. 나는 마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아티에게 말했다.
“영애도 인간들에게는 높여 부르는 표현이에요. 아티. 영주뿐만 아니라 귀족에게는 다 그렇게 부르잖아요?”
“그렇지? 굳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구나.”
아티는 웃으면서 아루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정말 갈 시간이었다. 마부는 말 없는 마차의 고삐를 잡고 내게 말했다.
“영주님. 저는 준비가 다 됐습니다.”
“네. 출발할게요.”
“아빠 또 오세요. 해야지.”
“아빠 또 오세요!”
나는 아루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마차의 레버를 당겼다. 푸른빛의 입자가 사방에 둥실 떠오르며 우리를 감쌌다. 손을 흔드는 아루스와 아티의 모습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우리는 묘한 부유감을 느끼며 공간을 넘나들었다.
“와우.”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영지였다. 위치를 제대로 정한 모양이었다. 마차는 평소 주차되는 위치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원래 말들을 챙겨야 할 마부는 습관적으로 ‘워 워’를 외치다가 자신이 잡은 고삐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말들의 죽음은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데오르곤의 비위를 맞추려면 뭐든지 줘야 했으니까.
마부는 이내 기운을 차렸다. 그는 다시 도착한 영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