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e Leads Were Stolen by the Extra RAW novel - Chapter (87)
엑스트라에게 남주들을 빼앗겼다 (87)화(87/162)
<87화>
“대공! 대공! 어서 나와 나를 맞이하여라!”
“하아.”
그칠 줄 모르는 황녀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난 탄이 인상을 구겼다.
저 빌어먹을 여자가 편지를 보내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집까지 쳐들어온 것이었다.
“대공! 여기 있는 거야?”
그때 응접실의 문을 막무가내로 열고 티타니아가 등장했다.
그 뒤로 차마 이 상황을 말리지 못한 황녀의 시녀와 대공저의 하인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흐음. 이건 무슨 조화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 티타니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 손님이 공녀와 성기사일 줄은 더더욱 몰랐으니까.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레예프와 셀로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티타니아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탄은 바위처럼 가만히 제자리에 앉은 채로 티타니아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공녀는 왜 대공저에 있는 거야?”
티타니아는 탄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이 한 소파에 붙어 앉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도끼눈을 떴다.
“대체 뭐야. 공녀는 왜 자꾸 대공과 함께 있는 거지? 둘이 무슨 사이라도 돼?”
추궁하듯 티타니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축하연에서 셀로니아와 탄이 춤을 추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 지금도 함께 있다니. 그것도 사적인 공간인 대공의 저택에.
“이봐. 당장 내 집……!”
“대공님과 레예프 경이랑 함께 의논할 게 있어 들렀습니다.”
탄이 티타니아에게 한마디 하려 하자 셀로니아가 바로 말을 가로챘다.
다 듣지 않아도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이 내 집에서 꺼지라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의논? 그게 뭐지?”
이유를 들었음에도 석연치가 않아 티타니아의 한쪽 눈썹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개인적인 것이라 말씀드리기 힘들다는 점 양해해 주시길 바라요.”
“그래?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니란 거지?”
황녀의 질문에 셀로니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정의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그의 입으로 직접 마음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
대답 없는 셀로니아를 보는 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저 입에서 당연하게도 나올 줄 알았던 말이 나오질 않고 있었다.
뭐지? 이 거지 같은 기분은.
그 침묵은 마치 언제든 그녀가 제게서 벗어나 도망칠 것처럼 느끼게 했다.
“내가 한 가지 일러두지. 이미 폐하께 말씀드렸거든. 대공과 혼인하겠다고.”
티타니아가 아주 자신감에 찬 얼굴로 거만하게 말했다.
오늘 탄을 만나기 위해 한껏 꾸민 그녀의 외모가 응접실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반짝거렸다.
셀로니아는 티 없는 티타니아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얼굴은 저런 것이구나, 라고.
그녀는 저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알아 두라고, 대공! 내가 친히 걸음을 해 주었으니 정원을 구경시켜 줘.”
셀로니아를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낸 티타니아는 고개를 돌려 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너와 혼인할 일은 없다. 착각 말고 딴 놈 알아봐.”
탄은 멋대로 구는 티타니아를 향해 화를 참지 않았다.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어, 어서! 에스코트하라고! 어서!”
사나운 탄의 눈빛에 움찔한 티타니아는 이내 그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해 생떼를 부렸다.
상당히 거슬리는 공녀 앞에서 자신 있게 대공과 혼인할 거라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의 한마디로 인해 혼자만의 망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내 말 안 들리나? 감히 황녀의 말을 무시해? 대공!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자꾸 이렇게 나온다면 대공이 황궁에서 내게 저지른 잘못을 좌시하지 않을 거야!”
꿈쩍도 하지 않는 탄을 보며 티타니아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제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결국 하루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친히 찾아왔건만, 사람을 이렇게 냉대할 수가 있는 건가.
제국의 황녀인 자신을 이리도 하찮은 짐짝 취급을 하다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모멸감이었다.
제국의 태양이라는 황제조차 황녀를 어여삐 여겨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주었으니까.
“대공님,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일어나세요.”
“너…….”
“어서요.”
탄이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 놀라 얼굴을 구기며 셀로니아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단호했다.
셀로니아도 지금 상황이 내키진 않았다.
