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517
“창피하다니까! 빨리 줘!”
“왜 숨기려고 그래. 내가 이거 읽을 때마다 우리 이브 생각에 얼마나 눈물을 글썽이는데.”
“나 안죽었는 데, 왜 죽은 사람 취급해! 빨리 줘! 빨리 줘! 창피하단 말이야!”
“에이,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팔을 들어 올리고 유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흐느적거리며 흔들던 손목에서 바람이 편지를 잡아채 산맥 너머로 날려버렸다.
“어?”
“어어?”
바다가 보이는 산맥 끝자락. 수평선 너머로 하얀 종이가 나풀나풀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허무한 얼굴로 유서를 바라봤고, 이브는 차라리 잘됐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언제적 유서야…….”
“한 4천 년 됐지?”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당연하지. 다른 애들은? 다 일어났어?”
“응.”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인들은 모두 잘살고 있었다. 에이에이는 가끔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치거나 시오테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고, 소야와 애쉬와 아티는 마법 연구에 매일 같이 매달렸다. 엘시는 여전히 우리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이름 좀 외워요. 엘시’라고 말하면 그녀는 뚱한 얼굴로
‘성직자는 성직자다. 인어는 인어고 큰 인어는 큰 인어다. 용사는 용사고 기사는 기사다. 다른 말로 부르라니 그게 더 이상하다.’
라고 대답했다. 라이카는 똑똑해져서 아카데미에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논문을 내고 있었다. 흥미로운 주제와 번뜩이는 재치를 가진 학자 [la. 이카로스]라고 자기 필명도 지었는데, 정작 본인을 이카로스라고 부르면 부끄러워했다.
시에리와 에리나는 소일거리에 몰두했다. 자기들끼리 뭔가 멋진 가구를 만들어보거나 돌을 깎아서 조각상을 만들어보거나 했다. 북부 지방 바자회에 가끔 팔아보기도 하는데, 쏠쏠한 용돈이 된다고 했다.
“뭐야, 아침부터 뜨겁네.”
셀루가 문 너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그녀는 붉은 머리를 빗으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니거든.”
이브가 셀루의 놀림에 웃으면서 반응했다. 셀루는 이브의 반응이 여전히 재밌는지 마주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헤흐했다.
“헤흐.”
이브는 나를 스쳐서 창밖을 바라봤다. 산맥 끝자락에 있는 이 동굴은 바다가 정면에 보였다. 푸른색 수평선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창문 아래층 발코니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아이라와 에밀리아와 카린이 보였다. 아이라는 위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브는 말했다.
“신랑. 요즘 밖에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를?”
산맥 밖으로 자주 나갈 일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산맥 내부에서 우리끼리만 있어도 떠들썩했고, 단체로 놀러 간다면 인적없는 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섹스와 섹스로 이루어진 여행 틈에 세계사 같은 시답지 않은 문제는 낄 여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저번에 아루스가 내 소문을 물었다가 ‘색정왕’이라는 소리를 듣고 충격받은 후로, 나는 밖에다가 굳이 내 소문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이브에게 물었다.
“이브. 그럼 이번에 오랜만에 한 번 인간 왕국에 가볼까? 이브랑 나랑. 에이에이랑. 엘시랑. 응? 다들 뭐 어떻게 이야기 듣고 있는지 한 번 몰래 놀러 가서 들어볼까?”
“신랑. 엘시 임신 중이잖아.”
“아, 그래도 임신 중에 장거리 이동은 좀 그러려나.”
“조금 그렇지?”
“그런가?”
나는 그녀의 말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갈 수 있으려나? 어쨌든 상관없었다. 오늘 여행을 가지 못한다면, 오늘은 다른 행복한 기억을 만들면 되니까. 그리고 내일 여행을 가면 되니까.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다시 거센 바람이 창문 너머에서 불어왔다. 하얀색 종이가 나풀나풀 방 안으로 떨어졌다. 나와 이브는 동시에 종이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어어!”
우리는 한 편의 코미디처럼 허공에 손을 뻗으며 종이를 잡으려 애썼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멀리 창밖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아마도, 하얀색 종이를 가지고 장난치는 바보들처럼 보이지 않을까?
나는 그 생각에 다시 웃음이 났다. 너무 웃느라고 유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브는 유서를 뺏어서 제 손에 꼭 들더니 조심스레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종이 울리고 있었다. 이브는 내게 말했다.
“신랑. 아침 다 됐나 봐.”
“그래. 가자.”
방을 나서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더 빈방을 돌아보았다. 이브는 가구가 녹스는 게 싫다며 다른 방으로 옮겼었다. 유서가 없으면 더 이 방에 올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방문 끝자락에 발을 걸친 채, 다시 한번 더 창문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잘 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거짓말처럼 바람이 그치고, 커튼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나는 방문을 닫고, 내 부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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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이 글을 볼 때 쯤엔, 신랑이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를 잊어버린 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때 그런 여자가 있었지’라고, 추억처럼 이 편지를 읽어줬으면 좋겠어.
신랑. 신랑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신랑이 정말 싫었어. 제멋대로 날 끌고 가고, 엄마를 인질로 삼고, 날 덮치고, 그런데 또 한 편으론 신랑이 날 끌고 간 게 안심이 되기도 했어. 난 정말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이었거든. 항상 배를 타고 선장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조작키 하나 없이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인간인지 인어인지도 알 수 없었고, 도저히 인간을 사랑할 수 없었어.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신랑. 그런데, 신랑이 날 바꿔준 거야. 신랑이 아니었으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인어도 인간도 아닌 것이 교수형 대에 매달려서 썩고 있었겠지. 엄마는 그때도 날 원망하지 않을까? 모르겠어. 신랑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게 하고, 가족이란 걸 만들어줬어.
가끔 이렇게 창가에 앉아서 생각에 잠기곤 해. 나는 신랑에게 뭘 해줬지? 여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조금 싫어지기도 해. 신랑에게 많은 걸 받았는데, 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참 바라는 게 많은 여자였지? 미안해. 그래도 부탁 좀 더 해도 될까? 내가 살아있을 때, 신랑이 하고 싶다고 한 건 다 해줬잖아.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신랑, 내가 죽으면, 사령 마법 같은 건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 영혼만 남아서 서로 애절하게 바라보는 건, 별로 재밌지 않을 거 같아. 그리고 내가 죽은 날에는 정말 바보처럼 울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음 날 말끔하게 털어내고 평소의 신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신랑은 앞으로 살날이 많잖아. 그러니까 날 잊어버리고 계속 사랑하면서 신랑답게 살아줬으면 좋겠어.
미안해. 바라는 게 많은 여자라서.
신랑.
그래도 사랑하지?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