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96
“시에리. 장기 하나만 보여줘.”
“자, 장기요?”
시에리는 주변의 기대감이 가득한 시선을 보고 쩔쩔매고 있었다. 에이에이나 이브는 둘째치고 시종들이나 기사들도 은근슬쩍 모여서 구경 중이었다. 시에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저……. 찬송가 부르겠습니다…….”
“자, 그만. 여러분. 저 잠깐 나갔다 올 건데. 저한테 잘 다녀오라는 인사 안 해줄 거에요?”
진짜 찬송가 부르면 분위기가 씹창날 것 같았으니 내가 끊어주기로 했다. 시에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를 마주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씩 웃어주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브는 그제야 다시 생각난 듯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 가게?”
“잠깐 엄마 좀 보러.”
이브는 내 엄마라는 말에 고개를 쳐들고 나이를 대충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보자, 우리 신랑 아버지가……. 엘프고……. 신랑 나이가……. 어……. 나이가 엄청 많으신가?”
“몰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시에리도 내 엄마를 본 적은 없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브가 물었다.
“그거 한 번 가본 지역만 등록된다며, 아힐데른에 사시는 거야?”
“뭐……. 그렇지?”
아힐데른이 아니라 대륙 남부에 있었지만 귀찮은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엄마를 만나서 물어볼 건 몇 개 없었다. 대체 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지. 그것만 알면 충분했다. 이브는 말했다.
“나도 같이 갈까?”
“글쎄, 오늘은 뭐 인사드리러 가는 게 아니라. 토벌하러 가기 전에 용건이 있어서 가는 거라. 금방 올 거야. 아마 내일? 내일이면 다시 돌아올걸? 그냥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금방 와야 해?”
이브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수영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부 평야로 갈 때까지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그사이에 빠르게 친모를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에이에이가 물었다.
“그런데 사제님. 그 마차가 원래 충전하는 데 열흘 정도 걸린다고 하셨잖아요. 저번에 마력석도 다 썼고요.”
“그래서 소야 편으로 마력 석을 주문했어요. 충전 효율이 제가 원래 쓰는 것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충전은 되더라고요.”
알리오 페스타의 마차를 정상적으로 충전하기 위해서는 영지 한 달 예산 분량의 마력석이 들어갔다. 덕분에 마차 트렁크에는 마력석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손해는 뼈 아팠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티한테 하나 더 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그건 좀 데오르곤스러우니까.
“그럼 다녀올게요.”
“잘 다녀오세요.”
시에리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시에리에게 씩 웃어주며 레버를 당겼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어지럽게 흩어지더니, 마차가 바닥에 쿵, 떨어졌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거대한 절벽이었다. 원래 있던 도로를 깎아낸 듯, 바닥은 흙투성이였다. 나는 마차 바퀴마저 푹푹 빠지는 불쾌한 바닥에서 발을 뽑아내고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뭔 냄새야 씨발.”
나는 코를 감싸 쥐고 눈을 찌푸렸다. 사방에서 썩은 달걀 냄새가 났다. 바닥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에 가까이 가면 매캐한 냄새가 더욱 짙게 났다. 동네 전체가 가스로 뒤덮여있는 듯했다. 나는 일단 마차를 끌고 이 지역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뒤쪽으로 마차를 쭉 물리고 나니 땅이 평탄하고 가스가 옅은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혹시 몰라서 아예 산기슭 동굴까지 마차를 끌고 가서 숨겨두었다.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가스가 흘러넘치는 지역이었다. 마차가 터지면 돌아갈 길이 막막해졌으니 신중에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나는 마력석을 배터리에 박아두고, 다시 조금 전에 도착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짙은 녹색의 진흙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절벽의 아래쪽을 슬쩍 내려다보면 바닥에서부터 짙은 연기가 꾸역꾸역 솟아올라 오고 있었다. 바닥에서 솟는 연기는 이 주변에서 치솟는 연기와는 질이 다른 짙은 농도의 메탄가스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걸음을 계속 옮겼다. 이런 데서 사람이 산다고? 샐리나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메이가의 맹세는 그만큼 절대적이니까. 하지만, 여기에 인간인 루시우스의 친엄마가 살고 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누구냐?”
답답한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서 있었다. 러시아에서 주모 생활을 해봤을 법한 듬직한 체구와 훤칠한 키는 그녀의 종족을 의심하게 했지만, 상태창으로 확인한 결과 확실하게 여자였다.
[이름: 페타 마리나소속: 유황지대의 마지막 주민]
그리고 ‘페타’ 성을 달고 있는 여인이기도 했다. 나는 경계심에 찌들어있는 그녀에게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어, 어머니?”
“……페타 루시우스?”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호랑이 같은 눈빛에는 어느새 수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우직한 생김새다운 무뚝뚝한 어조로 골짜기 끝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일단, 올라가서 이야기 하자꾸나.”
