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37
“들어오거라.”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문이 열렸다. 여왕의 근위병들이 공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례했다. 공주는 그들에게 화답한 뒤 방에 들어섰다. 엘프의 여왕 아힐데른 샐리나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미모를 자랑했다.
긴 금발과 녹색의 눈동자, 그리고 에리나보다 조금 더 큰 가슴은 에리나가 어디서 아름다운 미모를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게끔 했다. 그녀는 도도하게 얼굴을 치켜든 채 근위병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가있거라.”
근위병들이 방 밖으로 사라지자 에리나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여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왕은 고개를 가볍게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신하의 예를 갖춘 뒤에야, 모녀간의 대화는 이루어졌다.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어머님.”
“그래. 에리나. 내 사랑스러운 딸 잘 지냈느냐?”
“네. 어머님.”
에리나를 바라보는 샐리나의 시선은 부드럽고 애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딸을 사랑했고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준비가 되어있는 엘프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얼굴 표정을 엄하게 바꾸고 그녀를 다그쳤다.
“헌데, 공주의 본분을 잊고 성을 뛰쳐나가다니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 네 행동으로 인해 걱정하는 이 어미의 심정은 알지 못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어머님. 저는, 저는 그래도 제 신랑은 제 손으로 고르고 싶었습니다.”
에리나가 고개를 숙이자 샐리나의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어쨌든 상처도 없었고 무사히 돌아왔다. 거기다 마왕이 죽었다는 희소식도 왕국에 날아들었다. 이런 소식만 날아든다면 공주가 벌인 잠깐의 일탈은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나긋나긋한 어조로 에리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 네 심정도 이해한다. 나 역시 젊었을 때는, 신랑을 내 손으로 골라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우리는 왕족. 왕족은 강한 사람과 정을 맺어서 그 누구보다 강인한 씨를 잉태해야 한다. 우리가 강하지 않으면,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지 않으면, 누가 우리 엘프들을 이끌겠느냐?”
“맞는 말씀입니다. 어머님. 그래서, 저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않을만큼 강한 신랑감을 구했습니다.”
“신랑을 구했다?”
샐리나의 입술이 잠깐 비틀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체 누가 에리나의 마음을 취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든단 말인가? 샐리나는 책임감을 운운했지만, 그녀 역시 에리나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금쪽같은 자식이 얼뜨기와 엮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 어디서 만난 누구더냐?”
“마왕을 물리친 용사. 에이에이입니다.”
“에이에이?”
샐리나는 의외의 인물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왕을 물리친 용사라면 엘프 왕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훌륭한 자식을 낳을 수 있었다. 샐리나는 에리나의 선택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론 금쪽같은 딸을 남한테 줘야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애초에 마왕을 물리친 용사를 남편으로 삼자는 안건을 회의하지 않았던가. 샐리나는 딸을 줘야한다는 아쉬움과, 용사를 남편으로 점찍어 데려온 에리나에 대한 기쁨이 동시에 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혼란스러움을 숨기며 물었다.
“그래. 확실히, 마왕을 물리친 용사라면 그 누구보다 강인한 인물이지. 이견은 없다. 헌데 왜 그렇게 불안한 얼굴을 하느냐?”
하지만 샐리나는 자신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에도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가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잘못을 숨기는 어린아이처럼 샐리나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샐리나는 에리나가 말할 수 있도록 타일렀다.
“화내지 않을테니 말해보거라.”
“그…. 에이에이는 여자…..입니다.”
“뭐?”
샐리나는 뒷목이 땡겨오는 걸 느꼈다. 왕국의 후사를 책임져야 할 엘프 공주가 여자를 좋아한다니.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에리나의 어머니. 차마 사랑하는 딸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화낼 수가 없었다.
“에리나. 우리는 대를 이어가면 왕국을 다스려야 함을 잊은게냐? 여인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느냐? 네 대에서 왕국 왕족의 대를 전부 끊어버릴 생각이냐? 고작 사랑 때문에 왕국의 역사를 희생시킬 생각이라면 난 이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없다.”
샐리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완곡한 단어를 사용해 에리나를 타일렀다. 샐리나가 한마디 한마디 단어를 꺼낼 때 마다 에리나는 바늘에 찔린 듯이 몸을 떨며 움츠렸다. 그리고 에리나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에이에이는 남자가 되는 약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그딴 약이 있을리가 없지 않느냐. 설령 그런 약을 먹고 남자로 변한다고 한들 정상적인 성 기능을 가질거라는 확신은 어디있느냐? 에리나. 멀쩡한 남자를 데려오거라. 여자와의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
“에이에이는 원래 남자였습니다 그러니…..”
“원래 남자였으나 여자가 된건 참 괴이한 일이구나. 하지만 지금은 ‘여자’지 않느냐? 남자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대를 이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사내가 누구보다 강하냐 강하지 않느냐. 나는 이 두가지만 중요하다. 헌데 너는 어찌 여인을 골라서 내 마음을 이리 아프게 하느냐? 내가 에리나 너를 미워해서 결혼을 반대하겠느냐?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그, 그럼…. 그럼 제가 만일 아이를 가졌다면 여인과의 결혼을 허락해주시는지요? 어머님?”
“아이를…..”
샐리나는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원래 에이에이가 남자라고 했으니 그 사이에 관계를 가져서 아이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혼전 임신을 했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아찔했다. 그렇게 헤픈 아이로 키운 적이 없었거늘.
“그래, 그 아이는 용사 에이에이의 아이더냐?”
에리나는 그 말에 눈을 슬쩍 피했다. 샐리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지만,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면 에리나는 임신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른 강인한 사내와 몸을 섞어서 아이를 낳으면, 에이에이와 결혼해도 되냐고 묻는 것일수도 있었다.
