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28)
‘이걸 어쩌지.’
유리 궁 옆의 별관.
정문을 서성이던 샤비얀이 손톱을 쥐어뜯었다.
‘분명, 황녀 전하와 다른 남자가 한 방에서 나왔어.’
샤비얀이 아무리 칩거하는 이름뿐인 황자라도 연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안다.
“하하하. 이리 오시오.”
“정말 엉큼하긴.”
술 취한 귀족들이 궁전의 빈방에서 어떤 추태를 부리는지도 익히 들어왔다.
‘애초에 같은 방에 있었던 사실이 이상하잖아.’
샤비얀은 이 사실을 공작님께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아냐.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샤비얀이 생각을 정리하려 정원으로 발을 옮기는데.
“폐하!”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황제의 뒤를 수십이 따라붙고 있었다.
황급히 황제의 앞을 밝히는 불빛에 의해, 무섭도록 시린 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하일렌의 황제야.’
샤비얀은 황제를 보자마자 주저앉아 몸을 숨겼다.
‘바하트에선 예절 교육을 그딴 식으로 가르치나 보오?’
해사하게 웃는 낯과는 달리 황제의 눈빛은 맹수의 안광처럼 번쩍였었다.
무정한 녹빛의 눈동자가 샤비얀을 위압적으로 내리누르는 듯했다.
음절 마디마디를 짓씹으며 그는 웃었었다. 포식자처럼.
“혼자 걷고 싶다. 모두 물러가라.”
그는 친절하고도 잔혹했다.
황제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고독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샤비얀은 냉궁 쪽으로 향한 황제의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냉궁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어.’
어차피 흑마법사의 명이 있으니 최선을 다하는 척은 해야겠지.
샤비얀은 갈 곳이 없어 한참을 그대로 숨어 있었다.
“전하, 여기 숨어 계셨군요!”
흑마법사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보르도 왕국의 자작이 샤비얀 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이리 놀 시간 있으십니까? 얼른 공작을 찾아 약을 쓰셔야지요?”
“지금은 야, 약이 없소.”
그가 샤비얀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그러면 가져오셔야죠.”
자작이 샤비얀의 등을 떠밀었다.
황제가 사라진 냉궁 쪽으로.
***
“[언니. 레시우스는?]”
“[황제 궁으로 돌아갔어.]”
레시우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나는 로잘린을 만나게 됐다.
‘난 뭐가 다른데?’
그건 무슨 말이었을까. 자신이 남색을 왜 못하냐, 그런 말인가? 아니면…….
“[언니. 나 샤비얀 놓쳤어.]”
로잘린의 말에 생각이 흩어졌다. 그래. 우선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지.
“[어쩌다가?]”
로잘린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실토했다.
“[레시우스가 언니랑 같이 있으면 둘이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방심했어. 미안해.]”
로잘린이 답지 않게, 서로 붙든 두 손을 꼬물거리며 시무룩해졌다.
“[아냐. 찾으면 되지. 나도 레시우스랑 같이 있겠다 한 거 못 지킨 거잖아.]”
유리 궁의 수많은 복도 중 하나.
샤비얀을 찾기 위해 함께 야외 복도를 걸으며 로잘린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레시우스랑 샤비얀 둘이 만나게 된 거 아냐?]”
흠. 둘이 동시에 사라졌으니.
“[가능성이 없진 않겠는데?]”
나와 로잘린은 서로를 바라봤다.
눈으로 의견을 주고받던 우리는 거의 한 끗 차이로 입을 열었다.
“[호숫가로 가 보자.]”
“[호수에 있을지 몰라.]”
레시우스와 샤비얀이 처음 만나는 호숫가.
원작이 만든 그들의 운명이 어쩌면 유효할지 모른다.
‘오늘 레시우스는 조금 이상했지.’
나와 함께 있는 샤비얀을 보던 레시우스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확실히 절제된 평소와는 달랐다.
왠지 다급한 마음이 들어 달려가려는데.
“[날 버리고 가! 언니!]”
로잘린이 진흙에 빠진 구둣발을 빼며, 비련의 주인공처럼 외쳤다.
