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Heroines are Trying to Kill Me RAW novel - Chapter (392)
메인 히로인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392화(392/524)
Episode 392
“으음…”
“오, 오빠아!!”
“프레이 님!!”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보니, 아리아와 베네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둘다 몰골이 상당히 갈때까지 간 모습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깨어나기 직전의 일들을 상기해보니 표정이 절로 멍해진다.
마왕으로 변한 아이시. 완전히 얼어붙은 서대륙의 항구. 습격 당하던 용사파티.
그런 그들의 앞에 정체를 드러내, 아이시의 공격으로부터 용사파티를 지켜낸 나.
그리고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부작용으로 의식을 잃어가느라 잘 생각이 안난다. 메인 히로인들이 구해온 배에 올라타는게 마지막 기억이였는데.
방에 있는 창문밖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걸 보니, 아직 배 안에 있는것 같다.
“…하하.”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니, 왼팔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있다.
원래라면 상당히 충격을 받았어야 할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얼음 뭉치로부터 아리아를 감싸안은게 꿈이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 뿐.
이제 이런 일에는 별 반응도 없게 된걸까?
하지만 아직 정신력 약화의 저주가 적용중일텐데.
“흑, 흐극… 으으…”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나는, 이내 내 오른손을 잡은채 울먹거리고 있는 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리아, 뚝.”
“흐급, 흡…”
내 동생은 울면 못생겨진다. 저 예쁘장한 얼굴을 왜 스스로 망가트린단 말인가.
“으음.”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동생에게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저 멀리 붙어있던 달력의 날짜를 확인했다.
“곤란한데…”
내가 깨어난 시점은 그날로부터 하루가 지난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은건가.
빠르게 줄어드는 시간이 너무나 야속하다.
“오오오, 오빠. 나나, 나는…”
“진정하렴. 난 괜찮으니까.”
내 눈빛이 살짝 흔들린것을 본 아리아가 다급하게 말을 걸어오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왼팔은 어차피 곧 때어내려 했어. 이미 내 신체가 아니었거든. 그러니 아무 문제 없단다. 오히려 널 지켰으니 다행이지.”
“……….”
“푸흐. 진짜 어색하네. 널 이렇게 대하는게 몇년만이지?”
그 말을 들은 아리아가, 얼굴을 다시 못생기게 만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미안… 미안해애… 오빠…”
“나도 미안해, 동생. 이런 비극에 휘말려들게 해서.”
“흐아아아아앙…”
“울지 말래도.”
이런 날이 오면 하고싶었던 말이 정말로 많았는데, 어째서인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마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느낌이다.
“으극…”
“주, 주주… 죽지마아…”
그렇게 말문이 막힌채 멍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온몸이 울리는 느낌이 들어 인상을 찌푸리니, 아리아가 다급히 나를 껴안더니 눈물을 이곳저곳에 묻히기 시작한다.
“죽으면 안돼…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아… 제발 죽지마…”
“………”
“지, 지금까지 오빠한테 버릇없이 대한거 전부 사죄할테니까… 당주자리도 그만둘테니까아…”
“그만좀 달라붙어.”
“으이이이익…”
그런 녀석의 한쪽 볼을 잡고 늘어트리니, 아리아가 그 상태에서 날 멍하니 쳐다보기 시작한다.
어렸을때 볼이 토실토실한 동생에게 자주하던 장난인데,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난다.
“…사랑해, 동생.”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 없는 동생의 멍청한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나는, 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늘 그녀에게 해주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못난 오빠라 미안했어.”
“흐으으으으…”
그 결과, 나는 다시 동생을 울려버렸다.
끝까지 나쁜 오빠로 남기는 싫은데.
“아리아, 잠시 나가 있어. 식당에서 다시 보자.”
“시, 싫어… 나, 아직…”
“부탁해. 그리고 베네르, 모두와 만나보고 싶은데,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아리아의 등을 토닥이던 나는, 이내 그녀를 방 밖으로 내보내며 베네르에게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더 늦기전에.”
