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Leads Were Stolen by the Extra RAW novel - Chapter (1)
엑스트라에게 남주들을 빼앗겼다 (1)화(1/162)
<1화>
“그레이스를 사랑하게 됐어. 미안하게 됐군, 셀로니아.”
셀로니아는 바람을 고백하는 약혼자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대에게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하루라도 빨리 파혼해 주었으면 해. 그레이스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싶거든.”
“…….”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던 셀로니아는 말문이 막힌다는 기분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 개월 동안 사경을 헤매며 죽다 살아났더니, 병문안을 온 줄 알았던 약혼자가 대뜸 바람을 고백했다.
게다가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당당해서 파혼을 요구하는 내내 무표정인 걸까.
흔들림 없는 그의 벽안엔 일말의 미안함도 죄책감도 들어 있질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가 정말 자신과 6개월 동안 생사를 함께한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위자료는 섭섭지 않게 챙겨 주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미간엔 주름이 져 있었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
셀로니아는 달싹이던 입술을 닫았다. 지금 이 상황을 성가셔하고 있는 그의 표정을 읽었으니까.
가슴이 따끔거리다 못해 욱신거렸다.
이안 체르빌.
그는 그녀의 약혼자였다.
가문에서 정해 준 정혼자이긴 했으나, 이안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그를 좋아했다.
물론 이성으로 그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그’라는 사람을 좋아했었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던 당당한 그의 태도와 용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당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와 첫 키스를 할 때 귓가에 종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나 이 사람이라면 미래를 함께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하아, 셀로니아. 당신 이렇게 구차한 사람 아니잖아.”
이안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반년 넘게 함께하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성의한 태도와 눈빛.
그것을 본 그녀는 완전히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을 향했던 그의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좋아요. 파혼해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더 고민할 필요 없었다.
죽다 살아난 약혼자에게 몸은 괜찮냐며 안부도 묻질 않고 파혼을 요구하는 무례한 남자라면 제 쪽에서 사양이었다.
“그래. 그럼 그대가 파혼서를 보내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이안이 확 밝아진 얼굴로 냉큼 답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던 셀로니아가 입술을 떼었다.
“대신 위자료는 제가 원하는 걸로 받겠어요. 그러니 요구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서약서 남기고 가시고요.”
“뭐?”
“왜요? 파혼당하는 입장이니 그 정도는 되어야 계산이 맞지 않겠어요?”
셀로니아는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런 요구를 할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얼렁뚱땅 합의하여 위자료를 퉁치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가장 큰 것을 빼앗아 올 것이다. 무례한 이 남자가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그대가 이렇게 욕심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군.”
“모르셨다니. 유감이네요.”
같잖은 그를 향해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종이는 어디 있지.”
“거기 서랍 안에 있으니 꺼내 쓰세요.”
그녀는 짜증을 숨기지 않는 그에게 고갯짓했다.
이안은 불만이 담긴 손길로 침대 옆에 놓인 서랍을 열어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러곤 휘갈기듯 내용을 써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셀로니아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들키지 않게 입안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 남자를 믿었다니……. 자신이 더없이 바보 같았다.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함께 지내 온 6개월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가 밉다 못해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절대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배신자 앞에서 감정의 동요 따윈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는 자신의 인생에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을 거다.
절대로.
“이제 만족하나.”
이안이 다 쓴 계약서를 거칠게 쥐더니 셀로니아를 향해 던졌다. 하얀 종이가 팔랑이며 이불 위로 떨어졌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자료로 지급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그의 서명이 적힌 서약서.
그녀는 조용히 서약서를 그러쥐었다.
그와 함께한 1년의 대가는 고작 이 종이 하나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셀로니아는 미련 없이 떠나려는 이안을 불러 세웠다.
이대로 그냥 그를 보내기엔 성에 차지 않았다.
“하, 또 무엇이지.”
이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열받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가까이 와 줄래요?”
“…….”
“마지막이잖아요.”
셀로니아가 가련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안은 마지막이니 악수 정도는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한숨 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닿기 직전, 셀로니아는 손을 쭉 뻗었다.
퍽.
굉장한 마찰음과 함께 이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얼얼하네?
그녀는 제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진심이 담겼었는지 손가락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난데없이 뺨을 맞은 이안이 성질을 부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인지 그의 얼굴엔 놀람과 언짢음을 넘어 분노가 어려 있었다.
등신같이. 그럼 뭐 고상하게 진짜 악수라도 할 줄 알았나.
“제가 좀 구차해서요. 당신은 충분히 맞을 짓 했고 나는 당신을 때릴 자격 있잖아요? 설마 당신, 이런 일로 분풀이할 만큼 속 좁은 남자는 아니겠죠?”
셀로니아는 아까 받은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그것을 안 이안은 대답은 못 하고 시뻘게진 얼굴로 씨근덕거리더니 휘 뒤돌아섰다.
“이만 가지. 내 결혼식엔 오지 않아도 돼.”
“잘 가요.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쾅.
문이 닫히며 이안의 뒷모습이 완벽히 사라졌다.
셀로니아는 다시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쁜 새끼…….”
