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496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공부를 하고 있던 왕은 재무 대신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 같은 안색이라, 나는 저도 모르게 동정심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보리 같은 미치광이가 왕위를 잡는 것보다 지금 재무대신 같은 현실주의자가 권력을 잡는 게 서로에게 훨씬 좋았다.
“폐하. 어찌하여 저를 그렇게 정 없게 부르십니까? 제가 분명히 뭐라고 했죠? 아기 고양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죠. 우리 귀여운 아, 아기 고양이.”
왕의 옆에는 가정교사가 있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수염이 길어서 흡사 관우를 보는 것 같은 드워프였다. 다부진 팔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가 그가 살아온 인생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재무 대신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부끄러워라. 언제나 저를 어여삐 여겨주시는 점, 정말로 감사드리옵니다.”
“아, 네. 당연하죠. 재무 대신. 저도 당신이 좋습니다. 그나저나 뒤의 분은, 혹시 그……. 이번에 찾아오신다던 페타 루시우스 황제 폐하 아닙니까?”
나는 그와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저번 반란 때도 우리들은 왕자와 마주치지 않고 먼저 왕궁을 빠져나갔었고, 왕이 바뀐 뒤로도 서한으로만 소통했지 직접 얼굴을 보진 않았었다. 왕 대 왕으로 그와 얼굴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서 인사했다.
“드워프 왕국의 왕을 뵙습니다. 못 보던 사이에 더 건강해지신 것 같군요. 이제 한 명의 당당한 전사라고 칭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사라니요. 아직 미숙합니다.”
드워프 왕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왕비는 헤벌쭉 웃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드워프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정교사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어찌할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 왕비가 들이닥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데,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셨습니까?”
“사회 역사 전반에 걸쳐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폐하께서는 성군이 되실 겁니다.”
왕비가 끼어들었다. 나는 한 번씩 웃어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왕에게 다가가 한 번 꼭 끌어안더니, 가정교사를 보고 매섭게 말했다.
“뭐하느냐? 당장 나가거라.”
“네, 네!”
가정교사는 관우를 닮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계집애 같은 어투로 대답했다. 가정교사가 사라지자, 왕비는 다시 나를 돌아보고 꼬박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사람을 시켜서 숙소와 만찬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왕국에 계시는 동안 편히 계시지요. 그 언데드 현장은 내일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왕비는 슬쩍슬쩍 왕에게 눈짓했다. 왕은 그녀가 눈짓할 때마다 더더욱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구원을 바라고 있었지만, 남의 왕실의 가정사에 깊이 관여하면, 귀찮아졌다. 나는 그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고 이렇게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군요. 저와 제 동생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뭣들 하느냐! 루시우스 폐하에게 빨리 방을 안내해드려라!”
왕비의 목소리를 듣고 멀리서 시종들이 달려왔다. 동생과 나는 다시 시종을 따라서 움직였다. 동생이 말했다.
“어떻게 할거야?”
“너는 거기 현장 가봐. 나는 시오테르 만나러 갈 테니까.”
“바로?”
“어. 바로.”
“그럼 일은 나만 하라고?”
“내가 시오테르 데리고 바로 현장으로 가면 되지. 그거 줘. 위치 알려주는 거.”
마법 도구 중에서 서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발신기는 매우 흔한 물건이었다. 기사단이나, 특수 부대가 작전을 위해 산개하면, 서로 착용한 발신기를 통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동생은 내 말에 툴툴거리면서도 허공에서 발신기를 하나 꺼냈다. 예쁜 꽃무늬가 수놓아진 브로치였다. 그녀는 그걸 내 가슴에 달아준 다음, 자기 것도 하나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성벽이 높았다. 창문 너머로 아래를 보니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열린 창문의 창틀에 발을 올렸다. 동생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뭐해?”
“뭐하긴. 마누라 만나러 가야지.”
방을 안내받고, 문을 통해 나서는 시간도 너무 아까웠다. 시오테르의 탐스러운 가슴과, 잡기 좋은 뿔, 그리고 탄탄한 허벅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빠 잠깐만…….”
나는 동생이 말릴 새도 없이 창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화들짝 놀란 시종들이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초인이었으니까.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지 않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동생을 쳐다보면 동생의 눈이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손을 뻗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 밖으로 뛰어내렸던 나는 염력을 통해 천천히 동생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동생은 나를 다시 복도에 내려주었다.
말리려던 시종도 어색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피했다. 뛰어내리지 못하고 끌려오니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동생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이상한 짓거리 하지 말고 문으로 나가 문으로. 여기 시종들 다 놀랐잖아.”
“…..하여튼 오빠가 멋있는 꼴을 못 봐요.”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말을 무시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한 번 더 해볼까 싶었지만, 동생이 정중하게 말렸으니 나도 신사답게 매너를 지키기로 했다.
결국, 나는 문을 통해 나갔다. 동생이 위치로 안내받으면 발신기로 신호를 보내고, 나는 그 신호를 따라서 시오테르와 함께 현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온 드워프 거리는 여전히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장사치부터, 대장장이 도제까지 길목을 돌아다니는 인간 하나하나가 백전노장의 관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기 전에 근처 주점의 문을 열었다. 농땡이 치고 있던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다가, 내가 엘프인 걸 보고 혀를 차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주인장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주인장. 여기서 제일 비싸고 좋은 술이 뭐죠?”