– 두근, 두근…
그와 동시에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신력 저하의 저주로 바닥까지 떨어진 내 정신력이, 나를 멀지않은 죽음에서 비롯된 공포로 밀어넣고 있었다.
모든게 끝나게 될 순간. 모든게 무가 되어 사라질 순간. 그 어떤것도 인식하지도, 존재하지도 못한채 소멸될 나.
“…으득.”
그 사실을 실감하니, 오한이 퍼지며 온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무섭다. 한없이 무섭고 두려워진다. 도망치고 싶어진다.
사후세계도, 두번째 기회도 없는 완전한 소멸의 순간도 무섭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을 두번 다시는 못보게 된다는게 무섭다.
“부탁할게, 베네르?”
하지만 애초에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주접을 떨다니, 우습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런 감정들을 억지로 눌러담고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꺼낸 나.
“”………..””
하지만 방금 전까지 패닉에 빠져있던 모습을 그들에게 들켜버렸다.
베네르와 문 밖으로 나서던 아리아가 날 퀭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잠시후, 조용히 아리아의 등을 떠밀고는 문을 닫은 베네르.
“그래, 그럼.”
“도련… 님.”
문 밖으로 나서는 그녀에게 오른손을 흔들어보이는데, 베네르가 뒤를 돈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녀가 날 도련님이라고 부르니, 왠지 기분이 묘해진다.
“당신이 죽으면, 저도 목숨을 끊겠습니다.”
“…뭐?”
덕분에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영혼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
“주인을 찌른 검이니, 폐기처분 되는게 맞겠죠.”
“잠깐…”
“그럼, 안녕히.”
그 말을 남긴 베네르가, 조용히 방을 나선다.
“”………..””
그리고 찾아온 적막.
“…저기.”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도 없어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안녕… 하세요.”
최연소 성기사가, 눈빛을 황금색으로 물들인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아…”
“궁금한게 있는데 말입니다.”
“네? 뭐, 뭔가요.”
허락도 안했는데 내 방으로 들어서더니, 침대 옆에 앉아 슬픈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한 태양신.
“그 아이의 원래 인격은 신경 안쓰십니까? 평소에도 거의 빙의된 채 지내시는것 같은데요.”
“아…”
그런 그녀에게 늘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어보니, 태양신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을 해온다.
“사, 사실 그것도 저에요. 그게 사실 태양신이 되기 전의 제 모습인지라…”
“네?”
“봉인되어 있던 저를 교단이 신이 되기 전인 과거의 모습으로 이 세계에 강림시킨 거랍니다. 기억만 없을 뿐 어차피 같은 저라 괜찮아요.”
“으음.”
상당히 뜻밖의 사실을 알아낸 것 같다. 최연소 성기사가 태양신의 과거 모습이었을 줄이야.
하긴, 신비해 보이지만 어벙한 모습 또한 부각되긴 했지.
“그건 그렇고, 여긴 왜 오셨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이내 쭈볏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태양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태를… 보러 왔어요.”
그러자, 가라앉은 표정으로 답하는 그녀.
“그래서 좀 어때보입니까? 살아날 가망이라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으니, 태양신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속은 썩어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정신력 저하 저주만 아니였다면, 이정도는 아니였을텐데. 자꾸 누군가에게 못볼 꼴을 보여주게 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한숨을 내쉬며 지긋이 눈을 감은 나는, 태양신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제가 틀린걸까요?”
“……….”
그 말을 듣고, 침묵에 빠진 태양신.
“루비대신 희생한다는 결정이요.”
“음…”
“왠지 모르게 흑막이 제가 루비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녀석의 노림수 같았어요.”
“……….”
“그런데 지금 와서보니, 정말로 이기적이고 한심한 결정 같기도 합니다.”
내가 심장을 꿰뚫었을때, 그 눈동자 녀석의 눈빛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 착각이었을까?
상황이 점점 극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대로 내가 사라진다면 모두가 절망에 빠질 것이다. 당장 방금 전의 베네르만 봐도 알 수 있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말은 싫은데. 내가 한 선택이 정말 맞는걸까?
어쩌면, 내 이기심이 끔찍한 결말을 초래한건 아닐까?
