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27)
황제의 불편한 심기에,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침만 꼴깍 삼켰다.
레시우스가 역대 하일렌 황제 중 가장 순한 성군이라고 하지만.
‘그 역시 대륙의 반을 다스리는 제국의 군주지.’
하일렌 제국을 비롯해, 주변 왕국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황제이자 통치자.
레시우스가 마음만 먹으면 작은 도시 국가쯤은 하루 안에도 멸망시킬 수 있다.
이곳 그 누구도 레시우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은 자는 없다.
“하일렌 제국의 태양. 레시우스 드 하일렌 황제 폐하 납십니다!”
레시우스가 들었던 손을 걷자, 참았던 의전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렁찬 목소리는 살짝 겁먹었는지 떨리고 있었다.
탁-.
레시우스의 발소리가 유달리 크게 연회장을 울렸다.
느긋하고 정갈하지만 왠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탁-.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내려온 레시우스가 연회 홀의 바닥에 발을 디뎠다.
“하일렌의 태양을 뵙습니다!”
넘긴 금발 탓에 진해진 이목구비. 먼지 하나조차 없을 거 같은 순백의 연회복.
겉보기로는 냉혹한 군주 그 자체인 모습에 귀족들이 재빨리 예를 갖추었다.
“오늘은.”
레시우스의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몸을 낮춘 귀족들을 훑었다.
“바하트 제국과의 친선을 돈독히 해야겠군.”
레시우스가 걸어오며, 날카롭게 웃었다.
곧 나를 본 그가 경직된 눈매를 부드럽게 풀었고.
“아니 그렇소. 황자?”
나긋한 어조로 샤비얀의 앞에 섰다.
하일렌 식의 인사를 몰라 어정쩡히 몸을 낮춘 샤비얀의 앞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야. 레시우스 왜 저래?’
느낌이 이상했다.
레시우스는 오자마자 샤비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앞에 섰다.
‘설마 레시우스가 샤비얀한테 첫눈에 반했나?’
평소 레시우스와 분위기랑 행동도 조금 달랐다. 조금 덜 정제되고 위압적인 느낌.
만약 레시우스가 샤비얀을 보고 원작의 성격이 튀어나오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그럼 안 되지!’
나는 레시우스와 샤비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폐하, 폐하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연회에는 외교 사절단도 많이 참석해 있었다. 관례상 그들을 만나는 게 먼저였다.
“공작이 그렇다 말하면 그리해야지.”
샤비얀을 가리고 선 나를 보며, 레시우스가 눈가를 희미하게 떨었다.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간 채 레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황자와는 나중에 인사해야겠군.”
그가 경직된 낯으로 웃으며 등을 돌렸다.
하얀 연회복과 달리 금사로 휘황찬란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레시우스는 단상으로 걸어갔다.
‘너…… 어디 급해?’
이내 레시우스는 빠른 속도로 기계적으로 외교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리고 곧 그 순간이 돌아왔다.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샤비얀에게 레시우스의 부름이 떨어진 것이다.
“하.”
이제 어쩌지.
티는 안 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단상으로 올라가는 샤비얀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마주친 레시우스의 시선.
날 보던 그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마치 화를 참는 사람처럼.
“[어떡해?]”
“[그니까.]”
어느새 로잘린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단상 위의 두 사람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시우스가 샤비얀한테 첫눈에 반했나 봐.]”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연회에서 의례적인 활동 아니면, 사람들에게 딱히 관심을 안 주던 레시우스였다.
근데 첫 만남에 홀린 듯이 와서 인사까지 하고, 이렇게 불러낸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안 하던 짓을 하잖아.]”
딱 봐도 관심 있어 보이잖아. 샤비얀한테.
“[로잘린 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마치 운명처럼 결국은 원작대로 흘러가게 되는 걸까.]”
나는 단상 위의 레시우스를 바라봤다.
그는 웃으며 샤비얀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쉽게 반한다고……?
“[그런데 언니.]”
