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Character is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61
이른 아침 영주 집무실에 이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시에리는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주 부인으로서 입어야하는 드레스가 매우 불편했다. 발을 가려주기 때문에 맨발로 다녀도 된다는 점은 좋았지만, 치렁치렁한 옷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안녕하세요.”
시에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브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으나 어색한 기운은 한껏 감돌고 있었다. 이브는 손을 흔들며 씩 웃어보였다.
“안녕.”
그 웃음에 시에리는 살짝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브의 눈을 슬쩍 피했다. 이브는 그대로 집무실 의자에 앉았고 시에리는 서류를 가져다둔 채 옆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오늘부터 이브는 영주 대리로서 일할 시간이었다. 페타 루시우스가 인수인계를 해주긴 했지만, 평생 해적이며 노예로 살았던 이브에겐 너무 과분한 위치였다. 여기에 더해 오늘 자신을 보조할 시에리는 매우 어색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어색하다.
이브는 이 방의 공기가 너무 답답하고 어색했다. 이브도 지금 시에리의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평생 자기랑만 떡칠줄 알았던 영주님이 갑자기 외간여자를 데려온 상황이 아니던가. 거기다 그 외간 여자가 자기 상관이 된 상황이었다. 이브는 여기까지 생각해보고 시에리는 참 착한 여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였으면 이 상황에 대해서 욕이라도 뱉었을거다. 시에리 멱살도 한 번 잡아봤을거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꼬장이라도 피웠을게 분명했다.
“음…. 오, 오늘 뭐해야 돼?”
하지만 시에리는 그러지 않았다. 시에리가 너무 착하고 얌전하게 굴고 있으니 이브로서도 막나가기가 껄끄러웠다. 이브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시에리에게 물었다. 영주의 기본적인 스케줄 표는 아이라와 시에리가 들고 있었는데, 오늘 아이라는 다른 일이 있어서 시에리가 그 스케줄 표를 전담 받았다. 시에리는 들고있던 수첩을 펼치며 말했다.
“오늘은 영지 시찰이랑, 결재 서류 정리가 있습니다.”
“영지 시찰?”
“네. 영주님이 이건 꼭 넣으라고 하셨어요.”
“아니 잠깐만, 나보고 영지 시찰을 하라고? 괜찮은 거 맞아?”
이브가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영주가 인정한 대리인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은 달갑지 않을게 분명했다. 이 동네에서 인어는 차별받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 취급을 못받았다. 그런 인어의 혼혈이라고 하면, 서부나 동부 숲지대에서 사는 아인종과 비슷한 취급이었다.
노예로 대우하기 딱좋은 정도. 아니면 먹거나 요리에 쓰기 좋으며 마법 실험 재료로 딱 쓰기 좋은 샌드백.
그런데 루시우스는 그런 이브에게 영지 시찰을 나가라고 한것이다. 이브는 그 단어에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정말 해도 되는 건가? 지금 이브가 느끼는 감정은 마치 부모님이 갑자기 지갑을 통째로 넘겨줬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다. 정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 정말 괜찮은 건가?
시에리가 눈을 깜빡거리며 이브를 쳐다봤다. 이브는 불안한 얼굴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패악질을 부리는 것과 권력과 책임이 따르는 일을 하는 건 조금 차이가 있었으니까.
“진짜, 진짜 괜찮아? 씨발 난리나도 책임 못진다?”
이브는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시에리의 의사를 물었다. 시에리도 사실 지금 이브를 정말 시찰에 내보내도 될지 걱정하고 있었다. 페타 루시우스가 좋은 영주라서 사람들이 결혼 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 뿐이지 사람들이 인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까.
특히 범죄자 출신 인어라면 그 인식은 시궁창과 다를게 없었다. 이브에 대한 편견을 벗어달라고 외치기엔 이브를 둘러싼 소문들은 사실이었고, 사실이라고 믿고싶지 않을 만큼 잔혹했다. 하지만 결국 시에리도 이 영주의 말을 따르는 사람에 불과했다. 시에리 입장에서는 루시우스가 시찰을 지시했다면 반드시 시찰을 해야했다.
“…..그래도…..그….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씨발.”
이브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루시우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지시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자길 놀리려는 건 아닐테고, 대체 무슨 생각일까? 대충 생각해보면, 영지 사람들과 친해져보라고 제안한 것일텐데, 어떻게 생각해도 불행한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도발을 자행한 영지민에게 화가나서 이브가 칼부림을 하거나, 이브와 영지민 사이에 시비가 붙어서 영지민이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브는 찝찝함을 드러내며 시에리는 시찰을 하기로 했다. 로빈이 호위를 위해 기사들을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이브가 거부했다. 이 동네 기사라고 해도 본인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브는 은연중에 누군가 자신에게 달려들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잡다한 뒷말이 안나오게 만들기 위해선 무력 시위를 하는 게 아주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선원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도 선원 중 한 명의 목을 뽑아버리는 묘기를 통해 입을 다물게한 전적이 있었다.
이브는 신발을 구겨신고 외출용 정복으로 갈아입은 뒤 시에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드레스도 벗어버릴까 했지만, 기껏 입으라고 준 업무용 정복이었으니 일단 입고 나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영지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 두들겨맞은 소작농들은 매우 근면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아침부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이브와 시에리가 마을 여기저기를 천천히 돌아보고 있었다.
“아이고, 좋은 아침입니다. 수녀님.”
“네……아, 여기 영주 부인이신 페타 이브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셔야 해요.”
“아, 그렇습니까…. 거, 안녕하십니까.”
