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Leads Were Stolen by the Extra RAW novel - Chapter (158)
엑스트라에게 남주들을 빼앗겼다 (158)화(158/162)
<외전Ⅱ 6화>
레니아는 종일 기분이 뒤숭숭했다.
간밤에 꾼 꿈 때문에. 어젯밤 탄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차마 그 반지에 대해선 묻지 못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중 할아버지가 점점 젊어지다 탄의 모습으로 변했고 반지도 지금 탄이 끼고 있는 반지와 똑같았다.
레니아는 그 할아버지가 탄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건 그저 직감이었다.
어떻게 그 모습인 건지 설명할 순 없었지만 그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그에게 그 사람이 당신이 맞는지, 그 여자는 누구인지 묻지 못하였다.
탄의 입에서 맞다는 대답을 직접 듣는 순간 자신은 절대 표정을 숨길 수 없을 테니까.
꿈에서 본 거지만 알 수 있었다.
곁에 있던 같은 반지를 끼고 있던 할머니가 그에겐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꿈이어도 그 사람을 바라보는 탄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 있었다.
얼마나 소중한지 아끼고 아끼는 조심스러운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아……”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먼저 호텔 방으로 올라온 레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에 탄을 만나기로 했는데 이 기분이 티가 날까 걱정이었다. 최대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지금부터라도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똑똑.
“레아. 안에 있니?”
방문을 두드린 건 첫째 오라버니의 아내이자 메르엠 후작가의 장녀인 엔리케였다.
이번 가족 여행에 함께 온 엔리케는 오라버니의 아내이면서도 그녀와는 어릴 적부터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둘만 있을 땐 편히 말을 놓았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엔리케가 조심스럽게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엔리케. 무슨 일 있어?”
자리에 앉아 있던 레니아가 몸을 일으키며 놀라 물었다.
식사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엔리케는 어쩐지 불안하고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실은 걱정이 되어서…….”
“우선 앉아.”
그녀가 다정히 옆자리를 권유했다.
앞에 모은 두 손을 만지작거리던 엔리케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괜찮은 거야?”
“레아……. 나 있잖아…….”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엔리케가 말끝을 흐렸다.
혹시 오라버니와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어쩐지 예삿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레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
“응. 괜찮아, 엔리케. 말해 봐.”
레니아가 엔리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긴장한 건지 엔리케의 손이 찼다.
더 걱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임신이래.”
“응, 임신…… 으응?”
레니아가 맞장구를 치다 놀라 큰 눈을 끔뻑거렸다.
“이제 5주래.”
“축……!”
레니아는 목 끝까지 차오른 축하한다는 말을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임신을 했다고 고백하는 엔리케의 얼굴이 퍽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초조하고 슬퍼 보였다.
“그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 이유를 엔리케가 말했다. 놀란 레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엔리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엔리케. 나 봐 봐. 그럴 리가 없잖아. 너와 오라버니의 아이인걸. 세상 그 누구보다 기뻐할 거야.”
레니아는 마주친 엔리케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고 손을 더욱 꽉 잡아 주었다.
겪어 본 적도 없는 마음이건만 어쩐지 엔리케의 지금 심경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이해가 되었다.
축복받을 일이 마땅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본인과 똑같은 마음과 생각이 아닐까 봐 두려운 그 마음.
‘……영아. 나는 두려워.’
순간 레니아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립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걱정된다. 혹시라도 네가 아플까, 그 존재가 너를 갉아먹을까 봐.’
이건 무슨 소리지?
마치 저에게, 제 배 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 알게 된 그 사람이 말하는듯한…….
“그이가 나만큼 기뻐하지 않으면…….”
“무슨 소리야.”
혼란스럽던 레니아는 엔리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어. 다만 걱정할 순 있을 거야. 임신과 출산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 너를 힘들게 할 테고 아프게 할 수 있을 테니까.”
훌쩍훌쩍 우는 엔리케의 손을 쓰다듬으며 레니아는 오라버니가 느낄 마음을 전해 주었다.
방금 전해 들은 목소리를 떠올리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해 기뻐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파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럴까……?”
“물론이지. 너 오라버니를 몰라?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레니아는 진심으로 엔리케를 위로해 주며 북돋아 주었다.
마음이 진정된 엔리케는 용기를 내어 오라버니에게 얘기를 하러 가겠다고 방을 나섰다.
“……이상해.”
엔리케가 떠난 후. 방 안에 홀로 남은 레니아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엔리케의 상황이 낯설지가 않았다.
언젠가 이 고민을 자신도 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을 끼고 있는 언덕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있었지만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언덕 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멀어서 눈 코 입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이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탄이 서 있었다.
언제나 이곳을, 언제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처럼.
* * *
레니아는 지체 없이 호텔을 나와 마차에 몸을 실었다.
확인해 볼 것이 있었으니까.
호텔을 나오면서 엔리케의 임신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안고 기뻐하다 이내 걱정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았다.
역시나 기쁨과 동시에 걱정이 앞서는 마음일 거라는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새 생명을 몸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런 생각을 할 테니까.
그 누구처럼.
“여기서 더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네. 감사해요.”
마차에서 내린 레니아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높은 동산을 올려다보았다.
마차가 다닐 길이 없어 직접 올라가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야 했다. 만나서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째서 왜 자꾸 이런 기시감이 드는 건지. 당신이 혹시 전에 나를 알았던 건지.
혹시 제가 그 꿈속에…….
“어? 언니!”
순간 누군가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삼촌 만나러 온 거예요?”
제이니였다.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제이니가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응. 저 위에 계시지?”
“네. 삼촌은 높은 곳을 좋아하거든요.”
“…….”