“[응.]”
“[근데 나는 레시우스가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열등감 같지 않아?]”
“[어?]”
“[지금 레시우스가 샤비얀한테 열등감 느끼는 거 같지 않냐고.]”
레시우스가 열등감을? 말도 안 돼.
“[하긴. 우월하게 태어나 탁월하게만 살아온 레시우스인데 열등감이라니.]”
로잘린도 제 말이 우스웠는지 머리를 옅게 저었다.
“[아무튼 언니는 샤비얀을 맡아! 나는 레시우스를 맡을게. 우선은 서로 관심 못 갖게 주의를 돌리자.]”
그러곤 단상에서 희게 질린 채 내려오는 샤비얀을 내게 맡겼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실수임을 곧 깨달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남들 시선도 다 내팽개치고 나는 샤비얀을 돌보기 시작했다.
물론.
“괘, 괘, 괜찮습니다.”
레시우스를 보고 온 후 더 달달 떠는 샤비얀 덕에 난 주위 시선을 더 받고 있었지만.
“힘드시면 들어가 쉬시지요.”
그래. 차라리 냉궁에 돌려보내자 싶은데도.
“그,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조금 조용한 곳으로 가는 건 어떠십니까?”
“그, 그, 그것도 안 됩니다!”
냉궁에도 안 돌아간다. 사람들 많은 곳에 있겠다.
샤비얀이 이리 주장하는 탓에 나는 사람들 시선 속에서 그의 곁을 지켜야만 했다.
“공작님이 왜 저리 8황자를 살피실까요? 가뜩이나 황녀 전하도 계신데.”
“흐음. 황자도 썩 원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지금 이 상황은 여러모로 나한테 곤혹이었다.
“오라버니. 우리 어렸을 적 기억하나요? 예전에 공작님이…….”
로잘린 쪽도 순탄치는 않았달까
레시우스는 로잘린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한시도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왜 계속 보냐고!
나는 샤비얀을 슬쩍 몸으로 가렸다. 레시우스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리다가.
“전하. 이쪽으로 가시죠.”
내가 발이 불편한 샤비얀을 에스코트하며 부축하는데. 결국.
“공작님. 황제 폐하께서 따로 보자고 하십니다.”
레시우스의 호출이 떨어졌다.
끙. 나는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시종을 따르면서도 로잘린과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이젠 내가 레시우스를 맡고, 로잘린이 샤비얀을 맡으면 되겠지.’
시종을 따라 다다른 곳은 연회가 열리는 유리 궁 그 안에 있는 접견실.
“부르셨습니까.”
연회 목적으로 지어진 궁이라 방 하나조차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자줏빛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레시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르윈.”
그가 왠지 핏줄이 선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 말은 내가 묻고 싶다. 넌 왜 그렇게 샤비얀을 빤히 보는 건데?
샤비얀을 막아선 내 등이 따끔할 정도더라.
“네가 그렇게 황자를 감싸고 돌면 어떤 말이 나올 줄 몰라서 그래?”
레시우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더욱이.
“너 그런 오해 싫어하잖아.”
레시우스가 소파에 다시 힘없이 앉았다.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오해.’
나와 레시우스는 여타의 친구 사이보다 더 친밀하긴 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전생 탓에 레시우스가 마냥 애 같았고, 그는 빨리 어머니를 여읜 터라 응석이 많았으니까.
‘황태자와 공작이 친구라니. 요새는 남색을 그리 부르나 보오?’
그러니 이런 말이 도는 건 당연했다.
그때 나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레시우스를 피했었다.
“예전에 너와 나랑 그런 얘기 돌았을 때 넌…….”
레시우스가 하관으로 손을 내리며, 날 바라봤다.
“너 그때 나 몇 달은 안 봤어. 그거 알아?”
그래, 그랬었지. 그때는 소드마스터가 되기 전이니까.
‘우리 남들 보는 데선 이러지 말자.’
‘왜?’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뭐가?’