탄이 황녀의 에스코트를 하는 게 싫었으니까.
하지만 티타니아의 말을 들어 보니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듯싶었다.
여차하면 토라진 황녀가 그걸 빌미로 탄의 뒤를 캐거나 해코지할까 봐 일이 커지기 전에 그를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탄,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하아…….”
셀로니아의 단호한 재촉에 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말고 있어.”
“…….”
“돌아가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
탄이 꼭 그녀의 대답을 듣겠다는 듯 셀로니아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말했다. 기다리고 있는 티타니아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알겠으니 어서 가 보세요.”
하는 수 없이 셀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도한 것처럼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탄이 티타니아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나쳐 걸어갔다.
“거기 안 서?!”
티타니아는 에스코트를 하라고 내민 자신의 손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탄을 뒤쫓았다.
* * *
“하여 아무래도 성수를 마시고 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레예프가 말을 마쳤다.
“…….”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셀로니아에게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탄이 황녀를 만나러 간 이후부터 멍한 얼굴이었다.
“셀로니아 님.”
“아, 네.”
조금 커진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셀로니아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들었어요. 성수에 정화 기능이 있는 모양이네요.”
레예프가 전한 말은 이랬다.
신성 의례를 종료하고 신전을 나온 날, 갑자기 몰아치는 고통과 함께 저에 대한 옛 기억과 감정이 떠올랐다고 했다.
연회 때 제가 내뿜은 치유술을 겪었을 때처럼.
그러나 곧 등장한 그레이스에 의해 마들렌을 받아먹었더니 혼란한 감정은 사라지고 그레이스에 대한 애정만이 남게 되었다고.
레예프의 추측으론 옛 기억과 감정이 떠오른 건 아무래도 의례를 종료하고 나오기 직전 마신 성수 때문인 것 같다 하였다.
오염을 정화한다고는 들었는데, 그레이스가 부린 술수도 정화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레예프, 성수를 구할 수 있나요?”
“순결하고도 강한 신성력을 통해 만드는 것이라 신전에선 필요한 양 외에는 제작하지 않습니다.”
“그럼 구하기 어렵겠네요.”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부족하면 신전에서 더 만들 것입니다.”
레예프가 뭐든지 하겠다는 결연한 눈빛을 빛냈다.
결국 그 말은 신전에서 성수를 훔쳐 오겠다는 뜻이었는데, 태도만 보면 무슨 적장의 목을 벨 것처럼 당당하고도 비장했다.
그 모습에 셀로니아는 픽 웃었다.
“옛 생각이 나네요.”
토벌 당시 괜찮다고 만류하였음에도 그는 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저도 그렇습니다.”
레예프는 간만에 본 셀로니아의 미소에 마음이 찡하고 울리는 느낌이었다.
이 미소를 지키고자 사명을 다해 노력했던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엉뚱한 사람을 위했다.
무언가에 씌었더라도 제가 아끼는 그녀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레이스와 이안의 약혼 소식이 신문에 실렸던 날.
레예프는 셀로니아를 언급하며 동요하던 맥라이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와 보니 암막에도 가려지지 못한 맥라이언의 진짜 감정이 잠시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분들껜 언제 알리실 예정이십니까?”
“기회가 되면요. 아무래도 붙잡고 치유술을 쓰는 것보단 성수를 먹이는 게 더 빠르겠어요.”
“최대한 빨리 구해 오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리고 이거. 혹시 궁금해하실까 가져왔습니다.”
레예프가 품에 가지고 있던 둥그런 통을 내밀었다.
“다즐링입니다. 그 영애가 제게 먹이고 선물해 주었던.”
“윽…….”
통을 열어 본 셀로니아는 바로 눈과 코를 찌푸렸다.
통에는 말린 다즐링 잎이 한가득 들어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악취가 무척이나 역했다.
“왜 그러십니까?”
“냄새요. 너무 역한데 이걸 어떻게 먹죠?”
“찻잎에서는 향긋한 내음밖에 나질 않는데 냄새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레예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어 오자 셀로니아가 흔들리는 눈을 들었다.
또다시 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