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455
“그러게, 다곤이 아니면 누가 우리 용사님 손을 잡아줘.”
분만실 너머에서는 다곤의 촉수를 산모용 줄을 대신하여 에이에이가 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평범한 줄로는 에이에이의 힘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다곤은 기꺼이 촉수를 내주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용사님 것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먹고 싶은 거 물어보고 그때 가져오려고 그랬어. 지금 하나 더 받아올까?”
“아니야. 아침부터 고생했어.”
나는 이브를 한 번 꼭 껴안아 준 다음 다시 분만실을 바라봤다. 이 방은 예전부터 왕비와 공주들이 아이를 낳을 때 쓰던 방이라고 했다. 방 위에 적힌 [사랑과 축복]이라는 표현이 여러 의미를 내포한 것 같아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브가 내게 물었다.
“신랑. 무슨 생각해?”
“되게, 많은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
“우리 신랑. 많은 일이 있었지.”
이브는 아기 어르듯이 나를 껴안고, 내 볼을 한 번 쭉 꼬집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브에게 말했다.
“아빠가 된다는 건 매번 느끼는 사실이지만 기분이 묘하네. 벌써 셋째인데, 분만을 기다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셋째인가?”
“셋째일걸?”
“걔는? 걔 있잖아. 아힐데른 왕자.”
“맞네. 걔가 있었네.”
나는 아힐데른에 사는 내 아들에 대한 친권을 주장할 생각이 없었다. 졸지에 엄마도 아빠도 없는 아이가 된 그 아이의 아빠가 나라고 주장하면, 아힐데른 왕실이 여러모로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10년 내로 망하는 게 확정된 왕국을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아이도 아빠가 필요할 텐데.”
이브가 안쓰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분만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걔도 자기 엄마랑 아빠가 뭐 하고 사는지 모르는 게 나을걸.”
아빠는 임신해서 남의 애를 낳았고, 엄마는 할머니를 따먹다가 걸려서 쫓겨났다. 이런 게 만일 내 가정의 비밀이라면 나는 모르는 게 나았다고 생각했으리라. 이브가 말했다.
“아니, 아빠는 너잖아.”
“대외적으로는 에이에이지. 그리고 애한테 설명하려면 그것까지 설명을 해줘야 한다고.”
“그러네.”
이브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분만실로 향하는 복도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나는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세요.”
“아빠 저에요.”
마틸다였다. 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간이면 마틸다가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짜증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마틸다는 내 시선을 보고 설명했다.
“아, 그게, 오늘 그……. 엄마가 출산 중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냥 출석처리 해주신다고 보내주셨어요.”
“그래?”
아카데미가 이런 융통성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내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이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틸다는 자연스럽게 이브 옆에 앉아서 분만실 문을 바라봤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안에는 못 들어가나요?”
“그렇지.”
마틸다는 안에 들어가서 에이에이의 손을 잡아주거나, 내가 머리채를 쥐어뜯기는 장면을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이에이의 근력은 워낙 출중하므로, 아무리 내가 튼튼해도 그런 걸 해줬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지금 분만실에 다곤과 의사들만 들어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문을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브는 내 옆에서 의자에 기댄 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시에리는 대천신교 경전을 읽고 있었다. 나는 시에리에게 물었다.
“시에리는, 항상 그 경전을 읽고 있네요.”
“네. 재밌어요.”
“저는 예전에 사제장 생활을 할 때도 경전이 재밌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개인적으론 시에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종교가 아니겠느냐마는, 대천신교의 경전은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창세 신화도 없었고, 비유도 없었으며 재밌는 세계관도 없는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대천신교 경전은 성경보다는 살면서 지켜야 할 이야기와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들만 구구절절 적어놓은 도덕 교과서에 가까웠다.
“어라, 그러셨어요? 읽다 보면 재밌어요. 구판과 신판의 경전 교리 내용에 대한 해석 차이나, 신판에서 교정된 글자들을 보는 맛이 좀 쏠쏠하거든요.”
“…..신판에서 교정된 글자를 비교한다고요? 지금 시에리는 신판만 읽고 있잖아요.”
“구판은 다 외웠어요. 여기 보시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재앙에 대하여]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긴 구판에선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죄악에 대하여]라고 표현했어요. 같은 내용이어도 구판에서는 죄악이라고 표현하고, 신판에서는 재앙이라고 표현한 거죠. 옛날에는 사람이 지은 ‘죄’라고 표현했고, 지금은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해석한 거잖아요. 이것보다 더 예전 판인 대천신교 경전 제13 판본에서는…….”