엎드려 절받기라는 게 이런것일까. 이브는 시에리가 강권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인사하는 영지민들에게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노골적인 경계와 차별. 이브의 피부에 와닿는 건 지난 몇년간 꾸준히 자신이 목도해왔던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다 족쳐버렸을텐데, 기껏 루시우스가 잘 닦아놓은 영지에서 그런 깽판을 치기는 조금 찔렸다.
“씨발.”
“말을 가려서 해야 돼요. 이브님.”
“그냥 이브라고 불러. 너나 나나 우리 신랑 마누라인데.”
“그, 그건….그러니까 그…..”
시에리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횡설수설했다. 이브는 그 표정을 보고 씩 웃으며 물었다.
“왜. 부끄러워? 응? 우리 신랑이랑 섹스하니까 어땠냐? 존나 잘하지?”
“아, 아으….그, 그만 해주세요. 그, 그런 외설스러운 이야기는….”
“그래서, 좋았어?”
“…..네.”
시에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심에 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니 이브는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루시우스가 가끔 시에리를 놀리는 걸 보고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직접 해보니 재밌었다. 이브는 기분좋게 웃으며 다시 걸어나갔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이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흠칫, 두려움에 떨었다.
이브는 시에리의 등을 툭툭 치며 앞으로 계속 걸어나갔다. 한 번 웃고나니까 영지민들이 뭐라고 말하든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이브는 다시 시에리에게 물었다.
“넌 근데 우리 신랑 뭘 보고 반했냐?”
“그….. 제가 어릴 적에 대천신교 수도회에서 수행을 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그래? 엄청 오래됐네.”
“네. 그래서 거기서도 엄청 재밌게 놀고 그랬거든요. 그….잘생겼고, 착했으니까.”
“그 때 부터 좋아했구나. 우리 신랑 씨발 어릴 때 부터 꾼이었네.”
“그, 그런 생각으로 저랑 놀아주신게 아닐거에요.”
시에리가 루시우스의 인망을 변호했다. 물론 그의 밑바닥까지 본 이브 입장에서는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본 루시우스의 인성에 따르자면 수도회에서도 이미 한 명 정도는 손댔을게 분명했으니까.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그…. 최근에는 저를 구해주기도 하셨구요.”
“구해줘? 뭐에서?”
“제가 원래 여기 영지가 아니라 옆 영지 수도원에서 회계 담당을 하고 있었거든요. 거기 영주가 좀…. 과하게 달라붙었는데, 영주님이 저를 이 쪽으로 옮겨주셨어요.”
“뭐야. 우리 신랑. 너한테 꽂혀있었잖아.”
“그, 그런가요?”
시에리가 얼굴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하지만 시에리는 그러다가도 결국 정실 부인으로 이브를 택했다는 점을 떠올리고 급격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브는 시에리가 하는 생각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난 원래 죽었어야 됐는데, 우리 신랑이 살려준거야. 웃기지? 살인마에 여자들도 막 강간하고 다니는 개년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부인으로 해주겠대. 진짜 이상하지 않냐?”
시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동의해도 이상했고 아니라고 말해도 이상했으니까. 이브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그…. 내가 하고싶은 말이 뭐냐면….. 나는 네가 뭐 정실이 누구냐 그런 거 따진다면 너한테 다 양보할 생각이라고. 응? 무슨 말인지 알지? 어차피 서로 서로 계속 얼굴보고 살건데 그런 좆도 아닌 걸로 싸우면 좀 그렇잖아?”
“그, 그렇죠.”
내심 이브를 질투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시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한듯,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듯 우물거리는 입모양을 보고 이브가 말했다.
“그리고 너랑 나랑 사이좋게 지내면 신랑도 좋아할거라고. 응? 우리 둘이 같이 침대로 가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여, 영주님은 그런 음탕한 분이 아니세요.”
“지랄한다 진짜.”
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에리의 변호를 물리쳤다.
“야. 인어한테 박는 순간 이미 끝난거야 알아?”
“그, 그러니까 그런 음탕한 이야기는…..”
멀리서 병사가 한 명 달려오고 있었다. 이 주제로 더 이야기하려던 이브는 입을 다물고 그 쪽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병사는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숨을 몰아쉬며 경례했다. 대충 인사를 받아준 뒤 이브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지?”
“여, 영주 부인께 보고드립니다. 지금 영지 경계면에서 아무르 영지의 보좌관이 ‘영지 대리인’으로 왔다면서 자신을 빨리 들여보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전혀 들은 바 없는 이야기인지라, 그 어떻게 해야하는 지….”
“뭔 개소리야? 영지 대리인은 나잖아. 아무도 뭐라 안했었는데 이제와서 왜 지랄이야?”
“아, 그러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 쪽에서는 빨리 책임자를 불러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그…. 아무튼 빨리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지 부임 첫날부터 귀찮은 일이 생겼다. 이브와 시에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찌푸렸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페타 영지는 크게 3곳의 영지와 인접하고 있었다. 한 곳은 이전에 루시우스가 머리를 깨버렸던 델몬 영지. 그리고 하나는 현재 몬스터의 습격을 직격으로 받아서 거의 호흡기만 붙여둔 상태인 카이던 영지. 그리고 현재 페타 영지에 ‘영지 대리인’을 보냈다며 난리치고 있는 아무르 영지.
아무르 영지 역시 현재 몬스터 습격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루시우스의 영지에다가 구호를 요청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대리인을 보냈다는 말에 시에리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영지 대리인은 귀족만 가능하다며. 영주 말고 영지 대리인을 세울 수 있는 귀족이 있어?”
“보좌관은 귀족일수도 있어요.”
경계면으로 향하는 길, 이브의 질문에 시에리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