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Leads Were Stolen by the Extra RAW novel - Chapter (34)
엑스트라에게 남주들을 빼앗겼다 (34)화(34/162)
<34화>
* * *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인기척도 없이 등장한 그림자가 커튼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혔다.
“게일, 뭐 전해 들은 거 없어?”
“없습니다.”
“하, 진짜!”
그레이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과 다관을 쓸어 버렸다.
하얀 테이블보가 쏟아진 찻물로 선명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아악!”
솟구치는 짜증에 몸부림치던 그레이스가 순간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 기고만장한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냐고! 더는 못 기다린다고 전해! 당장!”
그녀의 재촉에 게일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가지고 있던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파란빛과 함께 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게일이 서 있던 자리는 깨끗해졌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 커튼만 살랑이며 흔들리고 있을 뿐.
애초에 누구도 이 방에 방문한 적 없는 듯이.
“밖에 누구 없어!”
혼자 남은 그레이스는 씨근덕거리다 문을 향해 바락 소리 질렀다. 게일을 부르기 전에 거리를 두게 한 적이 없다는 듯이.
하여간 굼뜬 것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하나도.
“네, 네! 아가씨! 부르셨어요?”
벼락같이 날아든 부름에 사용인 하나가 방문을 열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눈을 장식으로 들고 다녀? 이거 안 보여? 당장 치워!”
그레이스는 벌레 보듯 사용인을 내려다보며 턱짓했다.
앳된 얼굴을 가진 사용인은 혹시라도 아가씨께 꼬투리를 잡힐까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닌지 태도와 일 처리가 능숙했다.
“하, 감히…….”
그레이스는 어제 만난 셀로니아를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모든 걸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그나저나 그 남자는 누구지?”
씨근덕거리는 그녀는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남자.
이안보다 더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처음이었다.
이름이 탄이라고 했던가? 게다가 맥라이언을 손쉽게 상대했지?
아무래도 알아봐야겠어.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흥미가 돌았다.
“아가씨, 체르빌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팔짱을 낀 채 사용인을 감시하고 있던 그레이스가 방문 너머로 들려온 소식에 놀란 얼굴을 하였다.
미리 언질도 받지 못한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얼른 사용인들을 소집하곤 화장대 앞에 앉았다.
“더 빨리. 더!”
그들은 아가씨의 재촉에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치장을 도왔다.
그레이스는 마음이 급했다. 이안은 기다림이라는 걸 모르는 남자이기에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그레이스.”
그때였다.
참을성도 없이 이안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공작님, 응접실에 계시면 제가 갈 텐데요.”
아무리 약혼자라 할지라도 여자의 방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실례였다.
그 오만하고도 무례한 태도에 그레이스는 주름지려는 미간을 다잡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서.”
한달음에 그레이스 앞까지 걸어온 이안이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 안았다.
예고도 없는 스킨십에 가벼운 그녀의 몸이 그의 품으로 훅 딸려 갔다.
그레이스는 이안에게 안겨 사용인들을 향해 눈짓했다.
축객령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우르르 나가자 방 안엔 단둘뿐이었다.
“일이 많아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군.”
이안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봤다.
기사단 일이 바빠 이틀 만에 얼굴을 본 약혼녀의 얼굴은 조금 야윈 것 같았다.
“요즘 순찰서에서 끝없이 실종 보고가 올라와서 실태를 파악하느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어제 맥라이언과 외출은 잘했나?”
“네. 그럼요. 잘 다녀왔답니다.”
그레이스는 눈꼬리를 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듣자 하니 베스인 영애와 마주쳤다던데?”
“아……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레이스가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가련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이안이 그레이스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레이스, 걱정하지 마. 아무리 베스인 공녀라 할지라도 내 약혼녀에겐 함부로 하지 못해.”
“그럼요. 전 누가 뭐라 해도 제국의 구원자, 공작님의 약혼녀인걸요.”
순간, 그레이스의 눈매가 같잖다는 듯 일그러졌으나 아주 찰나였다.
그녀는 여전히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이안도 그 미소만을 보았다.
“그래. 그대는 나만 믿으면 돼.”
이안은 제 품이 쏙 안기는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한 이 몸이 좋았다.
자신의 손짓에, 행동에 군말 없이 따르는 이 몸이.
“그런데 그대의 방은 올 때마다 변해 있는 것 같군.”
