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Leads Were Stolen by the Extra RAW novel - Chapter (143)
엑스트라에게 남주들을 빼앗겼다 (143)화(143/162)
<143화>
한겨울이 찾아왔다.
그동안 이 정도까지 눈이 내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몇십 년 만에 찾아온 폭설은 며칠째 계속되었고 양 또한 어마어마했다. 쌓인 눈으로 지붕이 무너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정도였다.
사람들의 발은 묶였고 집 밖을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던 날. 베스인 공작과 공녀의 처형과 셀로니아의 의식 불명으로 한참이나 떠들썩했던 제국은 이제 온 천지 폭설에 관한 기사와 얘기뿐이었다.
황궁 앞에 효수하겠다던 죄인의 목은 한 달이 지나 일주일 전에 내려갔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흐른 것이었다.
“젠장. 눈 좀 쓸어 놓지.”
짜증 난 얼굴로 맥라이언이 툴툴거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파묻히는 눈 때문에 방해가 되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푹, 푹, 푹.
발들이 눈에 빠지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땅에 소복하게 쌓여 발을 차갑게 감싸고 있는 눈은 종아리까지 닿았다. 심지어 쌓인 채로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기까지 했다.
“그럴 정신이 어디 있으시겠습니까.”
툴툴거린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레예프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걸어가며 단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맥라이언이 ‘그래, 너 잘났다’라는 표정으로 홱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털었다.
지금도 내리고 있는 눈 때문에 어느덧 어깨 위를 장식하고 있던 눈이 아래로 스르르 떨어졌다.
맥라이언과 레예프는 현재 마차에서 내려 저택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쌓인 채로 얼어 버린 눈 때문에 마차가 저택 안까지 진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설원처럼 눈 속에 뒤덮여 있는 저택이 놓여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 외에는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저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강처럼 펼쳐져 있는 눈.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한 달 전 그때에서 말이다.
“저희가 가기 전에 앞에라도 눈을 좀 치워 두는 게 좋겠습니다.”
“뭐? 우리가 왜!”
“또 오실 거 아닙니까? 저희의 편리함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십시오. 게다가 저택엔 하인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발끈했던 맥라이언의 입이 스르륵 다물렸다. 맞는 말이었다. 결국 또 오게 될 테니까.
선대공이었던 자와 기사단장이 사라진 대공저에는 오직 주방장과 사용인 두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명은 셀로니아의 사용인이었다.
사용인에게 전해 듣자 하니 곧 북부로 올라갈 생각이었던지라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맥라이언은 사건이 끝난 직후 대공저에서 지내던 셀로니아에게 자신의 집을 권유했던 거다.
이놈의 집구석은 부릴 수 있는 하인도 제대로 갖춰져 있질 않았으니까.
“이안 그놈은 참…….”
군말 없이 걷던 맥라이언은 아까 보았던 이안의 태도를 떠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가지 않겠습니다.”
이안은 맥라이언의 제안에 단호하게 답하며 시선조차 들지 않고 서류만 쳐다봤다.
그는 이안의 면전에 대고 욕을 내뱉고 싶었으나 꾹 참고 결국 레예프랑만 동행한 것이었다.
“그래도 일전에 한 번 보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한 번 가지고 되냐?! 사람이 눈을 안 뜨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새끼는 참 이기적이다. 본인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벌써 잊어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게 말이 된다고 보냐?”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데 맥라이언이 잔뜩 화가 나 길길이 날뛰었다. 본인이 더 서운하고 화가 난다는 태도였다.
“나름의 마음속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레예프는 이안을 옹호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황궁에서 의회가 열렸던 한 달 전, 그는 셀로니아가 탄에게 향할 때 홀로 남겨진 이안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탄을 향해 웃어 보이는 셀로니아를 보며 만감이 교차하던 이안의 표정에서는 명백한 좌절이 떠올라 있었다.
어떤,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자신은 절대 그녀에게서 저 웃음을 받지 못할 거라는 절망.
그래서일까.
이안은 처음 셀로니아가 쓰러졌을 때 찾아오곤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지금 있는 장소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했으니까.
“사정은 무슨. 개뿔.”
걸걸한 성미를 부리며 맥라이언이 앞서 나아갔다. 레예프는 픽 웃으며 뒤따랐다.