“네가 아이를 밴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와 결혼해야 맞다. 엘프 공주의 인정을 받고 몸을 섞을 수 있는 강인한 사내는 그만큼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네 발언은 지금 세상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내를 한낱 종마로 쓰겠다는 것이다. 어찌 그런 막돼먹은 이야기를 하느냐?”
“그, 그렇지만, 상대도 동의했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왜 자꾸 아이를 뱄다는 듯 가정해서 이야기하느냐? 설마…..”
샐리나가 경악에 찬 얼굴로 에리나를 쳐다봤다. 에리나는 자신의 배를 문지르면서 시선을 피했다. 샐리나는 뒷골이 찌를 듯이 아팠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왕좌에 기댄 채 이마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샐리나 생애 있어서 최악의 날이었다.
“아이고…..아이고….내 딸이…. 금지옥엽 키운 딸이 무슨…. 아이고….”
“어머님!”
옥좌에 기댄채 실신할 지경에 이르자, 에리나가 당황한 얼굴로 샐리나에게 다가갔다. 샐리나는 손을 내저으며 에리나가 가까이오지 못하게 했다.
“저리 가거라! 아이고…. 에리나, 네가 어찌 이런 짓을 하느냐? 어찌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느냔 말이다. 내가 너를 미워하여 결혼을 반대하겠느냐? 정녕 네가 아이만 데려오면 내가 기뻐할 것 같더냐?”
옥좌에 기댄 샐리나의 눈가에 눈물이 한방울 뚝 떨어졌다. 에리나는 그 눈물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샐리나가 에리나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더냐? 누가 그 아이의 아버지기에 네가 몸을 내준 것이더냐?”
에리나는 고민했다. 여기서 루시우스의 이름을 대야하는가? 페타 가문의 루시우스라면 샐리나는 옳다구나하고 그를 에리나와 결혼시키려들게 분명했다. 그렇게 결혼하게 되고, 애를 낳게 된다면 에이에이는 에리나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겠지.
배가 부른 상태로 루시우스와 결혼한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에이를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더라도, 루시우스의 이름을 대선 안된다. 에리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 모릅니다.”
“뭐, 뭐, 뭐가 어째?”
샐리나는 다시 옥좌에 몸을 기댄 채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 충격으로 턱 막히던 숨을 분노가 틀어막는 것 같았다.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디서 천사라도 나타나서 네게 애를 주기라도 했다는 소리더냐?”
에리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기로 했다. 어떻게 말해야 위화감이 없을까? 어떻게 말해야 샐리나가 아이의 친부를 찾지도 않고 그냥 에이에이와 결혼을 시켜줄까?
“그…..마왕을 토벌하는 일행 중에 강한 사내가 있길래 제가 유혹해서…..”
“이..이이…이윽….아…아윽…끅….!”
샐리나가 마침내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에리나는 그제서야 그냥 죽었다고 말하면 된다는 걸 생각해낼 수 있었다. 친부가 죽었다고 하면 샐리나도 별 수가 없을게 분명했다. 에리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만 흘리고 있는 샐리나에게 말했다.
“그… 걱정마시지요 어머님. 그 사내는 마왕을 잡다가 죽었으니……”
“조용히하거라…. 내 지금 무엇인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을것 같으니, 너는 우선 방에 돌아가 있어라.”
샐리나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 깃든 목소리로 에리나에게 말했다. 에리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한참동안 옥좌에 기댄 채 분노를 참아내던 그녀는 불현듯 고개를 들고 외쳤다.
“근위병! 근위병!”
그 목소리와 거의 동시에 근위병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황금갑옷이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샐리나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공주가 가출할 당시 공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자들은 지금 어딨느냐!”
“감옥에 있습니다.”
“죄다 목을 잘라버려라!”
그렇게 오늘도 엘프 왕국에선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선상의 흔들림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에이에이는 눈을 뜨자마자 구역질이 치솟는 걸 느꼈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배 안에 묶여있다보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에이에이는 대체 자기가 왜 이렇게 됐는지 다시 한 번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교역도시 에스타에 처음 온 에이에이는 정보 길드와 상인들을 수소문하여 ‘남자가 되는 약’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멀쩡한 여자가 왜 그딴 걸 찾는 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에이에이는 이런 질문들을 대충 둘러대는 것으로 흘러 넘겼다.
그렇게 며칠 간 교역 도시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결과, 에이에이는 자지가 돋아나는 약에 대한 이야기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준 자들은 상당히 질 낮아보이는 엽색가와 뱃사람 무리였다. 그들은 자기 마누라한테 그 약을 먹일거라며 에이에이를 훑어보았다.
에이에이는 그 음탕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배에 타기로 했다. 소문 자체는 사실인듯 제법 여기저기에 퍼져있었다. 에스타에서 배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해적섬이란 곳이 있는데, 그 곳에 사는 물개들의 몸에서 남성기가 생기는 약 성분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이름이 해적섬이죠?”
“해적이 산다던데. 뭐 우리도 이렇게 무기를 준비했고, 자네도 한가닥 해보이니 문제는 없지 않겠나.”
엽색가는 거대한 도끼를 보여주며 당당하게 말했다. 에스타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적섬으로 간다는 그들의 항로를 말렸지만 에이에이도 엽색가 무리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이에이는 마왕을 물리친 용사였고, 엽색가 무리도 제법 단련된 인간들이었으니까.
일개 해적따위가 자신들을 막을 수는 없다.
에이에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으읍….으으읍…끄읍….”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에이에이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배 안의 풍경이 온전히 다 들어왔다. 멀리 감옥 저 편에 엽색가 무리가 꽁꽁 묶여있었다. 손목 정도만 묶여 있는 자신에 비해 매우 가혹한 처사였다.
그들은 이미 잔인하게 구타당한 듯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