너…… 뭐 해?
“[나 버리고 가라니까……!]”
참 나. 나는 영화 한 편 찍고 있는 로잘린을 안아 들었다.
그러곤 호숫가로 달렸다.
로잘린의 손에 들린 구두가 함께 달랑달랑 흔들렸다.
“[와. 언니 빠르다.]”
“[소드마스터잖아.]”
다리에 기다란 풀이 스쳤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히 들려오는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 소리.
바람과 풀을 헤치면서 들어선 호숫가엔.
‘레시우스.’
정말 원작이 그 두 사람을 서로에게로 이끄는 걸까?
샤비얀과 레시우스가 처음 만나는 그 호수.
내가 레시우스처럼 샤비얀을 유혹해 보려고 기댔던 나무에 그가 기대 있었다.
‘두 사람이 여기서 진짜 만났으면 큰일 났겠다.’
저런 무방비한 레시우스를 봤으면 샤비얀은 정말 홀렸을지 몰라.
나무에 기댄 레시우스는 늘어뜨린 망토 위에 제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해진 그는 황홀할 정도였다.
“[와.]”
로잘린 역시 감탄하며 레시우스를 바라봤다. 로잘린은 멍하니 그의 외모를 감상했다.
“[내가 레시우스 얼굴 볼 때 눈을 이렇게 뜨잖아. 안 홀리려고.]”
로잘린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 보였다.
“[근데 신기하긴 하다.]”
로잘린은 속삭이던 소리를 더 줄였다.
“[원작처럼 레시우스가 저기 왔다는 게. 물론 시간이 조금 다르지만.]”
“[……그러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하. 이러다가 샤비얀도 여기 오는 거…… 꺅!]”
로잘린이 급하게 제 입을 막았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샤비얀이 홀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방향을 보아 하니 호숫가를 지나갈지 모른다.
“[언니, 나 내려놔. 언니가 레시우스 담당해. 가! 얼른!]”
로잘린은 치마 밑단이 더러워지는 것도 감수하고, 자리에 섰다.
나는 로잘린의 말처럼 호숫가에 발을 디뎠다.
“레시우스.”
작은 목소리로 레시우스를 불렀다. 풀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호숫가에 낀 안개 사이로 반딧불이 작은 별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르윈.”
반딧불의 연녹색보다 더 강렬한, 초록색의 녹음을 담은 눈이 열렸다.
희미하게 샤비얀을 뒤쫓는 로잘린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레시우스…….”
혹시라도 레시우스가 샤비얀을 볼까봐 몸을 낮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 봐.”
그의 뺨에 손을 댔다. 살짝 피하려는 그의 뜨뜻한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혹여라도 샤비얀을 못 보게 하려 한 행동인데.
“응…….”
레시우스가 뺨을 비비며, 날 응시했다.
오고가는 시선이 몽롱했다. 특히 레시우스가.
“너 술 마셨어?”
나는 그제야 레시우스의 눈이 살짝 탁해진 걸 느꼈다. 그의 등 뒤로 독주가 가득했다.
그림자한테 시켜서 가져오게 한 건가?
“그래서 싫어?”
레시우스가 뺨을 내려, 제 눈을 내 손에 비볐다.
“그래서 난 안 되는 거야?”
이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술이나 마시냐며 잔소릴하고 싶기도 했지만.
“……가자.”
우선은 샤비얀과 안 만나게 동선을 틀어야 한다.
샤비얀은 호숫가를 지나지 않고 바로 냉궁으로 향한 듯했다. 로잘린의 작은 발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레시우스만 방으로 데려다주면 되겠다.’
나는 늘어진 레시우스의 몸을 부축했다.
만취한 황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순 없어서, 인적이 드문 길만 택해 걷는데.
“……르윈.”
“응.”
“르윈.”
아, 왜.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황제 궁의 별관. 역대 황제의 초상화가 걸린 복도에 다다랐고.
“르윈.”
도돌이처럼 맴도는 대화에 나는 레시우스를 벽에 기댔다.
“왜. 레시우스?”
기댄 레시우스의 옆엔 그의 조부의 냉담한 초상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너한테 난 좋은 친구야?”