“그건 아니랍니다.”
덕분에 잔뜩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러한 내 표정을 읽은 태양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한다.
“그때 당신이 루비를 죽였다면, 힘을 회복한 눈동자의 본체가 풀려나 다른 차원들로 향했을 거에요.”
“…다른 차원들로요?”
“네, 그리고 지금까지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옛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차원들을 집어 삼켜나갔겠죠.”
“……….”
“저희 차원을 비롯한 모든 차원이 멸망하는 것도 시간문제였을 거에요. 당신이 루비를 죽이고 쟁취해낸 해피엔딩도, 기껏해야 자손 선에서 끝났을 테고요. 사후세계도, 영원한 행복도 사라졌을테죠.”
그렇게 말한 태양신이, 조용히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결국 당신이 옳았어요. 이 차원을 집어삼키는데 더더욱 집착하게 된 눈동자가 아이시에게 직접 깃들었거든요. 드디어 녀석을 무대로 이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거에요.”
“비약입니다. 별의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결과만 놓고 보자고요.”
“결과가 그렇다 해도, 제가 이기적이였다는 건 바뀌지 않습니다.”
비록 그녀는 부드럽게 말해주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진다. 계속 트집을 잡고 싶어진다.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기적이면 좀 어떤가요.”
“……….”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답니다.”
“저는…”
“페를로체와 루비의 리트라이 횟수를 합쳐도, 당신의 리트라이 횟수를 넘지는 못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설정한적도, 설계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늘 선했죠. 그러니 한번쯤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된답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는게 이런 느낌일까.
“제가 사라지면, 모두가 절망에 빠질겁니다. 지금도 조짐이 보여요.”
“……….”
“그리고, 제가 사라지기 전에 미래를 위해 대비를 해야 합니다. 최소한 마왕을 무력화 시켜 놓아야 해요.”
그렇다면, 조금만 더 응석을 부려보자.
하필 그 상대가 태양신인것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제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그러니 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예 없애거나, 뭐 그런…”
“안돼요.”
내 말을 들은 태양신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솔직히 말해서, 전 살고 싶습니다. 방법이 없나요.”
“죄송… 해요.”
“정령이나 동물에 깃들어서라도, 아니면 사념체나 아티펙트가 되어서라도 모두의 곁에 남고 싶습니다. 모두와 끝까지 함께 할수만 있다면 어떤 꼴이 되어도 좋아요.”
그 말을 들은 태양신이 조용히 입을 다문다.
그걸보니, 그 정도는 가능한 것 같다.
그저 내 추측이지만, 아무튼 그래 보인다.
“…아무튼, 모두가 제 공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사라진 세상이 비극을 겪게 하지 말아주세요.”
“노력해볼게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기 시작한다.
“지금은 메인 히로인들이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혹시 그들이 기적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마지막 날까진 기다릴겁니다.”
“네.”
“하지만 시스템이 복구되고 패널티 창이 뜨는 순간, 천년전의 용사파티에게 받았던 조력자 물약을 계속 마셔가며 아이시에게 향할거에요.”
“그렇군요.”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태양에게도요. 될지는 모르겠지만, 흠집이라도 내고 싶네요.”
고개를 끄덕인 태양신이, 어두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본다.
“…일으켜주세요. 잠시 나가봐야 해서.”
그런 그녀에게 오른손을 뻗으며 부탁을 하니, 태양신이 내 오른손을 잡고 침대에서 일으켜 세운다.
“식당으로 가주세요.”
약간 늦은감이 있긴 하지만, 버킷리스트를 최대한 채워보자.
예를 들어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해본다거나.
평범한 아카데미 생활을 해본다거나.
“부탁합니다.”
단 하루라도.
.
한편 그 시각, 서대륙의 드래곤 레어 밀집 지역.
“네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공중에 둥둥 뜬채 다리를 꼬고 있는 완전히 성숙한 모습으로 변한 아이시의 아래에, 새끼 용들이 얼어붙은채 주저앉아있다.
“꼬, 꼬마 마족 주제에…”
“아냐. 마족도 아니다. 반마족에 불과한데… 어째서…”
“도마뱀들이 말이 많구나.”