울컥 눈물이 차올랐으나, 울고 싶지 않았다. 저깟 놈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까웠으니까.
그러나 몰려드는 배신감과 쓰라린 허탈함에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만 갔다.
오늘은 그녀가 3개월 넘게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더불어 <마왕에게서 살아남기> 소설 속 여주에 빙의한 지 9개월이 되던 날이기도 했다.
* * *
<마왕에게서 살아남기> 소설은 말 그대로 소설 속 최강 악역이라 불리는 마왕을 물리치는 소설이었다.
제목만 보면 판타지 소설 같으나 실상은 로맨스가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로맨스판타지 소설이었다.
셀로니아 베스인.
21살의 그녀는 베스인 공작의 외동딸이자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이었다.
셀로니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 제국 내 몇 명뿐인 치유 능력을 가진 치유사였다.
그런 그녀에겐 조부모님 세대 때부터 정해 둔 약혼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안 체르빌이었다.
이안 체르빌 공작.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자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궁 월화 기사단의 단장이 된 남자.
정략혼이라는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은 몇 번의 데이트를 하긴 했으나 딱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180도 달라지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난데없는 마왕의 부활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마왕을 봉인하고 있던 봉인석이 깨지며 100년 만에 그가 부활했다.
100년 전 마왕과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거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때와 똑같은 악몽을 겪을 수 없다고 판단한 황제는 결단을 내린다.
이번에야말로 악의 축이자 근원인 마왕을 아예 죽여 버리기로.
그리하여 꾸려진 최정예 부대.
황제의 선택을 받은 자들 중에는 남주와 여주 그리고 서브남주가 있었다.
평소 정의로운 성격의 기사단장이었던 이안 체르빌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기꺼이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떠난다.
치유사였던 여주도 평화를 위해 힘쓰고 싶다 선언하곤 남주와 함께 모험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마왕성으로 향하는 동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싹텄고, 끝없이 펼쳐진 모험 속에서 두 명의 동료를 만나게 된다.
성기사인 레예프 헤첼과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맥라이언. 그들은 서브 남주들이었다.
두 사람은 여주인 셀로니아를 좋아했으나, 약혼자인 이안의 존재를 깨닫곤 자신을 봐 달라 욕심부리지 않는다.
그저 헌신적으로 여주를 도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네 사람은 힘을 합쳐 마왕을 무찌르고 제국엔 완전한 평화가 찾아온다.
여주와 남주는 역경 속에 피워 낸 사랑을 맹세하며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소설은 끝이 난다.
“그래. 분명 그렇게 끝이 나야 하는데…….”
셀로니아가 아파 오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셀로니아 베스인 몸에 빙의한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지리 운도 없지…….
공작 영애다운 호화로운 생활은 경험도 해 보지 못하고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시작점에 빙의해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생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싶은 만큼.
그녀는 6개월 동안 험난한 마물의 숲을 지나 성을 올랐다.
그 시간 동안 죽었다 살아난 적이 여러 번이요,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며 마물들 손에 크고 작게 다친 것도 수십 번이었다.
그렇게 개고생하며 마왕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알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쓰러졌다.
이대로 이용만 당하다 죽는 걸까? 싶은 순간 기적처럼 눈이 뜨였고, 시간은 3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찌 됐든 살았으니 이제 남은 건 꽃길뿐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그녀와 함께 해피엔딩을 맞이할 원작 속 남주이자 약혼자인 이안 체르빌이 파혼을 요구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그것이 벌써 며칠 전 일이었다.
“셀로니아 님?”
“아……. 미안해요.”
곁에서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에 셀로니아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얘기 들었어요, 레예프. 제가 쓰러져 있는 동안 자주 찾아와 주었다고요. 고마워요.”
그녀는 응접실에 마주 앉아 있는 레예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레예프 헤첼.
고귀하고 순결한 피가 흐르는 성기사이자 자신을 짝사랑하는 서브남주 중 하나였다.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셀로니아 님.”
“……레예프? 괜찮아요? 어디 아픈가요?”
셀로니아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는 레예프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늘 곧은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
“……들었습니다. 이안 공작과 파혼하셨다는 소식 말입니다.”
“아, 그거…….”
셀로니아는 입안이 씁쓸했다.
엊그제 이안에게 파혼서를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파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딱히 숨기지도 않았던 터라 오늘 자 신문엔 저와 이안의 파혼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그렇게 됐네요.”
셀로니아는 허탈함을 숨기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6개월 동안 생사를 함께한 연인이자 동료는 결국 종이 한 장에 서명하는 걸로 끝이 날 인연이었던 것이다.
“……힘드실 텐데 저까지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가 셀로니아 님에게 했던 기사의 맹세는 없던 일로 하고 싶습니다.”
“푸흡! 켁켁! 지, 지금 뭐라고……?”
너무 놀라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는 사실도 잊고선 셀로니아가 토끼 눈을 떴다.
“평생 모시고 싶은 다른 레이디가 생겼습니다.”
레예프는 면목 없다는 듯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셀로니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이 기시감.
설마, 설마…….
“저는 그레이스 베넷 양에게 영원의 맹세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