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Leads Were Stolen by the Extra RAW novel - Chapter (153)
엑스트라에게 남주들을 빼앗겼다 (153)화(153/162)
<외전Ⅱ 1화>
“유진!”
잔뜩 신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부르며 달려갔다.
“제이니! 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니!”
“헤헤헤. 이번 한 번만요!”
나무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제이니는 애교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제이니는 목적지가 명확하다는 듯 거침없이 달려가 복도 맨 끝에 있는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쏙 들어갔다.
“유진! 나왔어!”
“어이쿠. 아가씨. 그러다 넘어지시면 아야하셔요.”
방 한가운데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유진이 도도도도 달려온 제이니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아야는 무슨! 유진은 내가 아직도 아기인 줄 알아? 난 이제 7살이라구!”
제이니가 으스대며 늠름하게 가슴을 부풀렸다.
그 모습에 올해로 87살이 된 유진은 쿡쿡 웃을 수밖에 없었다.
17살도 아닌 7살은 아직도 그녀에게 어리기만 한 나이였으니까.
“유진. 나 얘기 또 듣고 싶어. 어제 했던 얘기 이어서 해 줘!”
잽싸기도 해라.
제이니는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방 한편에 놓여 있는 자신만의 전용 의자를 끌고 와 유진 앞에 자리했다.
기대감이 어린 작은 얼굴 속 크고 투명한 눈망울이 반짝였다.
꼭 밤하늘에 별을 따다 심어 놓은 것처럼, 강가의 윤슬처럼.
유진은 제이니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를 가만가만히 응시하였다.
아직은 앳된 얼굴이지만 제이니의 눈동자 색 그리고 얼굴은 그리운 누군가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아가씨. 제가 얘기했던가요?”
“할머님이랑 내가 닮았다는 얘기? 피이. 유진은 그 얘기 나 볼 때마다 하잖아.”
“홀홀홀. 이 늙은이가 요즘 더 깜빡깜빡한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닮았어? 나두 사진으로 뵙긴 했는데…….”
제이니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포동포동한 뺨을 긁적였다.
대공성 안에서 가장 넓은 1층 메인 복도에는 선대 대공 부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암흑보다 더 새까만 검은 머리카락과 선혈같이 빨간 눈동자를 가진 대공과 대공과 비슷한 검은 머리카락의 고동색 눈을 가진 대공 부인.
탄 허시브룩과 은영 허시브룩이었다.
북부의 번영과 평화에 큰 공을 세운 대공 부부는 대공성의 주인이 3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아직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했다.
“……물론이죠. 아가씨는 그 누구보다 은영님을 많이 닮으셨답니다.”
애틋한 눈으로 제이니를 보던 유진은 주름진 늙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기분이 좋은지 제이니의 두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제이니 허시브룩.
대공성 모두가 애지중지하는 고명딸이자 지금까지 아들만 낳아 왔던 대공가의 귀하디귀한 첫 딸이었다.
올해로 7살이 되는 제이니는 은영의 고손녀였다.
“유진은 할머님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할머님을 처음 뵌 게 언제라구 했지?”
유진의 무릎에 기댄 제이니가 동그란 눈을 위로 떴다.
“제가 9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두 분의 결혼식을 보러 대공성에 왔을 때였죠.”
“그리고 10살에 우리 집에 들어 왔다구 했지?”
“맞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워서 두 분의 곁에 있고 싶었지요.”
옛 생각이 떠오른 건지 유진의 입매에 인자한 미소가 걸렸다.
첫 만남 때 사람이 아닌 요정으로 착각할 정도로 은영은 유진에게 강렬하게 기억되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것에 무심할 것 같은 건조한 붉은 눈을 가진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한 남자가 단 한 사람에게만 꽃이 피어날 정도로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장면은.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사랑이 어린 자신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다음 해에 유진은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공성에 하녀로 들어왔다.
먼발치여도 두 분을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두 분의 곁에 있다면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대공성에 들어온 지 어언 77년.
그녀가 모시던 마님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고 다시 또 아들을 낳은 뒤에 제이니를 낳기까지.
유진은 모든 역사를 함께하였다.
어느덧 성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용인이 된 유진의 곁에는 더 이상 그녀를 따스하게 바라봐 주고 불러 주던 그분은 계시지 않았다.
그저 나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 이곳에서 은영 님을 기억하는 건 단둘뿐이지요.”
“……유진. 울어?”
제이니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주름진 유진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울지 마아……. 유진 울지 마.”
어느새 본인도 울먹거리며 제이니가 유진의 무릎을 꼭 껴안았다.
