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507
“저, 혹시 갈아입을 옷이나 다른 걸 좀 준비해야 하나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섰다. 시에리는 나와 나란히 걸으며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응접실에서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응접실은 방음이 잘되어 있고 가구도 예뻐서 여러모로 애용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을 튕겼다. 응접실에서 청소하던 하인이 바삐 움직이며 내 앞에 펜과 종이를 대령했다. 나는 펜을 들고 시에리에게 말했다.
“우리 시에리는 몸만 오면 돼요. 그럼 시에리. 우리 어디 가고 싶은 지 한 번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이, 이야기요? 음……. 그럼…….”
시에리는 지구를 가기 싫어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구에 무지 가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 있었다.
“음, 공원 같은 곳에 가보고 싶어요.”
“공원이요? 놀이공원?”
“노, 놀이공원은 뭔가요?”
시에리는 정말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말했다.
“다양한 놀이기구들이 있는 공원이죠. 가면 퍼레이드 하는 인형 옷들도 있고 전기로 움직이는 신기한 탈것들도 있고,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 곡예사들도 있어요.”
“듣기만 해도 재밌을 것 같아요.”
시에리가 반색하며 좋아했다. 이야기만 들어도 이렇게 좋아하는 데, 지구에 안 데리고 갔을 때 얼마나 서운했을까.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한 번 꼭 안아줬다. 시에리는 내가 갑자기 부둥켜안자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구, 루, 루시우스? 왜 그래요? 혹시 놀이공원 이야기 거짓말이에요?”
“…..아뇨. 그냥 시에리가 귀여워서 한 번 끌어안아 봤어요.”
“…..바보.”
시에리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뚝을 톡 때렸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에리와 이야기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내 동생이 고개를 들이밀고 내게 말했다.
“오빠. 우리 가는 날에 강변에서 불꽃 축제한다는데?”
“아, 그래? 땡큐.”
“그래. 그럼 수고.”
동생은 할 말만 전해주고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쓸모가 있다더니 살인과 흉계 밖에 꾸릴 줄 모르는 내 사악한 여동생도 이렇게 쓸모가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시에리가 물었다.
“루시우스. 그런데 불꽃 축제가 뭔가요?”
“불꽃 축제가 뭐냐면…….”
나는 손가락 끝에 신성력을 모았다. 아주 작은 구 형태로 모인 신성력을 창밖을 향해 조준했다. 딱밤 날리듯이 손가락을 모아 가볍게 튕겼다.
팡!
웅장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우그러졌다. 창틀이 통째로 뜯겨 날아가고,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굉음과 함께 하얀색 구체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시에리는 귀를 틀어막고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내 손가락과 박살 난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구체가 일그러지더니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바로 전에까지 아름다운 별이 보이던 고요한 밤하늘이 하얗게 물들더니 도시 전역이 밝게 빛났다. 일순간 대낮처럼 환하게 빛난 밤하늘은 폭발이 시작된 순간만큼이나 빠르게 어두운 색상으로 물들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 그리고 왕국 저편 경계 수비대에서 경계병이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땡그랑-. 땡그랑-.
“비상! 비상! 적습이다!”
근위병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철갑옷을 이고 이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였다. 선두에 있는 건 벨릭스 카린이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응접실 문을 열며 외쳤다.
“루시우스 님! 괜찮……. 으시군요.”
그녀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내 안위를 확인했다. 그녀는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만족한 듯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문간에 몸을 기댔다. 뒤이어 에이에이가 칼을 들고 황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목욕하고 있었던 듯 머리는 젖어있었고, 갑옷도 대충 걸쳐서 여기저기 비틀어져 있었다. 그녀는 칼을 뽑아 든 채 카린 옆에 나란히 서서 내게 외쳤다.
“사제님! 무사……. 하시네요.”
다음으로 찾아온 건 엘시였다.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에이에이의 옆에 서며 외쳤다.
“늦어서 미안하다! 성직자는 괜찮……. 다.”
그녀는 내가 위험하지 않아서 조금 김 샌 얼굴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창문 간에서 무엇인가 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에리는 화들짝 놀라서 창문을 쳐다봤다. 창문 너머에서 사방에 촉수를 달고 있는 여인이 휘청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굉음이 들려서 왔건만, 무사해서 다행이다.]시에리는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나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흠, 아무 일도 없으니까. 가서 일들 보도록 하세요. 시에리랑 대화 중이었어요.”
