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15)
‘됐습니다.’
어젯밤. 샤비얀은 공작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 용기 내어 말했었다.
갑옷 벗는 걸 도와주겠다고. 그러나 공작의 답은 냉정했다.
“내가 미운 거야.”
샤비얀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그의 시야가 불투명한 천에 막혔다.
샤비얀의 침대 앞에 설치된 휘장. 그 너머론 막사의 흐린 실루엣만 얼핏 보일 뿐이었다.
고갤 이리저리 꺾으면 빈틈 사이로 막사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마저도 공작의 침상과 책상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내가 불편할까 봐 설치해 준 것일 테지만…….’
왜 공작 본인을 못 보게 하려고 설치해 둔 거 같지. 내가 보는 게 불쾌한 걸까.
‘나는 공작이 좋은데……. 내가 본 사람 중에 최고로 멋진데.’
속상한 샤비얀이 몸을 잔뜩 웅크리는 순간.
“에이씨! 망할!”
막사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것도 걸쭉한 욕까지 하면서.
샤비얀이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저 못생긴 게!’
샤비얀은 저 남자를 잘 알았다. 새벽에 물을 길어다 주러 오는 남자!
저 남자는 베르웬 공작이 있을 때만 쩔쩔매고, 공작이 나가면 물에다가 침을 뱉곤 했다.
“자기가 공작이면 공작이지! 왜 나를 이따위로 대하는 거야? 확 바하트로 망명이라도 해야지, 원!”
남자의 옆에는 기사들도 여럿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가 무서운지 백작을 돕는 척 헛손질만 했다.
절도 있던 공작의 기사들과는 매우 달랐다.
“너희들은 내 돈을 받아 처먹었으면서 날 안 돕고 뭐하는 거야!”
“……백작님을 돕지 말라는 공작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때.
막사의 입구를 누군가 톡톡 쳤다.
“백작님, 이제 저녁 물을 기르시러 가셔야죠.”
베르웬 기사였다.
검은 망토를 두른 베르웬 기사의 등장에, 막사 안에 있던 남자와 기사들의 기가 금세 죽었다.
“아, 알겠네!”
욕을 하던 남자가 다시 물통을 옮기는 시늉을 하더니, 베르웬 기사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물 하나 바꾼다고 얼굴이 바뀌나!”
“…….”
“생각해 보면 얼굴도 아주 못 돼 처먹게 생겼어. 공작이 나보다 훨씬 못생기지 않았나?”
공작이 못생겨?
샤비얀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공작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까.
“못생겼잖아! 어?”
남자의 노성에 기사들이 떨떠름하게 고갤 끄덕였다.
“……예에. 백, 백작님이 훠, 훨씬…… 쿨럭.”
헛기침하던 기사. 그가 아주 빨리 말을 속삭였다.
“잘생기셨지요…….”
샤비얀은 다소 충격받았다. 저 남자보다 못생겼다니.
저 번들번들한 기름기 낀 남자보다 더?
‘아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공작을 좋아하는 이유가 얼굴이었어?’
아니잖아.
샤비얀은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저었다.
내가 좋아한 건 공작의 무위와 친절함이야. 딱딱하지만 섬세한 면도 있고, 속도 깊은.
“그렇지? 하하하하!”
만족스럽게 웃던 남자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퉤.”
하며 물통에 침을 뱉었다.
‘저게 또!’
샤비얀이 하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기사가 쓸 물을 떠 오는 건 종자가 할법한 일이니 저자는 공작의 종자일 터. 공작의 종자는 아주 몹쓸 자였다.
‘내가 공작의 종자였으면 저렇게 안 할 텐데!’
자신이 공작의 종자였으면……!
갑옷도 반짝반짝 닦아 놓고, 망토도 다려 놓고. 물 위에다가 향기가 나도록 꽃도 올렸을 거다.
“그럼 가자.”
기사들을 달고 다니는 백작이 종자 노릇을 한다니.
의아하긴 했으나 하일렌은 다른가? 하며 샤비얀은 말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나도 황자지만…….’
백작이어도 상관없는 거라면 황자인 자신도 종자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침울했던 샤비얀은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아흐.”
아직 다리가 살짝 아렸으나, 많이 괜찮아졌다. 샤비얀은 다리를 절뚝이며 물통으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공작이 이 물을 쓰면 어째.’
