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Heroines are Trying to Kill Me RAW novel - Chapter (77)
메인 히로인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77화(77/524)
Episode 77
“하아…”
한 소녀가, 눈으로 가득찬 거리를 걷고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은, 찬 공기와 만나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 모습을 물끄럼히 지켜보던 소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두워.”
몇달전까지만 해도 달과 별이 매일매일 밝게 빛나던 밤하늘이었지만, 최근의 밤하늘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반짝이는 별과 은은한 달대신, 그저 깊은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리던 소녀는, 이내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한다.
– 슈우우…
“…으읏.”
하지만 그런 소녀를, 이번에는 차디찬 겨울바람이 가로막는다.
덕분에 자리에 멈춰 한숨을 내쉬던 소녀는,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옆에 있던 가게에 들어갔다.
“어서옵쇼…”
평소같았으면 소녀같은 추레한 몰골을 한 사람을 바로 내쫒았을 가게 주인이지만, 그는 그저 의욕을 전부 잃은 표정으로 인삿말을 중얼거릴 뿐이다.
– 펄럭
그 덕분에 잠시 몸을 녹이며 휴식을 취하던 소녀는, 옆에서 펄럭이고 있는 신문을 집어들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 제국, 연이은 패배. 찬란했던 태양은 이대로 저무는가?
“으으…”
하지만 신문의 헤드라인을 읽자마자,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나,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물론 사람하나 없는 텅 빈 가게에서 소녀의 말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고, 그건 술에 찌든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이, 꼬맹이.”
“…네?”
그런 사실을 통감하던 소녀가 이를 악물며 가게 밖으로 나서던 그때, 술에 쩔어 있던 주인장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런 야심한 밤에 이런곳을 들락날락 거리는진 모르겠지만… 빨리 이곳을 뜨는게 좋을거다.”
“네, 그래서 지금 나가고 있잖아요.”
“이 도시를… 아니, 이 나라를 말이다.”
이어진 주인의 진지한 목소리에, 소녀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고는 중얼거렸다.
“아직 황실이 버티고 있어요. 그러니, 어쩌면…”
“개뿔. 그녀석들이 잘 버티고 있다면… 왜 내 가게에는 손님한명 없는게냐?”
“그건…”
“몇년전만 해도, 사람으로 바글거렸는데 말이다.”
그 말에 소녀가 조용히 시선을 내리자, 남자는 다시 책상에 엎어지며 중얼거렸다.
“됐다… 너같은 꼬맹이에게 신세한탄을 해봤자 뭐하겠니. 난 술이나 마시련다.”
“…당신은 도망치지 않으세요?”
“도망?”
그러다 소녀가 가게를 나서기 직전 한 말을 들은 주인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같은 한량은 어차피 어딜가든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텐데, 뭐.”
그렇게 말한 주인은, 이내 눈을 감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으득.”
그 말을 듣고 잠시 이를 갈던 소녀는, 다시 새찬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나섰다.
– 슈우우…
“…하아.”
한참동안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던 소녀는, 이내 얼어붙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이익… 이이익…!”
그러던 소녀는, 별안간 안간힘을 내며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나와… 나오라고…!”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일기 시작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한때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던 찬란한 빛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녹이지 못한채. 그저 밝게 빛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제발… 돌아와줘…”
그런 어두운 빛을 보던 소녀는, 울먹거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많은 의미중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죽은지 오래고, 그녀가 원하는 빛은 사그러든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아.”
그렇게 한참을 울먹거리던 소녀는, 그녀의 볼을 타고내린 따스한 눈물이 손에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난… 슬퍼할 자격도 없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소녀는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이끌며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추움이 도를 넘어 아픔으로 변했다가, 그 아픔마저 사라질 정도의 강추위를 뚫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소녀는.
“여러분, 저 왔어요.”
상당히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몇년 전부터 그녀가 매일 주말마다 찾아 참회를 하던,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의 발길마저 뜸해져 버린 그곳에.
[프레이 라온 스타라이트의 생가]“…멋대로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곳에 찾아올때마다 그녀가 줄곧 하는 사과다.
함부로 자신의 얼굴을 보여, 행여 잠든 그가 노하지는 않을까 싶기에. 그녀는 단 한번도 이 사과를 빼먹은적이 없다.
“…하아.”
하지만 그 사과를 할때마다 더해지는 죄책감은, 안정감을 상회해버리곤 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죽은 그들에게 매일같이 사과를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올 리는 없으니말이다.
– 삐그덕…
“이런… 수리를 해야겠…”
한때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저택이 있었던 곳의 마당으로 이어지는 문을 연 소녀는,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덜렁거리자 그렇게 중얼거리다 말을 멈추었다.