“주조 장인 아이드라가 벼려낸 강철주가 좋소.”
“강철주?”
“30년 동안 술만 빚어온 장인 드워프가 만든 술이요. 계속 과실주 같은 기별도 안 가는 술을 만들다가 드디어 오리지널 제품을 내놓았는데, 이게 아주 기가 막힌 물건이지. 함 드셔보시겠소?”
“어디요.”
술집 주인은 마치 수은을 담을 것 같이 생긴 병에 술을 따랐다. 나는 마시기 전에 냄새를 맡아보았다. 색은 투명했는데, 마치 과일주 같은 달콤한 향기가 났다. 나는 그 냄새에 시원찮은 술일 거라 생각하고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한 입 마시자마자, 마치 쇳물을 그대로 벼려낸 듯한 화끈함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동시에 술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나무 향과 달짝지근한 뒷맛이 내 머릿속에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한 잔 더. 라고.
“이거 다 주세요. 여기 있는 거. 다.”
이 정도면 우리 시오테르도 만족할만한 술이 분명했다. 주인은 술을 많이 팔아서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으며 커다란 술통 3개를 주었다. 나는 이 술들을 가지고 가기 위해 수레를 하나 빌렸고 술을 마시던 경비병들은 군침을 삼키다가 다시 자신들이 마시던 맥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정말로 시오테르를 만날 시간이었다.
“어이 엘프. 그건 무어냐?”
코끝이 빨갛고 수염을 짙게 기른 사내가 내게 물었다. 드워프 마부는 힐끗힐끗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여기서 어눌하게 대답하면 나를 두고 도망갈 생각이 만연해 보였다. 우리는 지금 숲으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르고 있었고,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그건 무어냐고 묻잖아. 술인 거 같은데, 우리한테도 좀 나눠줘. 맛만 보고 돌려줄게. 우리 엘프는 해치지 않으니까. 곱게 술만 내놔.”
인적없는 숲속에서 수염을 기른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산적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류인 듯했다. 술을 돌려줄 생각도 없었고, 나를 해치지 않는단 말도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들에게 정중히 돌아가라 권고하기 위해 마부가 쓰고 있던 철제 투구를 집어 들었다. 마부는 갑작스럽게 내가 자기 모자를 벗기자, 매우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말 없이 투구를 붙잡고 조금 전에 내게 교섭을 시도했던 산적을 향해 집어 던졌다. 겉으로 보기엔 대충 집어던진 것 같았지만, 나름 이를 악물고 던진 한 방이었다. 내 손에 들려있던 쇳덩이는 포탄처럼 드워프들을 꿰뚫었다.
“어?”
옆에서 자기들 두목의 언행이 매우 유머스럽다는 듯이 낄낄 웃고 있던 부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굴에 따뜻한 피와 고깃덩이가 튀었기 때문이었다.
쾅!
조금 떨어진 뒤편의 숲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아름드리나무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맨 뒤 가장자리에 서 있던 산적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숲을 바라보았다. 숲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게 정중한 제안을 했던 산적은, 하반신만 서 있고 상반신이 갈가리 찢겨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산적이 서 있던 위치에서 정확히 일직선으로 서 있던 모든 산적이 똑같은 모습으로 하반신만 남아있었다. 약간의 각도 차이에 따라서 옆구리나 갈빗대가 조금 남아있는 산적들이 있었으나,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살아남은 산적 부하는 제 얼굴에 묻은 핏자국과 지저분한 고깃덩어리들을 떼어냈다.
“으……. 으……!”
그리고 전사 중의 전사라는 드워프답지 않게 계집애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꺄아아아아아악!”
“괴물이다! 괴물이다!”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그의 비명이 출발 신호가 된 것처럼 다른 드워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부는 그 자리에서 몸을 벌벌 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수레 뒤편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출발하세요. 마부.”
“네, 네!”
마부는 드워프답지 않은 공손한 언행과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며 고삐를 붙잡았다. 나는 숲이 가까워지는 걸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차 바퀴에 시체들이 걸리면서 덜컹거렸다. 나는 마부에게 물었다.
“바퀴가 더러워져서 어쩌죠?”
“씻으면 됩니다! 마음 쓰지 마십쇼!”
나는 그가 괜찮다고 말했으므로 수레가 더러워진 부분에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보다는 내 옷에 피가 튀진 않았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우리 시오테르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숲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푸른색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붉은 눈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나무 밑동을 손으로 붙잡은 채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렴풋한 살기를 감지한 내가 손을 흔들었다. 잠시 우리를 쳐다보던 그녀는 내가 손을 흔들자, 이내 나를 알아보고 방긋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흔들리나 싶더니, 어느새 우리 앞에 다가와서 마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부는 뒤늦게 자신의 옆을 쳐다보고 화들짝 놀랐고, 나는 시오테르에에 밀려서 술통 사이로 쓰러졌다.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루시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