끼이이익.
두 사람이 저택에 거의 다다를 무렵, 커다란 저택의 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눈 때문에 잘 밀리지가 않는지 반쯤 열리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후아암!”
문을 연 주인공은 엘라였다.
피곤한지 크게 하품을 하며 빗자루를 들고 있던 엘라는 눈이 밟히는 푹, 푹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라? 오늘 오시는 날이었군요!”
두 사람을 발견한 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와서 쓸면 그게 쓸어지냐?”
엘라가 든 얇디얇은 나무 빗자루를 본 맥라이언이 혀를 끌끌 찼다. 이미 눈이 쌓인 채로 얼어붙었는데 저 빗자루질로는 턱도 없었다.
“얼어 죽겠다! 불 좀 때라!”
그는 저벅저벅 걸어와 익숙하다는 듯 발을 털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어찌나 추운지 뼈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눈이 오는 바깥보다 더 한기가 도는 저택 때문에 절로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헤헤. 2층으로 올라가시면 돼요.”
엘라는 익숙하다는 듯 안내하며 두르고 있던 겉옷을 여몄다.
엄청나게 두꺼운 겉옷을 왜 저렇게 껴입고 있나 했더니만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으니까 그런 거였다.
“능력은 뒀다 뭐 하는 건지.”
맥라이언은 누군가를 향해 원색적 비난을 퍼부으며 계단을 올랐다.
따라 올라간 레예프는 추운 저택 때문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하얀 김이 아스라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방문 앞에 섰다.
똑똑.
규칙적인 노크 소리에도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허락도 없이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몇 번의 방문 끝에 노크를 해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뭐가 이리 극단적이야.”
방문이 열리자마자 맥라이언이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1층을 지나 2층 복도를 걸어올 때까지 이렇게 얼어 죽어도 무리가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추웠다.
그런데 이 방은 문을 열자마자 훈훈한 기운이 불어닥쳐 꽝꽝 얼었던 귀가 찌릿찌릿할 정도였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올랐다. 장작을 얼마나 넣은 건지 방은 들어온 지 몇 초 되지 않아 더워서 숨이 답답할 정도였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은, 춥고 서늘하던 저택이었는데 이 방은 예외였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방. 햇살이 잘 드는데도 먼지조차 보이지 않고 깨끗하고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방은 마치 낙원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불을 여기만 때면 다른 이들은 얼어 죽으라는 거냐.”
맥라이언은 잔소리를 해 대며 방 안에 놓인 침대로 향했다.
침대 옆엔 거대하고 시커먼 남자가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탄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레예프는 소중히 들고 온 물약을 곧장 탄에게 내밀었다.
그건 영양분이 응축된 보존 마법 물약이었다. 예전에 셀로니아가 토벌 직후 의식을 잃었던 3개월 동안 먹었던 그 물약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걸 먹어야만 나중에 깨어났을 때 근육이 빠지지 않고 무리가 없을 터였다.
“언제쯤 깨어날는지. 이번에도 3개월 뒤에 눈을 뜰 건지…….”
맥라이언은 조금 침울해진 목소리로 침대에 평온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셀로니아를 응시하였다.
한 달 전, 셀로니아가 쓰러졌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으나 다행히도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숨만 붙어 있을 뿐 그녀는 전혀 의식을 되찾지 못했으니까.
도대체가 그 게일이라는 놈이 무슨 흑마법을 부린 건지.
죽어 버렸기에 정확하게 알 순 없었으나 아무래도 또 영혼을 건드는 흑마법이었던 게 분명했다.
게일이 흑마법을 부릴 때 들고 있던 건 없어진 제단 조각이었다. 셀로니아와 그레이스의 피가 묻은 제단의 조각.
학자들은 말했다. 완전한 제단이 아니기에 부린 흑마법 또한 불안전할 것이라고. 그래서 그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 했는데 셀로니아는 한 달이 넘게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대공저에서 탄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소식을 접한 이안도 그녀를 보러 왔었다.
딱 한 번. 그날 이후 다신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맥라이언과 레예프는 주기적으로 셀로니아를 보기 위해 대공저에 들르고 있었다.
“왜 못 깨어나는 건데!”