나는 그녀를 따라서 길을 올랐다. 골짜기 끝자락에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페타 마리나는 산길을 오르며 내게 물었다.
“동네 냄새가 지독하지 않니?”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향기롭기만 한걸요.”
페타 마리나는 내 아양에도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다. 씨발 너무 오바했나. 아무리 그래도 유황 냄새가 향기롭다는 건 무리수였나? 페타 루시우스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았는데?
“…..무슨 일로 왔니?”
골짜기에 절반쯤 올랐을 무렵에 페타 마리나가 내게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아힐데른에서 우연히, 제가 메이가의 맹세라는 것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렇구나.”
페타 마리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의 어조는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감정적인 동요가 엿보였다. 그녀는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내’ 과거에 대한 실마리가 엿보이는 듯했다.
“메이가의 맹세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지. 그런데, 그 전에 네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는 게 좋지 않겠니?”
“제 아버지의 묘지요?”
샐리나는 시리우스의 묘지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안 가볼 이유가 없었다. 묘지에도 어떤 힌트가 숨겨져 있을 수 있었으니까. 페타 마리나의 무뚝뚝한 목소리 뒤로, 근육질 팔이 다시 한번 더 골짜기의 끝을 가리켰다. 손가락은 작은 오두막 뒤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페타 시리우스 님의 묘지. 먼저 올라가 있겠니?”
“네. 알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깐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오두막 뒤편 골짜기 끝에 십자가가 박혀있는 걸 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한때 마왕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사내의 묘가 있었다. 초라한 십자가 위에 페타 시리우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게 정말 그 영웅의 묘가 맞는 걸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로 페타 마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뭔가를 읽다가 구겨서 던지더니 뒷문을 통해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두꺼운 외투를 하나 걸치고 있었는 데 움직이는 걸음걸이가 아주 묵직해 보였다.
“시리우스 님은 이 골짜기 아래에 묻혀계신단다. 뼈를 갈아서 골짜기에 뿌렸지. 루시우스. 나랑 같이 기도하지 않겠니? 그다음에 이야기하자꾸나.”
못 해줄 이유는 없었다. 내가 골짜기 끝에 다가가자. 그녀가 살짝 몸을 떨었다. 내가 어중간하게 멈춰 서자 페타 마리나는 말했다.
“조금 더 앞으로 가보렴. 아버지께 네 얼굴을 보여드려야지.”
나는 바보가 아니다. 페타 마리나는 다급해 보였다. 몸을 살짝 떨고 있었고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갔다.
“더.”
다시 한 걸음
“더……. 더, 가보렴…….”
그리고 다시 한걸음 내딛는 순간,
치-익.
뒤에서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외투를 허공에 던진 페타 마리나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몸에 폭약을 둘둘 두르고 있었다.
“죽어라! 악마! 시리우스 님을 대신해서 너를……!”
심지에 불이 붙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서 그녀를 피했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페타 마리나는 공중에 떠서 황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게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
비명과 함께 페타 마리나의 모습이 골짜기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짙은 메탄가스 속에서 푸른 불꽃이 번쩍 빛나더니, 하나에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서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옥의 강이 넘실대는 듯한 화염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나는 페타 마리나의 집으로 들어왔다. 정갈한 가구 한가운데에 이질적으로 구겨진 편지가 있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와서 이 편지를 봐주길 바란 듯 마당 한가운데에 매우 수상하게 내던져진 편지였다. 편지의 첫 문장은 누군가가 마리나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이 편지의 주인이 페타 시리우스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천신교의 성직자로서 나는 도저히 내 아들을 죽일 수가 없었단다. ‘남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라는 경계하기에는 정당해도 누군가를 죽이기에 옳은 말은 아니니까. 그래서 마리나. 나는 내 아들에게 메이가의 맹세를 쓰기로 했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지.메이가의 맹세가 뭐야? 라고 스스로 물어볼지도 몰라. 하지만 이게 무엇인지 너에게 알려줄 수 없단다. 네가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오로지 ‘메이가의 맹세’라는 단어 하나야. 나는 내 아들에게 메이가의 맹세를 쓸 예정이야.
마리나. 지금 나는 아힐데른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싣고 내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단다. 너는 내 충실한 시종이었지. 너에게도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렴. 만일 네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면,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단다.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 이게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지? 어떻게 한 명의 인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하지만 마리나. 믿어주렴. 이걸 위선이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나는 내 아들을 도저히 죽일 수 없었어. 그래서 마리나 너에게 조금 무겁고 힘든 부탁을 하고 싶구나.
마리나. 이 아이의 엄마가 되어줄 수 있겠니? 이 아이를 돌봐달라는 말이 아니야. 이 아이와 만나야 한다는 말도 아니란다. 이 아이의 명목상의 엄마로서 아힐데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줄 수 있겠니? 그리고 언젠가, 너를 찾아온 내 아들 루시우스를 맞이해줄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