‘사내끼리 이러는 거.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해.’
‘……너는? 너도 이상하게 생각해?’
그때 나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히 레시우스가 잡은 손을 뺐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냐고!’
BL 속 세상이라, 남색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해도.
‘여자인 게 들키면 나는 죽을 수도 있는데…….’
남장한 나한테는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이 나올 어떤 가능성도 다 차단했다. 목숨이 걸렸으니까.
“……그때랑 지금 다르잖아.”
지금은 내가 소드마스터잖아.
여자는 마나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 이 세계의 정설. 이 탓에 이제 소드마스터인 나를 의심할 이는 없었다.
그리고 겉보기엔 로잘린의 연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나를 여자라고 의심하겠나.
“뭐가 그때랑 다른데?”
레시우스가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저자도 남자고 나도 남잔데. 뭐가 다른데?”
“어?”
“난……. 난 뭐가 다른데?”
레시우스가 내게 등을 보이며 일어섰다. 내가 그의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에.
“난…….”
레시우스 한숨 같은 말을 채 맺지도 않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
그 시각. 연회가 한창인 유리 궁.
로잘린은 사라진 샤비얀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화장실 간다던 그가 사라진 것이다.
‘어딜 간 거지? 길 잃었나?’
로잘린이 복도의 화분을 들췄다. 끄응. 무겁네. 언니라면 한 손으로도 들 텐데.
레시우스는 언니와 있으니 한참을 둘이서 있겠지. 워낙 죽이 잘 맞으니.
“전하.”
그 순간 로잘린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제프였다.
“뭐 하십니까?”
“그게…… 바닥 좀 보려고요.”
로잘린이 큰 화분을 제자리에 뒀다.
“황녀 전하는 항상 특이한 행동을 하고 계시는군요.”
요제프 그는 ‘제2막 황녀의 외도’에서 외도 남을 맡아 줘야 하는 자다.
그래서 그를 시시각각 따라다니며 설득했지만 계속 물먹는 중이었다.
“그쪽만 아는 사실이니까.”
그러다가 제 천방지축인 성격도 들켰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죽어요. 진짜.”
로잘린이 음산하게 말하며 제 목을 손날로 그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내가 해 달라는 건 안 해 줄 거라면서요!”
로잘린을 따르던 요제프가 복도에 난 문을 열었다.
“……천천히 얘기해 보시죠.”
로잘린은 제 처지가 아쉬운 터라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곧.
“꺄아! 해 준다고요?”
“네. 처음엔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납득이 안 갔을 뿐입니다.”
“꺄아아! 이럴 거면 왜 튕겼어요?”
“외도하는 척해 달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근데 공작에게 복수하려는 의도이신 거 같아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외도하는 척 공작에게 맞바람으로 복수하려는 거죠?”
“꺄아아-!”
데시벨이 높아지는 로잘린의 소리에 요제프의 소리가 묻혔다.
감정이 격해진 로잘린이 요제프를 마구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텅 빈 복도를 걷던 샤비얀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뭐였지?’
하지만 곧 다시 심란함에 빠졌다.
흑마법사의 지시가 있었다. 연회에 참석해, 공작에게 물약을 먹이라는.
‘공작님과 붙어있지만 않으면 돼.’
그러면 물약을 쓸 기회가 없는 거니까.
명령을 이행하려 했지만 기회가 안 됐다 하며, 샤비얀은 변명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근데.
탁-.
샤비얀의 근처에 있던 문이 열렸다. 그가 큰 화분 뒤에 몸을 숨겼다.
왜 몸을 숨겼을까.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찰나.
샤비얀은 너무 놀라 숨을 쉬는 것조차 까먹었다.
“요제프 경.”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열린 문으로 부스스한 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그의 손이 풀린 위쪽 단추 하나를 다소 빠르게 채워 냈다.
그리고 뒤따라 나온 사람은 남자와 달리 멀끔한 차림새였다.
“그럼 다음에 봐요.”
황녀 전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