드래곤 레어 전역을 감싼 냉기에 파르르 떨면서도 여전히 저항의 기미가 보이는 녀석들을 내려다보던 아이시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복종하거라.”
“끄으으으윽…”
“끄어어어어…”
이윽고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자, 심장 부근이 얼어붙어가며 신음을 흘리기 시작한 드래곤들.
“그만.”
그런 그들의 맨 앞에서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던, 몇배는 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드래곤이 진노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간단해. 종족 전체가 내 종이 되거라.”
“무엄한…!”
그 말을 들은 녀석이 눈을 희번득거리자, 손을 더 높이 치켜드는 아이시.
“끄어어어어…”
“끄르르…”
“나와 지금 싸우면, 저 뒤에 있는 새끼용들이 위험할 터인데.”
“놈…”
“네 뒤에 있는 새끼용들이,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들이잖아? 너만 빼고 전부 죽여줄수도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우두머리 드래곤이, 조용히 침음을 삼킨다.
“내가… 뭘 하면 되는거지.”
“간단해. 어디를 좀 습격해줘야겠어.”
그런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이시.
“아카데미를 무너트릴 보스 몬스터가 필요하거든.”
“……….”
“그럼, 잘 부탁해? 아참, 녀석들의 심장은 나만 녹여줄 수 있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그 말을 남긴 그녀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미소를 지으며 드래곤 레어를 벗어난다.
“…흐음.”
그렇게 레어를 벗어난 순간, 우뚝 자리에 멈추어서는 그녀.
“기분이 묘하군.”
그러던 아이시가,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린다.
“이렇게나 하찮은 존재의 몸에 깃든건 처음인데.”
이윽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며 신기한 표정을 짓는 그녀.
“늘 지켜보기만 하던 이야기에 참여해보는것도 새롭긴 새롭군. 하등한 차원의 암컷을 흉내내는 건 그리 탐탁치 않다만.”
그녀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드리운다.
“그래도 슬슬 지겨워질 참이었는데. 마냥 지켜보는 것보다는 몇배나 더 재밌어. 잠든 본체의 대리로 태어난 이후로 가장 즐거운 순간이다.”
그렇게 말하며 눈빛을 검은빛으로 물들인채 걸음을 옮기던 아이시.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춘다.
“그나저나 거슬리는군. 얌전히 사라지지 않고 쓸데없이 저항을 하다니. 덕분에 네 성격이 그대로 튀어나오지 않느냐.”
“……….”
“쯧.”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차던 그녀가,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모든것은 통제되고 있다.”
그러자 그녀의 손 위에 떠오르는, 다양한 형상들.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가운데, 그녀의 시선은 단 한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 으이이이익…!
“별의 신. 네놈의 최후의 보루마저도.”
온몸이 꼬질꼬질해진 글레어가, 거친 바다 한가운데에서 마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운명을 읽을 수 없다면, 뻔해질 정도로 개입하면 되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
“등장인물 주제에. 주제에 맞는 행동을 취하란…”
그러던 그녀가, 이내 인상을 찌푸린다.
“뭐야.”
글레어의 옆에, 완전히 깜깜한 화면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왜 이건 안보이지.”
그녀의 눈썹이 휘어지기 시작한다.
“운명이 읽히지 않는 녀석이, 하나 더 있다고?”
그렇게 말한 그녀가, 창에 손을 뻗는다.
“짜증나는 관리체계다. 이것만 아니였으면 진작에 이 차원을 집어삼켰을 터인데…”
이윽고 검은 화면을 손으로 탕탕 쳐보기도 하고 화면을 잡고 마구 흔들어도 보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삐쭉 내미는 그녀였다.
.
한편 그 시각.
[솔라 방](루나, 스텔라 출입 금지!)
– 딸깍, 딸깍…
어두컴컴한 방에 허리를 숙인채 앉아있던 로즈윈이, 퀭한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쉽게 배우는 코딩](지구 문화 교습용!)
그런 그녀의 품에, 태양신의 메모들이 한아름 적혀있는 책이 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