“그래서 맨날 우리 집에서도 가장 높은 방에서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걸요.”
그 말에 레니아의 시선이 절로 높은 언덕 위를 향했다.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담은 그녀의 고동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동시에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울컥하여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유진 말로는 삼촌의 습관이래요.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한 습관. 유진은 제 유모이자 삼촌을 모시던 사람이에요.”
“습관…….”
“네. 어떤 말 때문에 생긴 습관인진 안 말해 줘서 저도 몰라요. 그치만 중요한 말이랬어.”
“…….”
그 순간 레니아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가려져 있던 기억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추억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필름처럼 연결되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눈을 감아서도 그가 자신에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이렇게나 생생한데.
깨닫고 나니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그래서 유진이 내게 부탁했거든요. 그동안 삼촌이 외롭지 않게 옆을 지켜 달라고…… 언니? 울어요?”
조잘조잘 얘기를 늘어놓던 제이니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레니아가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으니까.
“왜냐하면 마중 나오겠다고 했거든.”
“네? 마중이요?”
“가장 먼저 마중 나오겠다고. 당신을 찾아올 나를.”
“그게 무슨…….”
“제이니.”
그제야 레니아는 제이니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이 얼굴.
“고마워. 그의 곁에 있어 줘서.”
울면서도 제이니를 향해 웃어 보인 그녀는 그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박차 언덕을 향해 뛰었다.
“언니! 언니!”
“쫓아가지 마.”
놀란 제이니가 뒤쫓으려 했으나 언제 온 건지 맥라이언이 손을 붙잡았다.
“그렇지만…….”
“기나긴 약속을 지키러 가는 거니까.”
맥라이언은 드디어 그에게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레니아는 언덕을 뛰어오르고 또 올랐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어찌나 펑펑 흐르는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지는 시야에 몇 번이나 팔로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지?
잊지 않겠다고 했잖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오래 기다리지 않게, 금방 찾아가겠다고 맹세했잖아.
미안함과 고마움에 그리고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태어난 그녀가 새로 생긴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지내고 있을 때 그는 홀로 그 방에 남아 자신만을 기다렸을 걸 생각하면 저절로 가슴이 미어졌다.
차디차고 외로운 시간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하고 보냈을 생각을 하면, 그것도 모르고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잘 살기만 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목이 메어 왔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습관이 생긴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레니아는 알았다.
탄아 왜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습관이 생긴 건지.
‘엇갈리지 않게 당신을 만날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하지마. 날 찾아오기만 해. 그렇다면 내가 가장 먼저 널 마중 나갈 테니까.’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 탄이 그렇게 약속하듯 속삭였었다.
가장 높은 곳.
한눈에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억을 가진 채로 자신에게 돌아올 그녀를 마중 나가기 위해서.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언덕을 오른 레니아의 시선 끝에 탄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조용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넓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뺨에 묻은 눈물을 슥슥 닦고 걸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자꾸만 흐르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미련하게 계속 그러고 있던 거예요?”
“레니아?”
인기척을 못 들을 리 없는데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건지 그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가 표정을 굳힌 채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가 봐도 펑펑 운 것 같은 그녀의 벌게진 눈가를 보았으니까.
“왜 운 거지.”
채근하듯 물어오는 목소리와 다르게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고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에 참았던 게 무색할 만큼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찾아오지 그랬어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다 얘기해 주지 그랬어요.”
“…….”
“흡……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너무 행복했네요.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 잘살고 있었네요…….”
“은영아.”
우는 그녀의 모습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에서 저절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흐흑…… 미안해서 어떡해요. 금방 찾아오겠다고, 당신이 오래 기다리지 않게 내가 금방 찾아가겠다고 해놓고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어떡해요…….”
그녀는 잊히지 않는 자신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다시 흘러나온 게 이토록 좋다가도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웃으면서 보고 싶었는데…….
꼭 다시 만날 땐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면서 만나고 싶었는데.
지난 생을 마감하며 그의 곁에서 눈을 감을 때 다시 만난 그의 옆에서 나 돌아왔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었다.
바보같이 지금까지 가장 잊을 수도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을 잊고서는.
“은영아.”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달래듯 어루만지는 그 목소리에 그녀는 엉엉 울었다.
그 와중에 행여나 쓰라릴까 손으로 살살 문질러 눈물을 닦아 내는 그의 행동이 애틋해서 더 눈물이 났다.
“괜찮아. 나 좀 봐 봐. 응?”
“…….”
“나 좀 봐 줘.”
그 소리에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울던 그녀가 시선을 들었다.
떨리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자신을 꼭꼭 담으려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야 그의 얼굴이 보였다.
동시에 그녀는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이 순간만을 위해 오래도록 홀로 기다리고 기다렸을 외로움이 단번에 벅참으로 뒤바뀌는 그 순간을.
“괜찮아.”
그는 정말로 모든 게 괜찮다는 듯 다 상관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결국 왔잖아.”
손등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던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니까 괜찮아.”
단 한순간도 잊어 본 적 없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 만져 보았다.
둥근 이마도 눈썹뼈도 퉁퉁 부었지만 그대로인 눈도 오뚝하고 높은 콧대도 보드라운 입술까지.
손안에 느껴지는 촉감은 허상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가 그를 찾아왔다. 다시 그의 곁으로.
“그냥 안아 줘.”
“…….”
“그거면 돼.”
그 말에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두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탄도 되찾은 그 작은 품을 세게 끌어안은 채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가녀린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두 사람은 하나가 된 것처럼 서로를 틈 없이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내 그의 얼굴이 닿은 그녀의 어깨가 젖어 갔다.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다.
그녀가 죽을 때도 울지 않았던 그가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