물론 처음에 맥라이언은 탄의 멱살을 잡고 왜 그녀가 눈을 뜨지 않는 거냐며 온갖 성질이란 성질을 다 부렸다.
그의 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당장 화풀이할 대상이 탄밖에 없었으니까.
이놈의 마왕이랑 엮여서 셀로니아가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는구나. 그런 원망이 들었다.
물론 그 멱살잡이에 탄이 그대로 당한 건 아니었다. 그대로 아주 가볍게 맥라이언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입 닥쳐. 옆에서 앵앵거리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 말에 발끈하려던 맥라이언은 차마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비슷한 소리는 몇 번이나 들어 이미 익숙해졌지만, 그런 표정은 처음 봤으니까.
모든 걸 참고 있는 얼굴. 그 속에 엉켜 있는 감정은 불안, 초조, 절망, 낙담이었다. 게다가 끝없이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붉은 눈동자는 탁했다.
결국 탄도 셀로니아가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잠은 좀…… 아니다.”
힐끗 탄을 본 맥라이언이 본인의 질문을 타박했다. 마왕이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떠올랐기에.
하지만 저 몰골을 보니 그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괜찮다고 해도 그는 한 달 전과 비교해 봤을 때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모든 게 메말라 버린 사람처럼.
“하아……. 그렇게 붙어 있지만 말고 바람이라도 좀 쐬라.”
그는 결국 한숨을 동반해 진심을 내뱉었다.
그들의 방문에도 탄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셀로니아의 곁에 붙어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있었다.
레예프가 물약을 건네줬을 때만 잠깐 움직였을 뿐 다시 돌아갔다.
“석고상처럼 아가씨 곁에 앉아만 계세요……. 물약을 먹이는 것도 몸을 씻기는 일도 모두 다 손수 하고 계시죠. 제가 하겠다 해도 남의 손이 타는 건 싫으신지 완강히 거부하시고요…….”
일전에 두 사람에게 엘라가 그런 말을 전했었다. 제발 좀 대공님을 말려 달라면서 이러다가 죽을까 봐 무섭다고.
믿기지 않았으나 몇 번의 방문에도 늘 똑같은 탄을 보며 그들은 그 말이 진실이었음을, 잠을 자지 않는 저 마왕이 24시간 내내 셀로니아 옆을 망부석처럼 지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였다.
“춥나.”
미동조차 하지 않던 탄이 셀로니아를 보며 중얼거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걸어간 그는 환기를 위해 아주 살짝 열어 두었던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 덮고 있던 이불을 조금 더 끌어 올려 주었다.
아마 눈을 감고 있는 셀로니아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있던 모양이었다.
“…….”
맥라이언과 레예프는 할 말을 잃었다.
온 신경 하나하나가 셀로니아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탄을 보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기다리겠지. 다시 날 찾아올 날을.”
전에 했던 그 말이 정말이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무너지지 않고 셀로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불을 정돈한 탄은 다시 고정석에 앉더니 한 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추울까 봐 이불에 감춰 둔 셀로니아의 손을 잡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다른 한 손은 아주 조심스럽게 누워 있는 셀로니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이미 그의 정성 어린 보살핌에 그녀는 누워 있으면서도 흐트러진 구석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으나 해도 해도 부족한 듯 그의 손길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애정밖에 존재하지 않는 눈으로 셀로니아를 바라보고 있는 탄을 보던 맥라이언과 레예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나왔다. 더는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달칵.
등 뒤로 방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없이 걸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복도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계단 앞에 도착하기 직전 맥라이언이 중얼거렸다.
더는 마왕에 대한 문제로 고민이 들거나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러고 있는데, 한 달이 넘게 저러고만 있는데 어떻게 그를 마왕이라 고발하고 떠들어 댈 수가 있겠는가.
그냥 셀로니아가 어서 깨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저 멍청하고도 맹목적인 기다림을 막거나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저 존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
“이봐. 삽 없어?”
“제 것도 필요합니다.”
1층으로 내려온 맥라이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사용인에게 묻자 레예프가 피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삽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공저의 또 다른 하인 멕스웰이 헐레벌떡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 뒤. 두 사람은 건네받은 삽으로 불만 없이 대공저 앞에 쌓인 눈을 치웠다. 그녀 곁은 탄이 지키고 있으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