“성직자. 아무리 화나도 수녀를 때리면 안 된다.”
“….안 때렸어요.”
엘시는 방의 상황을 그렇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오해를 정정해주고 사람들을 하나씩 돌려보냈다. 카린은 내가 무사하면 됐다며 나를 한 번 꼭 안아주었고, 에이에이는 칼을 집어넣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나요?”
“힘 조절 실패?”
“……시에리 씨를 때리시면 안 돼요.”
“….안 때려요. 뭘 좀 보여주다가 힘 조절 실수한 거예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시에리는 매 맞는 아내가 잘 어울리는 타입이긴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시에리를 때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에이에이에게 오해를 정정해준 다음 그녀도 내려보냈다. 다곤은 그사이 마법을 사용해서 창틀을 복구하고 있었다. 박살 났던 유리 조각이 다시 붙는 모습을 보며 시에리가 말했다.
“마법 같아요.”
“마법이니까요.”
다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고친 뒤 촉수 하나를 내밀어서 내 쪽으로 뻗었다. 나는 촉수에 입을 맞춰준 다음 다곤에게 말했다.
“다곤, 오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다곤은 그 말에 촉수로 제 몸을 휘감으며 부르르 떨려고 했던 것 같았다. 나는 일단 그렇게 추측하기로 했다. 제 몸을 촉수로 휘감느라 담벼락에 매달릴 촉수까지 전부 써버려서 곧바로 추락했으니까. 그녀가 곤두박질치자 화들짝 놀란 우리는 창문을 열어서 내려다봤다. 밑에서 다곤이 촉수를 흔들며 자신은 괜찮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획은 그때 가서 정하는 게 낫겠네요.”
“네. 그래요.”
“그럼 내일 볼까요?”
“네.”
시에리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시에리를 한 번 더 꼭 안아준 다음 그녀를 방에 데려다주고,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조금 전 여파로 굉장히 분주했다. 나는 지나가는 근위병에게 물었다.
“아직도 뒷수습이 안 됐나요?”
“아, 폐하 그게…….”
근위병은 내게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발을 꼼지락거리며 꾸물거렸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근위병의 뒤에는 황폐한 안색의 노인이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그는 악다구니를 쓰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놔라! 이놈들아! 놔라!”
“근위병. 저 사람은 누구죠?”
“네? 아니, 그……. 선왕입니다. 오늘 소란을 틈타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혔습니다.”
못 보던 사이에 왕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밥도 꼬박꼬박 주는 데다가 생활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고 있는데 왜 살이 빠지는 걸까? 왕은 나를 쳐다보고 소리를 질렀다.
“네 이노오오오옴! 내 딸은 어딨느냐! 이 추잡하고 더러운 짐승 놈아! 내 딸을 어쨌냔 말이다! 난 내 딸을 봐야겠다! 빨리 내 딸을 내놓아라!”
“아, 맞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공주가 겨우 생각났다. 통치에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공주. 왕은 내 반응을 보고 더욱 더 격앙된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이 노오오오옴! 아 맞다? 아 맞다아? 어찌 그딴 망발을 할 수 있냔 말이다! 내 딸을 어쨌느냐! 어쨌냐고 묻지 않느냐!”
“살아있나요?”
내 질문에 근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매우 건강하게 살아있습니다. 삼시 세끼와 위생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일주일에 한 번 면회 정도는 시켜주세요. 당신은 이제 좀 살 좀 찌우시고요. 그렇게 수척하면 제가 고문이라도 한 줄 알잖아요.”
나는 왕의 어깨를 두드려준 다음 방으로 돌아갔다.
쾅!
굉음과 함께 성 전체에 무형의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침대에 누워있던 셀루가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브는 시큰둥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마틸다도 화들짝 놀라서 이브에게 말했다.
“저, 저기 엄마. 밖에 큰일 난 거 아니에요?”
“응? 뭐가?”
“방금 굉음 났잖아요.”
“신랑이 사고 쳤나 보지. 괜찮아.”
“그, 그럴까요?”
“아니면 소야가 사고 쳤던가. 아, 옛날이 그립네. 저택에서 큰 소리 나면 무조건 우리 신랑 아니면 소야였는데.”
“가끔 나도 있었어.”
“엄마 그런 건 자랑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