“…맞다, 오늘이 마지막이었죠?”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쉰 소녀는, 이내 죄를 지은 죄인 마냥 고개를 푹 숙인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 프레이 라온 스타라이트의 생가가 있었던 곳.
이내 이곳에 오면 늘 그랬듯이 그날의 일이 있었던 생가쪽으로 향한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택의 지하실에서 잠든 프레이의 영혼이 혹여나 고통받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흔적만 남은 저택에서 빼져나온 소녀는, 저 멀리 있던 회색의 비석으로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 아무도 모르던 용사, 여기에 잠들다.
“최근에 못들려서 정말 죄송해요. 살짝… 곤란한 일이 좀 있었거든요.”
이윽고 프레이의 묘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하던 소녀는, 덮어 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풍성하던 황금빛 머리를 짧게 짤라 단발로 만든, 상처하나 없던 몸에 수많은 상처를 새긴 그녀는, 아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불리게 될 클라나 솔라 선라이즈였다.
“…죄송해요, 사실 살짝 곤란한 일이 아니였어요.”
제국의 황제가 더러운 로브를 입은채 묘비에 무릎을 꿇고는 울먹이고 있다.
꽤나 이슈가 될 내용이지만, 선라이즈 제국이라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선라이즈 제국이 망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몇번 이겼는데… 어쩌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양의 마나가 사라지고 혹독한 겨울만이 계속되니… 이젠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어요.”
그 일이 있던 이후로 몇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피곤에 쩔어있던 클라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들이 있었다면… 이런일은 없었겠죠.”
그렇게 말하며 클라나가 눈길을 돌린곳에는, 세레나의 무덤이 있었다.
“………”
그렇게 한참을 입을 다문채 두 무덤을 바라보던 클라나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왕군이 수도까지 들어닥쳤어요. 그 덕에, 지금 수도에는 제국군을 제외하면 아까 만난 술집 주인밖에 없는 것 같네요.”
아까 만났던 술에 찌든 술집 주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클라나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이 밝으면, 전 제국군을 이끌고 마왕과 결사항전을 할거에요. 물론 전 태양의 마나도 못 쓰고… 제국군은 전부 병들거나 지쳤지만… 그래도 항구에서 다른 대륙으로 대피하고 있는 제국민들과 아리아 씨에게 시간을 벌어주긴 충분할 거랍니다.”
그렇게 말한 클라나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당신들을 보는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내일이면 저는…”
– 슈우우…!
“…흐익!”
그 말에 답변이라도 하듯이 새찬 겨울 바람이 클라나를 파고든다.
덕분에 몸 구석구석에 있는 상처에서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낀 클라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겨우 이런 걸로 당신 앞에서 고통을 느껴서. 당신이 느낀 고통은… 이것보다 백배, 천배는 더 컸을텐데…”
그렇게 말하며 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던 상처를 이를 악물고 참아내던 클라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별맞이꽂이에요. 옛날에 당신이 제게 따줬던.”
꽁꽁 얼어붙은 손을 힘겹게 움직이며 프레이의 묘비 밑에 별맞이꽃을 내려둔 클라나는,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레나 씨. 달맞이 꽃이에요. 그냥… 당신에게도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이윽고 달맞이 꽃을 세레나의 묘비 밑에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 슈우우…!
“…아흑!”
하지만 바로 그때, 유난히도 매서운 겨울 바람이 그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득.”
그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클라나였지만, 곧 이를 악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 때문에 죽은 두 사람에게 추태를 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
그렇게 바들바들 떨면서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던 클라나는, 프레이의 묘비 밑에서 반짝이고 있던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반지?”
그것은, 유난히도 겉면이 반짝이던 반지였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한때 프레이에게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 두고 간거겠죠?”
겉은 반짝거리지만 안쪽은 손때가 타있는 반지를 바라보던 클라나는, 이내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프레이가 죽고나서, 그가 몰래 행해왔던 선행이 만천하에 드러난건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클라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건, 한때 제국에서 가장 컸던 고아원의 설립자가 바로 프레이였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알게되고, 어찌나 슬펐던지.
그 고아원에 찾아갔을때, 아이들이 자신에게 해맑게 인사를 할때는 자기 혐오감에 구역질마저 올라왔었다.
“아… 또 이러네요.”
잠시 그러한 생각에 잠겨있던 클라나는, 이내 자신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긋…”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자, 찌릿찌릿한 고통이 느껴져온다. 아무래도, 동상이라도 입은 모양이다.
– 터벅 터벅
하지만 클라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묘지를 빠져나간다. 영원한 겨울이 찾아온 제국에서는, 동상따위 별일도 아니니 말이다.
“콜록, 콜록!”
