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509
시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우스가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자물쇠가 걸렸다. 루시우스는 시에리가 자물쇠에 건 문구를 보고 싱긋 웃었다.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카페에 앉아서 혼자 카페 라떼를 시킨 에반젤린은 TV를 보고 있었다. TV에는 어디서 많이 본 근육질 사내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 복싱 영웅! 김상태 선수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헤엄쳐서 복귀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록은 단 30분! 아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네.”
행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노란색 외투를 입은 중년 남자가 허허 웃으며 앞으로 걷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서 5살짜리 어린 아이가 쫄래쫄래 달려가다가 넘어졌다. 아이가 넘어지자마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고.’라고 외치며 대신 아파해주고 있었다.
바로 뒤에 따라오던 아이의 엄마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일으켰다. 울음을 참기 위해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고 나는 킥 웃고 말았다. 나만 웃는 게 아니었다. 다시 되돌아온 아이의 아버지가 등을 감싸며 번쩍 들어 올렸다. 그들은 토닥이는 소리와 함께 축제 광장 저편의 가게 조명 사이로 파묻혔다.
그들이 완전한 그림자로 사라지기 직전에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노란색 수레를 덜덜거리며 끌고 다니는 군밤 장수였다. 그는 까만색 뿔테안경을 쓰고 짙은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팔은 끝까지 걷고 있었으며 전완근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군밤 수레에서는 시끄러운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다가 시에리와 눈이 마주쳤다. 시에리는 군밤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군밤 하나 먹을래요?”
“네.”
시에리는 정말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사양했을 그녀는 고개를 황급히 끄덕이고는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귀여워서 얼굴을 한 번 콕 찔러주었고, 시에리는 내가 찌르는 대로 고개를 기울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밤 장수는 외국인이 와도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뒤를 돌아보면 시에리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불꽃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이 공원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어서, 누군가는 자리를 맡아두고 있어야 했다.
“얼마에요?”
“네 한 봉지에 4,000원입니다.”
나는 군밤 4,000원어치를 사 들고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가 유행가 너머로 흩어졌다.
잠깐 사이에 벤치 앞에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8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있는 어떤 아줌마가 시에리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매우 억척스러운 인상을 가진 여자였는 데, 머리는 수세미 같이 파마를 했고, 얼굴은 세상의 모든 불만을 다 가진 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시에리에게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애가 다리가 아프다잖아요. 네? 어른이 양보하라고 했으면 양보를 해야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어?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어른들한테 자리를 양보해주는 게 또 예의고 매너에요. 매너. 어? 알겠죠?”
시에리는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아줌마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사이, 아이는 칭얼거리며 제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엄마아, 나 다리 아파! 여기 앉을래! 앉을래애!”
“얘는! 지금 엄마가 이야기하고 있잖아!”
“다리 아프단 말이야! 아파아!”
아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가로등 사이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행인들의 시선이 전부 우리에게 집중됐다. 꼬마는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고, 아줌마는 억센 팔로 제 아들을 끌어당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시에리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 예의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시에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아이를 보았다. 그녀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그래도 그. 애가 이렇게 아파하는 데…….”
“힐.”
나는 손을 뻗어서 꼬마에게 힐을 걸었다. 조금 전까지 죽을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칭얼거리던 아이는 갑작스럽게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엄마에게 외쳤다.
“엄마! 나 다리 안 아파! 나 놀이터 가서 놀래!”
“얘는……. 아니, 엄마가 지금 자리 맡아주려고 하는 데 또 왜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 어? 어어?”
아이는 금방 기운을 차려서 되려 제 엄마를 끌고 놀이터 방향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흡사 사람을 등에 태우고 달리는 멧돼지 같은 모습이었다. 일시적인 기운 회복이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힘이 빠지리라. 나는 군밤을 입에 하나 집어넣으며 말했다.
“됐죠? 저 애는 다리 안 아프고. 우리는 여기 앉아서 불꽃놀이 보고.”
“그렇네요.”