부모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유진이 우는 건 어린 제이니에게 마음 아픈 일이었다.
“아가씨. 제가 힘이 닿을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 드릴테니 한 가지만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뚝뚝 흐르고 있는 제이니의 눈물을 닦아 주며 유진이 말했다.
“물론이죠! 뭐든 말만 해! 유진의 부탁은 내가 다 들어줄게!”
눈물을 흘리던 제이니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보였다.
유진은 그런 사랑스러운 제이니를 보며 홀홀홀 웃었다. 이런 다정함까지도 그분을 쏙 빼닮았다.
“아가씨. 혹시 제가 떠나게 된다면 그땐…….”
* * *
“뭐 하는 거야!”
“아, 아니 나는…….”
계단을 오르려던 하녀가 화들짝 놀라 걸레를 떨어뜨렸다.
“5층은 출입 금지라고 했잖아! 왜 네 멋대로 들어가려 해!”
“난 그냥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계속된 동료의 힐난에 계단을 오르려던 사용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금기 사항 잊었어? 멋대로 청소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먼지가…….”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둘의 목소리 외에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아, 유진 님.”
둘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얼른 허리를 숙였다.
지팡이를 짚고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유진이었다. 하녀장에서 물러난 지 오래었지만 대공성에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 지금의 대공 부부도 터줏대감 같은 유진을 존중해 주었다.
“이곳에서 소란피우지 말거라.”
“죄, 죄송합니다…….”
청소를 하려던 사용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진을 몇 번 마주치진 않았지만 볼 때마다 언제나 인자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보고 있는 유진의 눈빛은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날카로웠다.
“네게 해를 끼칠 그 호기심을 죽이거라.”
그리고 그 느낌은 적중했다.
“유진 님!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셔요……!”
핏기가 싹 가신 채 사지를 발발 떨던 그녀가 이내 재빨리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정곡이었다.
대공성을 둘러싼 그 소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몰래 5층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5층은 출입 금지라는 금기 사항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음에도.
“너는 당분간 마구간 일을 돕거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을 돌보는 일이 아닌 마구간이면 좌천이었지만 그래도 해고는 아니었기에 사용인은 유진을 향해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사라지고 유진은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전보다 느려진 걸음에도 쉼 없이 계단을 오른 유진은 얼마간 복도를 걸어 커다란 방문 앞에 섰다.
“들어와.”
노크를 하려 했지만 다 알고 있다는 듯 방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문고리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분이 떠나고 3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방 풍경이 유진의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누운 적 없는 주름 하나 지지 않은 침대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 하나 대지 않은 다 식은 식사.
“조금이라도 드셔야지요.”
“그 소리 지겹지도 않나.”
“마님과 약속했으니까요. 한술도 뜨시지 않은 걸 알면 속상해 하실겝니다.”
“…….”
그녀의 말에 창문 앞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조금 동요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앞에서 은영의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유진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이 통할 수 있는 것도 유진뿐이었다.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않을 것 같던 철옹성 같은 뒷모습이 결국 돌아섰다.
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오는 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유진이 9살 어린 날에 처음 마주쳤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수십 년이 지나 허리가 굽고 지팡이를 짚고 주름이 자글자글 져 이제는 시력도 좋지 않은 그녀와 달리 주름 하나 늘지 않은 얼굴과 바랜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모습.
마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무너지지 않던, 단단하고 성벽 같은 몸.
77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지금도 단 한 사람 외에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자식들도 손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유진은 제외였다.
은영이 살아생전 예뻐하던 유진에게 탄을 부탁했으니까.
유진은 아직도 주인님의 정체가 뭔지 몰랐다. 인간이 아니라는 건 곁에서 봐 왔기에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건 두 분을 모실 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금방 새로 내오겠습니다.”
“됐다.”
탄은 거절하며 식은 식사가 놓여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착실히 수프를 입에 집어넣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왼손 약지에는 여전히 루비가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유진은 똑같은 반지가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님의 손가락에도 끼워져 있었다는 걸 떠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정원도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으니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버티기 위해 정원에 해 두었던 월동준비들을 해체해야 했다.
“내가 하겠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예상했던 말이라 유진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주인님은 대공성의 정원만큼은 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으시고 손수 가꾸셨으니까.
이로써 마님이 없는 서른 번째의 봄이 대공성에 찾아왔다.
‘부디 올해는…….’
유진은 기도했다.
주인님의 기나긴 기다림의 끝이 오기를.
부디 주인님에게도 봄이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