또한 감기 역시 별일이 아니다. 전염성이 높지만, 치사율은 그리 높지 않으니 말이다.
진정으로 무서운건, 치사율 100퍼센트의 마왕군일 뿐.
– 터벅 터벅
그렇게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클라나는, 묘지가 된 프레이의 저택에서 빠져나오자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왠지 그때랑 기분이 비슷하네요.”
프레이와 세레나가 목숨을 잃었던 그날, 황제에 등극하는 동시에 마왕군을 상대해야 한다는 중대 임무를 받고는 마당을 나서던 순간.
그때의 기분을 클라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군대랑 합류하기 전에, 잠시 몸좀 녹여야겠어요.”
그렇게 한참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던 클라나는, 온몸의 감각이 사라질때까지 바람을 맞고 나서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또 왔어?”
“…몸을 녹일 곳이 필요해서요.”
물론 몸을 녹일곳은 아까 잠시 들렀던 가게밖에 없었기에, 클라나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가게로 들어섰다.
“푸흐… 이상한 꼬맹이네.”
그러자 그런 그녀를 잠시 노려보던 주인은, 이내 빙그레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너… 돈은 있냐?”
“없어요.”
“그럼 술집에는 왜 들어와?”
“술을 시킬 돈은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주인은 피식 웃더니, 자신의 뒤에 있던 술병을 하나 꺼내 클라나에게 건냈다.
“…꼬맹이에게 술을 줘도 되는건가요?”
“이런곳에 계속 남아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죽을 생각 같아보이는데… 술 한병 준다고 대수겠어?”
피식 웃으며 클라나의 질문에 답한 가게 주인은, 이내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자러가볼테니, 여기 있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제가 돈을 훔쳐가면 어쩌시려고요?”
“돈이 있을리가 있나. 뭐, 술은 많지만.”
그렇게 말한 가게 주인은,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가게의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끼이익…
“…하?”
그런데 그 순간,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기요? 손님이 왔는데요…”
당황한 클라나가 위층에 대고 소리를 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음…”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클라나는 들어온 사람을 조용히 흝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마왕의 수하인가요?”
“아니, 그냥 지나가던 여행자다만.”
이윽고 지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클라나는, 자신의 앞에 있던 남자가 조용히 답하자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 꿀꺽 꿀꺽
한참을 멍하니 자신의 앞에 있던 술병을 바라보던 클라나는, 별안간 술병을 집어들고는 벌컥벌컥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흐아.”
평소 술을 그리 즐기지 않았던 클라나였지만, 내일 있을 결사항전에 대한 두려움, 방금 찾아갔던 프레이와 세레나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기타 여러가지 감정들을 잊어보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
“전부다… 전부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수많은 오판중 하나에 불과했다.
독하고 쓴 술은, 그녀가 애써 묻어두었던 어두운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나만 아니었으면… 나만 아니었으면 모든게 제대로 돌아갔을텐데…”
그렇게 말하던 클라나는, 자신의 손을 마구 책상에 내려찍기 시작했다.
“아, 안돼… 다시 기억하기 싫어… 싫단 말이야…!”
태양의 마나를 쓰지 못하게 된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날 프레이의 시체를 찢어놓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게 손에 느껴진다.
자신의 손가락에서부터 발사되던 태양빛 광선이 프레이의 머리를 꿰뚫는 순간이, 자신이 소환해낸 단도가 프레이의 심장에 꽂히며 만들어진 진동이, 계속해서 손에 느껴지는 것 같다.
“…그만 하시죠.”
그렇게 한참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려찍던 클라나는, 옆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가 나지막히 중얼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으으… 으으…”
그녀의 손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프레이… 잘못했어… 미안해…”
그럼에도 자신을 몇년간 괴롭혀왔던 끔찍한 감촉이 손에서 가시질 않자, 결국 클라나는 책상에 엎어지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내가 그때 그짓만 안했더라면…”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품에서 꺼낸건, 하도 많이 펼쳐봤기에 닳을대로 닳아버린 편지였다.
– 어렸을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 손으로 당신을 황제로 만들어드리고 싶었는데.
그는, 자신과 어렸을때 했던 약속을 단 한번도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렇게도 고질고 모된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 당신과 제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사교계에 데뷔하시던 첫날, 당신을 위해 열렸던 티파티 말입니다.
그녀의 데뷔 기념 무도회에서 열렸던 티파티는, 아직까지도 클라나에게 있어서는 잊지못할 추억이자 기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 의미는 여러번 바뀌었지만 말이다.
– 저와 당신 빼고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던 테이블에서, 애써 상처입지 않은 척을 하며 차를 마시던 그 모습은… 아, 죄송합니다. 혹시 삐지셨나요?
