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476
새벽빛이 창문을 밝혔다. 길게 늘어선 깜깜한 건물들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생긋 솟아오른 햇살이 하늘을 어두운 남색에서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 한가운데에서 아내들에게 둘러싸여서 몸을 비틀고 있었다. 내 팔은 이브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껴안는 베개처럼 꼭 끌어안고 몸을 비비고 있었다.
내 다리는 라이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통나무에 매달린 사람처럼 내 다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내 배 위에는 셀루가 늘어져 있었다. 나는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를 살짝 잡아당겨서 내 배 위에서 끌어냈다. 셀루가 철퍼덕, 매트리스 위로 떨어졌다.
셀루가 매트리스 위로 떨어지자 엘시가 화들짝 놀라서 꼬리를 곤두세웠다. 하지만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다시 움직일 기색은 없었다. 나는 엘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줬다. 엘시는 기분이 좋은지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며 내 쪽으로 조금 기어왔다.
다음에는 다리 차례였다. 아직도 다리를 꼭 붙잡고 있는 라이카를 슬며시 떼어내서 이브에게 붙여주었다. 이브는 잠결에 더듬거리며 라이카를 꼭 끌어안았다. 라이카는 혀를 쭉 내밀고 습관적으로 이브의 볼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루시우스님……. 꼭 볼이 셀루 씨처럼 말랑거립니다…….”
“응……. 신랑. 뭔 개도 아니고 왜 볼을 핥는 거야…….”
이브도 잠꼬대를 하는 모습을 보니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가면, 침대 아래에 이상한 자세로 자는 에이에이가 있었다. 몇 번째였을까. 에이에이의 엉덩이를 붙잡고 침대 맡에서 미친 듯이 박아줬었지. 그 자세로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에이에이의 머리맡에는 소야가 누워있었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 반동으로 소야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나는 소야의 가슴을 한 번 주물럭거린 다음 침대에서 떠났다.
소파에는 카린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카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줬다. 카린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 피가 튀지 않습니까. 결대로 깎아내야 피가 나지 않습니다.”
씨발.
나는 슬쩍 카린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TV가 있는 작은 방에는 내 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커피 한 잔을 들고 방 침대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예능이 방송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다시 보기를 통해서 보고 있었다.
“뭐해?”
“TV 봐.”
동생은 짧게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온종일 어떤 소음에 시달려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짐승이야? 뭔 온종일 섹스만 해?”
“쩔지?”
내 말에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렸다. 이 예능 프로그램은 동생이 어릴 적에 매우 좋아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병에 걸려 쓰러지기 전까지는 지상파 드라마와 더불어 동생이 꼭 봐야 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동생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프로그램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때는 동생이 나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비디오 녹화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다시 보기라는 좋은 기능이 있다는 걸 안 뒤에는 그만뒀지만, 그래도 내게도 역시 많은 의미를 가진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오빠. 이거 완결 났대.”
“알아. 너 쓰러지고 3년인가 지나서 완결 났어.”
“예능 프로그램도 완결이 있구나. 난 그런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더라. 어쨌든 끝이 나더라고. 안 끝날 줄 알아도 결국엔 끝이란 글자를 볼 수밖에 없더라고.”
“나, 지금 453화 보고 있어.”
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보기 칸을 보여주었다. 아직 37화가 남아있었다. 나는 말했다.
“많이 남았네. 아껴서 봐. 천천히.”
“지금 보면 너무 아깝잖아. 그만 볼래. 아직 이틀이나 더 남았는데. 오늘 저녁에 가족들 다 모아서 같이 보고 싶어.”
“좋아하련 지는 모르겠다.”
유머라는 건 그 나라의 문화를 반영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런 유머 코드가 먹힐까? 동생이 커피잔을 비웠다. 그녀가 허공에 잔을 던지자 마치 물속에 던진 것처럼 공간 너머로 꼬로록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동생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내게 말했다.
“오빠. 나가자.”
“지금?”
“지금.”
그녀가 어딜 가고 싶어 하는 지는 알고 있었다. 새벽 시간이니,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일 수도 있었다. 동생은 내가 뭉그적거리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오빠, 빨리. 빨리 나가자. 나 이거 하려고 온 거란 말이야.”
“마트는 아직 안 열었을 텐데.”
“편의점은 다 열었잖아. 어차피 내 힘으로 움직일 건데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럼 가자.”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갈 때까지 방 안에는 침묵이 가득했다. 나는 나가기 전에 테이블 위에 간단하게 쪽지를 하나 써두었다.
[오늘도 자유 시간. 저녁때까진 숙소로 돌아오세요.]그리고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방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내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동생이 손짓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동생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
“라면은 매운 거 말고, 이거랑 이거랑. 컵라면도 사고. 만두도 살까?”