“어머. 곧 계절이 바뀌니 커튼을 바꿔 보았어요. 그래서 분위기가 다르게 보이나 봐요.”
“흐음.”
이안은 미심쩍은 눈으로 방 안을 살폈다.
그레이스의 말대로 커튼이 달라지긴 했으나, 커튼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만 해도 저번과는 달랐다.
심지어 바뀐 샹들리에는 황궁에 납품하는 것으로 유명한 클래시 공방에서 하반기 한정품으로 낸 것이었다.
어째 그레이스의 씀씀이가 나날이 커져 가는 것 같았다.
베넷 남작가의 재정 상태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안은 탐탁지 않았지만 말을 삼갔다.
씀씀이야 결혼 후 단속하면 그만이고 가계는 공작저에서 배우면 되니까.
“그보다 그레이스, 슬슬 날짜를 잡는 게 좋지 않겠어?”
“날짜라면……?”
그레이스가 설마 하는 마음에 옅게 흔들리는 눈을 들었다.
“결혼. 하루라도 빨리 내 아내가 되어야지.”
공식적으로 약혼 발표도 했겠다, 미룰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선 당신이 공작저에 들어오면 아버지, 어머니를 좀 더 자주 찾아봬야겠지. 공작 위를 양위하고 적적하실 테니 당신이 말동무가 되어 주면 분명 부모님도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야.”
그레이스가 그 말뜻을 모를 리 없었다.
체르빌 전 공작과 공작 부인은 원래부터 그레이스를 탐탁지 않아 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남작 가문의 영애라는 것.
그러니 이안은 그녀에게 결혼 후 제 부모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걸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차 한잔하면서 얘기 나눠요. 공작님 저희 가문의 다즐링 차 좋아하시잖아요.”
그레이스는 능숙하게 이안의 말을 넘기며 그를 창가로 안내했다.
그러곤 하인에게 늘 그가 이곳에서 마시는 다즐링 차를 내오라 명했다.
* * *
공작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셀로니아는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어머머. 이쪽을 보셨어!”
낙엽이 굴러가는 것에도 웃음을 짓는 학생들처럼 하인들이 불그스름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인기가 아주…….”
셀로니아는 빈정대며 눈앞에 남자를 쳐다봤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몰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탄은 관심도 두지 않고 책을 정독 중이었다.
‘엘라는 대체 저 책은 왜 준 거람?’
저 책은 엘라가 빌려준 책이었다.
어제부터 엘라와 탄이 대화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저 책을 빌려준 것이었다.
저 책을 봐서는 도저히 무슨 대화였는지 유추할 수가 없었다.
탄의 손에 들린 책 표지에는 <대공님은 그 하녀를 너무 좋아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으니까.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티 테이블에 앉아서 염문 소설을 읽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상당히 낯간지럽고 신기한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책 선정이 의아한데도 베론디에게 선물받은 옷과 멀끔하게 정돈된 머리로 다리를 꼰 채 책을 보고 있으니, 무슨 시사 잡지를 읽는 신사처럼 보이기는 착시 효과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대충.”
탄은 그렇게 말하며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어도 글은 읽을 줄 아는지 그는 몇십 분째 진지하게 책을 탐독 중이었다.
셀로니아는 이쯤 되니 탄이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야외 정원은 하인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나무 뒤나 수풀에 몸을 숨기긴 했으나 다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탄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틀 전, 하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고 들었다. 변신 아닌 변신을 하고 들어온 탄 때문에.
낡은 옷을 버리고 정갈하게 차려입은 데다, 그동안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그의 외모가 훤히 드러나자 갑자기 인기가 치솟은 것이었다.
게다가 기사단장인 루베우스를 이길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져 기사들도 그를 궁금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억을 되찾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사는 게 서로에게 더 이로울지 몰랐다.
그가 평범한 남자였다면 얼굴도 잘난 데다가 검술 능력도 출중하니 출세해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을 테니까.
“이게 뭐지?”
그때 탄이 보고 있던 페이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떤 거요?”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셀로니아는 혹시 그가 모르는 단어가 있는 건가 싶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그의 단단한 것이 파고들자 눈앞이 멀 것 같은 아찔한 감각에 시엘라의 눈에 눈물이 고……!]“우왁!”
놀란 셀로니아가 그대로 책을 덮어 버렸다.
엘라는 대체 이 책을 왜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