스마트폰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었다. 검은 강변에 오리배가 주인을 잃은 채 부유하고 있었다. 오리배의 주인장이 가게 셔터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배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야외 포장마차 테라스에서 소주를 먹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그 포장마차가 공연장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포장마차에 있는 사람들 역시 ‘불꽃 축제 현장’이라고 적힌 펜스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설무대 위에는 조촐한 발언대와 사회자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합창단처럼 줄지어 앉아있었다. 하나같이 늙고 지루하게 생긴 인간들이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자기 자리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입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것만 봐도 그랬다.
시에리는 말했다.
“어쩐지 이런 축제는 처음이라서 긴장돼요.”
“저도 이거 직접 봐본 적 없었어요.”
어릴 때는 불꽃 축제가 뭐가 좋은지 몰랐고, 나이 먹고는 갈 시간이 없었다. 시에리는 내가 여길 와본 적 없다고 하자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주고 그녀의 입에 군밤을 물려주었다. 시에리는 먹이를 받아먹는 금붕어처럼 군밤을 입에 쏙 집어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나는 볼을 꼭 꼬집어줬다.
첫 번째 불꽃과 함께 잔잔한 음악이 피어올랐다. 하늘 위로 날아오른 실선이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파장이 되어 넓게 퍼져나갔다.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진 불꽃들이 매캐한 연기와 회색빛 그림자로 남아 구름 위로 날아갔다.
사라진 불꽃의 흔적을 다시 되새김질하려는 듯이, 연이어 다채로운 실선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시에리는 첫 번째 불꽃이 터지는 것만큼이나 표정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불꽃놀이와 시에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커다란 불꽃이 터질 때마다 웃고, 놀라고, 또 움찔 떨기도 했다.
“마법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판타지 세상에 살던 사람에게 그런 평가를 들으니, 내가 만든 게 아니더라도 묘하게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음악에 맞춰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별만큼이나 빛나는 불꽃들이 아름답게 일순간을 채우고 있었다. 시에리는 자연스럽게 나와 팔짱을 꼈다. 나는 그녀에게 어깨를 기대보았다. 시에리는 내 행동에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되려 자기가 기대겠다는 듯이 고개를 더 밑으로 파고들어 왔다.
나는 시에리와 소싸움을 하는 것처럼 머리를 마주 비비다가,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주었다. 시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대고 내 등을 쓸며 말했다.
“루시우스.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시에리.”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을 해도 재미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불꽃이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마지막 불꽃이 타오른 저녁 하늘은 다시 천천히 본래 색으로 물들었다. 시에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음악이 그치는 것과 동시에 꿈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인근 포차나 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에리는 아직도 회색 연기가 무르익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쉽네요. 돌아가면 못 보니까.”
“왜 못 봐요. 애쉬나 아티한테 해달라고 하면 돼죠. 가끔 해요. 우리. 오케스트라도 늘어놔서 음악도 틀고 마법으로 더 화려한 불꽃도 터트리고. 좋죠?”
“그럴까요?”
시에리는 불꽃놀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하늘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고,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떠나고 있었다.
나는 시에리에게 물었다.
“시에리. 특별히 원하는 플레이 있어요?”
“원하는 플레이요?”
그녀는 한 박자 늦게 내 말을 이해하고 몸을 비비 꼬았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그, 그……. 오늘 멋있는 것도 보여주셨으니까. 워, 원하시는 건 다 들어드릴게요.”
나는 모유 플레이를 떠올렸지만, 아쉽게도 아직 시에리는 아이가 없었다. 빨리 임신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신 나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시에리는 그 미소를 보자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너, 너무 이상한 건 안 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번에 이브 씨랑 하셨던 상황극 같은 거요.”
“아.”
나는 탄식을 참을 수 없었다. 발레 연습 중이던 발레 부원을 감독인 내가 따먹는다는 상황극. 이브가 연기에 몰입하다가 빵 터져서, 결국 발레복만 대충 입고 섹스하고 말았던 상황극이었다. 사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해보고 싶었다.
“그거 해보실래요?”
시에리는 기겁했다.
“못해요! 민망해서 죽을 거예요!”
“의외로 재밌어요. 용사님에게 시켜보는 게 지금 목표 중 하나에요.”
“…..그걸요?”
“당연하죠.”
“용사님이 가끔은 불쌍해요.”
“운명이에요. 받아들여야죠.”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