“만두도 사. 매운 거 말고. 매운 거 못 드실 테니까. 햄도 사라. 햄이랑 후추랑 그런 거. 통조림도 싹 사고.”
“그리고, 샴푸도 사고 치약도 다 사고. 소화제. 소화제도 싹 사서 쟁여두게 하고. 또 뭘 사야 하나?”
대형 편의점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포스기에 물건을 찍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집는 물건들을 전부 카운터로 가져다주며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숫자를 마주했다.
“물도 사자. 싹 다.”
알바생은 입을 떡 벌린 채 우리가 계산하는 물건들을 가늠하고,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 시간 편의점 앞에는 오가는 행인이 적었고, 우리는 자동차도 없이 도보로 왔다. 몽롱한 시선으로 손님을 받던 알바생은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우리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거 다 어떻게 들고 가시게요?”
“계산부터 해주세요. 혹시 통조림 재고 있어요?”
“아, 네. 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재고도 싹 다 털어주세요. 햄이랑 통조림이랑 라면이랑 전부다. 물도 있으면 해주시고.”
“아, 네. 잠시만요?”
편의점 알바가 창고로 들어가서 낑낑대며 상자를 끌고 왔다. 한가득 실려있는 물품들 위에 또 다른 물건들을 더하니 이젠 정말 두 사람이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물건이 빼곡했다.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물건의 산을 알바가 아찔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동생이 말했다.
“얼마 나왔어요?”
“아, 네. 1,784,530원입니다.”
200만 원이 나왔다는 말에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알바생도 눈을 끔뻑거리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계산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동생은 주머니에서 5만원짜리 돈뭉치를 꺼내더니 계산대 위에 척 올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잔돈은 가지세요.”
그리고 그녀는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툭 쳐서 쓰러트렸다. 아르바이트생이 5만원짜리를 세보는 사이 우수수 쓰러진 상품들은 동생의 아공간으로 쏙 빨려들어가서 사라졌다. 그가 정신없이 돈을 세보고 총액이 200만 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우리는 편의점을 나와서 멀리 걷고 있었다.
잠깐 사라진 손님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던 아르바이트생 역시, 계산된 돈은 178만 원인데 받은 돈이 200만 원이니까 22만 원의 차액을 자기가 꿀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님들에 대한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좀 부자로 보였지?”
동생이 내게 물었다. 누구 동생인지 몰라도 하는 짓이 똑같았다. 나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나 나나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쇼핑을 마친 우리는 멀리 보이는 달동네로 시선을 옮겼다.
수직에 가까운 기묘한 각도와 복잡하고 지저분한 계단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이 계단을 쳐다보면 괜히 숨이 가빠지고 기분이 나빠졌다. 아주 오랜 시간 오갔던 계단이기 때문이었다. 퇴근하는 길에 이 계단을 오르다 보면 그렇게 길이 길 수가 없었다.
동생이 죽고 나서는 이 길을 오르내린 적이 손에 꼽았다. 나갈 때는 오직 술을 사러 나갈 때뿐이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동생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이 거리는 낯설고도 익숙한 곳이었다. 수천 년 전 자신이 고향이었으며,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오랜만이다. 진짜로.”
“주인 아줌마는 잘 계셔?”
“모르겠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남은 돈의 절반은 월세에 털어 넣고 나머지 돈은 전부 술을 마시는 데 썼다. 집주인을 가끔 만나면, 그녀는 동생 죽은걸 어떻게 하냐며 눈물부터 짜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했다. 그녀는 내가 취직이라도 한 줄 알았으리라.
하지만 실상 나는 취직을 하고 미래로 달려나가는 대신 술을 들이부으며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잘 지내시려는 지 모르겠다.”
“그러게. 선물은 마음에 드실까?”
알 수 없었다. 이제 계단을 절반쯤 오르고 있었다. 동생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그러게. 괜히 긴장되네. 엄청 잘해준 아줌마였는데.”
멀리 우리 집이 보였다. 나는 항상 저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불렀었다. 언젠가 정말 우리 집이 되었으면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자기가 이 집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남매에게 월세를 싸게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반찬을 챙겨주기도 했었고, 동생 이야기로 오랜 시간 잡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정말로 저곳은 ‘우리’ 집이었다. 동생과 함께 살고 싶은 우리 집이었다. 동생이 죽는 순간, 남의 집이 되어버린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 집.”
“이젠 아니잖아. 오빠.”
동생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그 말 한마디가 어쩐지 확실한 선을 그어준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지. 이젠 아니지.”
집이 보였다. 집 대문 앞에선 어디서 많이 본 아줌마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계단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남의 집이 아니었다. 여긴 우리 집이었다. 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