그 티파티는, 황후가 파둔 함정이었다.
그 어떤 영애와 영식도 제 3황녀의 티파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클라나의 데뷔를 망치는 동시에 요주 인물들에게 내 정치적 위치를 알리는 일종의 쇼였던 것이다.
– 그때 당신은 같잖은 동정을 부릴거면 꺼지라고 하셨었죠.
실제로 그랬다. 겉으로는 선한 얼굴을 하며 속으로는 사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황실 생활을 하면서 질리도록 봐왔었으니까.
황후의 눈치를 보느라 그 누구도 오지 못하던 티파티에 홀로 참석해 자신을 보며 생긋생긋 웃던 어린 프레이도, 그저 손익을 철저히 계산해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 그거 아세요? 사실 전 그때 상당히 배가 고팠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이 많은 곳에 가 앉았는데, 하필 그게 당신의 티파티였던 거죠. 하필 저도 그때가 사교계 첫 데뷔였던지라 일어난 헤프닝이었던겁니다.
거기까지 편지를 읽은 클라나의 머릿속에, 그때의 자신과 프레이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랑 친구할래?”
“같잖은 동정을 부릴거면 꺼져요.”
“으응?”
“전 가식적인 사람이 끔찍히도 싫으니… 어서 여기서 꺼지라고요.”
“그, 그치마안… 난 너랑 친구하고 싶은데에…”
– 그러다가 앞에 처음보는 영애가 있기에 친구가 되고 싶어 말을 걸었더니, 욕을 된통 얻어먹었었죠.
“저랑 친구를 하고 싶으면, 별맞이 꽃 정도는 구해 오세요.”
“…별맞이 꽃?”
“네, 저기 보이는 산에 자라는 귀한 꽃이요. 그 꽃을 주지 않는 한…”
“다녀올게!!”
그때 클라나는, 프레이를 떨어트려놓기 위해 심술을 부렸었다.
1황녀와 2황녀가 황후에게 선물로 받고 자신에게 자랑했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는 별맞이 꽃을 구해오라 부탁했던 것이다.
물론, 클라나는 계산적으로 접근해온 프레이가 그걸 구해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잠깐 숲을 뒤지다가 투덜거리며 포기하겠지라고 말이다.
태어나서 어머니를 제외한 남에게 항상 이용만 당해왔던, 결국엔 그 어머니 마저 잃고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비운의 황녀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 설마 그걸 찾는데 삼일이나 걸릴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녀의 사교계 데뷔 무도회는, 황후과 원하던것과는 다른 의미로 발칵 뒤집어졌었다.
– 아무튼, 제 결론은…
“저기요, 도저히 눈 뜨고 못보겠네요.”
“흐에?”
트라우마에 빠질때마다 들여다보던 프레이의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가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제발 그 손좀 그만 내려찍으면 안됩니까?”
“아… 죄송…”
그제야 클라나는, 자신이 편지를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책상에 손을 내려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그 덕에 아까보다 더 상태가 심각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클라나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옆에 앉아있던 남자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유서를 써준 보람이 없잖아요.”
“…네?”
그런데,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젠장, 상태가 이렇게나 심각할줄은 몰랐는데… 시스템이 얘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준 이유가 이건가?”
“다, 당신…!”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클라나는, 그가 목소리 변조를 풀고 말하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프, 프레이!!!!!!!!”
이윽고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남자가 로브를 벗고 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드러내자, 클라나는 경악과 충격이 서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거, 또 그 패턴이네.”
“프레이! 살아있었던거에요? 살아있었던거죠!! 그쵸!!!”
그러던 클라나는, 이내 표정을 환희로 가득 채우고 프레이에게 달려들었다.
“당신!!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에요! 지금 마왕이 눈앞에 있어요!! 어서 저와 이곳을 빠져나….으겍.”
“…하아.”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프레이게 달려든 그녀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프레이를 그대로 통과한 채 옆의 벽에 몸을 들이 받고 말았다.
“어, 어라? 이게 어떻게 된거지? 분명 프레이는 여기 있는데… 왜…”
덕분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클라나는, 이내 떨리는 손으로 프레이의 몸을 휘적이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한참동안 잡히지 않는 프레이의 몸을 더듬대던 클라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프레이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뭔가요? 제 환상? 아니면 복수하러 온 유령? 개인적으로는 후자면 더 좋겠네요. 당신에게 죗값을 치룰 수 있으니…”
“처음엔 이게 왜 시련인가 싶었는데…”
그리고 그런 클라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프레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만큼 시련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건 없을것 같네.”
그런 그의 앞에는, 오직 숫자 1만이 덩그러니 떠 있는 시스템창이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