공작은 새벽마다 밖에서 씻고 오기 때문에 길어 온 물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 저녁엔 사용할지도 모른다.
‘……무거워.’
샤비얀은 무거운 물통을 질질 끌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멀찍이 서서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샤비얀을 보고도 못 본 척 고갤 돌렸다.
‘켈리언 형님과는 달라.’
샤비얀이 바하트 진영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건, 켈리언의 기사들이 그를 방치했던 탓이 컸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감히 샤비얀이 탈출할 거라 생각도 안 했을 테지.
그에 반해 이곳은 자유로웠다.
그가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기사들은 묵묵히 샤비얀이 하는 대로 뒀다. 감시보다는 보호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끄응.”
그래도 이건 도와줘도 되는데.
물통을 들자 자연히 샤비얀의 팔이 후들거렸다. 마음 같아선 막사 앞에 쏟아 버리고 싶었다.
하나 혹시라도 공작의 신발에 진흙이 묻으면 안 되니, 멀리 있는 시냇물에 버릴 생각이었다.
쉬었다가 다시 움직였다가. 또 쉬었다가 걸었다가 한참을 가서야 시냇물을 발견했다.
‘어, 저기는!’
물을 버리던 샤비얀이 뭔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그 오두막이잖아!’
공작과 있었던 오두막이었다.
막사를 근처에 지었구나. 반갑게 오두막을 보던 샤비얀의 볼이 갑자기 빨개졌다.
더, 더 만져…….
‘안 돼!’
생각하지 말자.
샤비얀이 필사적으로 그때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도리질 치는 사이.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공작이었다.
***
여기까지 왜 나와 있는 거지? 다리도 아프면서.
시냇물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갤 도리도리 젓고 있는 샤비얀을 내려다봤다.
옆에는 데토가 물을 떠 왔을 물통이 비어 있는 채로 놓여 있었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거, 손 많이 간다. 진짜.
내 등장에 샤비얀이 토끼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빈 물통을 꼬옥 손에 쥐고는 내 뒤를 졸졸 따랐다.
“제, 제가 타겠습니다.”
말 앞에 선 샤비얀이 말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자,
이힝-.
말이 제 몸을 알아서 낮췄다. 저건 볼 때마다 신기하네.
“타, 타시지요.”
알아서 자리를 잡은 샤비얀이 날 내려다봤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만.
“예.”
나는 잽싸게 말에 올라탄 후 말을 이끌었다.
어제 샤비얀을 데리고 야밤에 달렸던 길은 낮이 되자 또 다른 풍경을 그려 내고 있었다.
적당한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에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근데 왜 이렇게 졸리지.’
어제도 느낀 거지만, 샤비얀과 붙을 때마다 이런다니까.
평소엔 잘 자지도 못하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나는 고삐까지 풀고, 그냥 말이 알아서 가는 대로 뒀다.
“공작님.”
뒤에 붙어 있던 샤비얀이 내 허릴 잡았다.
“호, 혹시 종자를 바꾸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종자?
아. 데토를 말하나? 헤센 백작?
“……예.”
그자는 벌을 받고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제 종자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기엔 귀찮았다. 노곤하기도 했고.
“워, 원래 수발은 받아 본 사람이 잘 드는 법인데…….”
샤비얀은 이후로도 이상한 말을 주절거렸다.
자신이 꼼꼼해서 군화나 갑옷도 잘 닦는다, 다리가 나으면 물도 기를 수 있을 거다, 갑옷도 잘 벗길 수 있다…….
“각하!”
그렇게 포근한 볕을 맞으며 거의 졸다시피 막사에 다다랐을 때, 다급한 표정의 기사가 다가왔다.
“뭔가?”
꽤 심각한 표정이라, 나른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바하트 황태자 측에서 비공식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준비되시는 대로 만나길 희망한답니다.”
켈리언의 얘기에 샤비얀이 내 옷자락을 세게 끌었다. 그만큼 켈리언이 무섭다는 거겠지.
“알았네, 곧 준비하지.”
나는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든 샤비얀의 손을 두드려 줬다.
나조차도 켈리언을 봤을 때 그 기세에 놀랐는데, 심약한 샤비얀에겐 얼마나 두렵겠어.
“고, 공작님.”