“역시 열심히 공부했네요. 시에리. 자기 일에 그렇게 몰입하는 모습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여서 나는 황급히 중단시켰다. 시에리는 오랜만에 나와 대천신교 경전에 관해 이야기를 해서 매우 즐거운 눈치였다. 소싯적 사제장 놀음을 할 때는 시에리와 함께 경전을 낭독하거나 기도회를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과몰입했다는 걸 깨달은 시에리가 자신이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죠?”
“시에리가 이렇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귀여운 걸요. 옛날 생각나서 좋았어요.”
“귀, 귀엽다니…….”
시에리는 귀엽다는 말에 다시 몸을 비비 꼬았다. 자주 귀엽다고 말해줬는데, 지금 와서 들으니 또 감정이 색다른 듯했다. 엘시가 시에리를 한 번 보더니 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성직자. 나도, 나도.”
“엘시도 귀여워요.”
엘시는 그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나는 그녀의 꼬리를 전등 스위치처럼 쭉 잡아당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꼬리뼈 부분을 살살 간지럽혀주니, 엘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성직자. 여기서 교미하는 건 용사한테 미안하다.”
“…..교미 안 해요.”
이브가 나를 보고 낄낄 웃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변태’라고 발음하는 걸 보고, 나는 살짝 약이 올랐다. 마틸다는 나와 엘시가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브와 더 친해지길 바라는 듯 이브의 손을 꼭 붙잡고 내 쪽으로 끌었다. 이브는 마틸다가 이끄는 대로 손을 들었다.
마틸다는 이브의 손을 내 무릎에 올리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이브는 마틸다를 멀뚱멀뚱 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브랑 이렇게 눈이 마주치니까 기분이 묘했다.
덜컹!
복도 방향의 문이 다시 열렸다. 라이카가 휠체어를 끌면서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부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오는 길에 큰 인어 데리고 온 겁니다!”
셀루는 비몽사몽 한 얼굴로 눈을 비비다가 라이카에게 말했다.
“음……. 뭐야? 벌써 도착했어? 우리 딸 임신 축하해…….”
“엄마 아직 잠 덜 깼구나? 임신한 건 내가 아니라 용사야.”
“맞다. 용사였지……. 헤흐…….”
셀루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휠체어 등받이에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이브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라이카는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용사님. 저기 있습니까?”
“네. 맞아요. 다곤과 함께 지금 아이를 낳고 있어요.”
“걱정됩니다. 수인들은 아이 낳다가 10명 중에 한 명 죽습니다. 용사님도 죽으면 안 됩니다.”
“안 죽어요. 용사님은 튼튼하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분만실 문을 바라봤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몇 시간 씩 기다리면서 피곤함에 절은 얼굴로 앉아있곤 하던데, 나도 그렇게 기다려야 하는 걸까? 셀루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기지개를 켰다.
“아우우…..! 뭐야, 아직 안 끝났어?”
“셀루는 태평하네요.”
“헤흐, 아이 낳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인어들은 이렇게 오래 안 걸려. 알 낳거든.”
“인간은 조금 더 오래 걸리죠.”
“걱정돼?”
나는 그냥 웃어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내 미소를 보고 셀루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다시 한번 복도 방향 문이 열렸다. 에리나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말없이 우리 사이를 지나가더니 분만실 문에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결국, 왔네?”
“조, 조용히 하거라.”
이브가 놀리려는 듯 말을 걸자 에리나가 외쳤다.
덜컹
한바탕 농담이 오가려는 찰나, 분만실의 문이 열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에리나는 먼저 들어가려다가 나를 보고 잠자코 길을 내주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말했다.
“그냥 말로 해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니까 사람 하나 죽은 거 같잖아.”
“아하하하하!”
이브가 내 말에 웃었다. 의사는 머리를 긁적거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합니다.”
의사의 어깨 너머로 땀에 푹 젖은 에이에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아이가 꼭 안겨있었다. 아기의 우렁찬 울음이 분만실 바깥으로 들려왔다.
에이에이와 나의 사랑의 결실이 태어난 지 한 달 째 되는 날. 나는 요람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에이에이는 자신의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젖을 먹이고 있었다. 용사 에이에이의 모유를 먹고 있는 내 아이는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