말에서 내린 뒤 샤비얀을 안은 채 막사에 들어섰다.
안고 있던 샤비얀을 침대에 눕히려는데, 그의 팔이 내 목을 감쌌다.
“저, 저 보내시면 안 돼요…….”
샤비얀이 간절하게 날 올려다봤다. 그의 손이 잡을 곳 없는 내 갑옷만 쓸었다.
“예. 안 보내겠습니다.”
어지간히 켈리언이 무섭나 보다.
나는 괜찮을 거라는 의미를 담아 샤비얀의 머리를 살짝 다독이며 웃었다.
물론 투구 탓에 안 보였겠지만.
***
“황태자께 알려라. 내가 왔다고.”
최종 협정안까지 검토를 끝내니 벌써 밤이었다.
나 역시 이 협정을 빨리 끝내고 싶었기에, 더는 미루지 않고 무작정 켈리언의 막사로 쳐들어갔다.
“정중히 모시라는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내 등장에 사라졌던 기사가 곧 돌아왔다.
“그리고 들어오시기 전에 예를 갖추시랍니다.”
예를 갖춰?
저번에 투구 안 벗었다고 뭐라 했던 게 뇌리를 스쳤다. 뒤끝 있네. 진짜.
그래도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분란 일으키고 싶지 않아, 순순히 투구를 벗었다.
“왔나?”
막사에 들어서던 걸음을 뚝 멈췄다. 내가 불시에 들이닥친 건 인정하지만.
“술맛이 더 사는군.”
옷은 잠가, 좀!
켈리언이 걸친 붉은색의 화려한 침의는 앞섶이 훤히 열려 있었다.
침침한 불빛 아래에서 켈리언이 느릿느릿하게 술을 들이켰다. 마치 내 얼굴이 안주라도 되는 양.
“한잔하겠나.”
“됐습니다.”
내 사양에도 켈리언은 빈 술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술병을 기울이는 켈리언의 표정은,
마시게 될걸? 이런 느낌이었다.
“알려 드린 대로 8황자 전하는 저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 내 수하 놈들이 죄다 병신이 됐던데. 자네의 솜씨 같긴 했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8황자 전하를 쫓는 노예 사냥꾼으로 착각했습니다.”
“노예라……. 틀린 말은 아니지.”
켈리언이 몸을 일으키자, 가슴팍의 큰 흉터가 언뜻 보였다.
어. 저건 로잘린한테도 못 들은 정보인데?
“이리 내 보게.”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켈리언이 내 손에서 돌돌 말린 협상안을 뺏어 들었다. 귓가 바로 옆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잘 검토해 보겠네.”
이런 장난도 저번보단 한결 편했다. 왜냐하면 이번엔 켈리언의 눈이 까맸으니까.
저번에는 왔다 갔다 난리더니.
오늘은 어디서 특훈이라도 받고 왔나.
“예. 그러십시오.”
본심과는 완전 달랐다. 대충 봐라. 대충 보고 얼른 서명이나 해.
내 소원대로, 켈리언은 한쪽 발을 침대에 올린 채 서류를 대충 뒤적거렸다.
“2번 조항은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군.”
하지만 그가 서류를 대충 본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종이를 대충 넘기는 걸 보고 아예 읽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2번뿐만 아니라 3번, 5번, 7번. 8번도 그렇고. 하일렌엔 순 날강도만 있나.”
모든 걸 간파했다.
어떻게 알았지? 켈리언이 말한 그 조항은 참모진이 머리를 굴려, 애매하게 말장난해 놓은 구간이었다.
“그러나.”
침대 위에 차려진 술상. 켈리언이 그 위에 아까 따라 놓았던 잔을 살짝 밀었다.
“그대가 이걸 마시면 2번 조항은 그냥 넘어가 주지.”
켈리언이 포도주가 든 잔을 턱짓했다.
그의 진한 옆선이 막사의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더 도드라졌다.
“우리 딱딱한 공작은 어찌하려나. 술 한 잔에 배상금 앞 단위가 달라질 텐데.”
켈리언이 손에 쥔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나에게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술 한 잔에 배상금 앞 단위.
당연히 옳다구나 마실 법한 제안이지만.
‘술을 마시면 흑마법이 풀릴 수도 있는데…….’
내 유일하고도 강력한 약점.
흑마법.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