딱딱한 초상화의 표정과 달리, 레시우스가 눈가를 괴롭게 일그러뜨렸다.
“당연한 소릴 한다.”
“더. 더는 없어?”
깊은 녹색의 눈동자에 절박함이 서렸다.
“좋은 주군이기도 하지.”
나는 복도에 걸린 역대 황제들의 무정한 초상화를 눈으로 훑었다.
광기의 황제들.
특히, 레시우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더 잔혹한 성정을 가졌었다.
마치 레시우스의 집착광공이란 설정에 개연성을 부연하듯이.
그럼에도 넌 이리 착하지.
“넌 좋은 황제이기도 해.”
세상을 이롭게 할 성군 중의 성군이 될 것이다. 내 친우는.
확신에 찬 내 눈 보며, 레시우스의 동공이 초점을 잃고 잠시 흔들렸다.
“……그래. 그렇겠지.”
힘없이 휘청이려는 레시우스를 붙잡자, 지독하게 진한 독주 향이 훅, 코끝에 끼쳤다.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그거면 된 거지……. 그가 내 어깨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네. 레시우스가 이렇게 순한데 원작에선 그렇다니.’
나는 안쓰럽게 그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로잘린이 말하길.
‘원래 집착광공들 중 갑자기 빡 도는 애들도 많아. 언니.’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어찌 될지 모른다 했었다.
질투 나거나, 상대가 도망치거나, 다치면 눈이 돌아간다나 뭐라나.
‘너는 원작처럼 변하지 않을 거야.’
그를 바로 세우며, 달빛이 흐르는 섬세한 이목구비를 마주했다.
넌 사랑에 미쳐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을 거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을 거야,
이 세계선 내가 그 집착광공 역을 대신할 거니까.
나는 취한 레시우스를 부축하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
그리고 연회가 한창인 하일렌 제국의 유리 궁.
냉궁에 간 샤비얀이 작은 물병을 손에 꼭 쥐고 돌아왔다.
‘친족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바이우드엔 어머니의 가족인 아카 일족이 살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지만. 그 누구도 자신 때문에 희생되길 원치 않았다.
“여, 여기 있소!”
샤비얀이 테라스에 있는 자작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오면서 이미 공작님이 연회에 없는 걸 확인했다.
“공작에게 묘약을 왜 안 쓰시는 겁니까? 아까 붙어 있는 거 봤습니다.”
“사, 사람들이 많지 않소!”
“핑계는.”
자작이 비열하게 비웃었다.
“왜 이리 비싸게 구십니까? 원래 전하가 어떤 분이신지 다 아는데?”
“…….”
“사람들이 말하길, 8황자의 머릿속에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것들이 차 있다는데.”
자작이 샤비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연회장의 불빛이 자작의 얼굴에서 기괴하게 흔들렸다.
“같이 재미 좀 봅시다.”
“……그게 무슨!”
“흑마법사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베르웬 공작 돈도 좀 나눠 먹고, 우리끼리 재미도 보고.”
샤비얀은 저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작님의 돈이라니 그게 무슨…….”
“하하. 전하가 먹고 쓰고 하는 거 다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 거 같습니까?”
“…….”
“자국에서도 버려진 황자인 주제에 쓰는 것은 최상품의 가구와 옷, 하다못해 먹는 것도 최상품인데 이게 가당키나 합니까?”
황자의 방에서 봤던 가구는 자작이 가구점에서 봤던 것들이었다.
“제국이라도 그런 재력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회에서 베르웬 공작의 행동을 보고 알아차렸다. 공작의 저의를.
“모, 몰랐소. 나는 그저 냉궁 궁인들의 비리를 잡아낸 건 줄 알았소.”
“예, 예. 알겠으니. 이 약을 공작에게 먹이세요. 이미 당신께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
“돈 많은 공작은 전하께 기꺼이 돈 보따리를 열겁니다. 저랑도 일정 부분 나누시고.”
음욕에 젖은 광기의 눈빛이 번뜩였다.
“재미도 함께 봅시다.”
자작이 샤비얀의 손에서 물약을 낚아챘다.
그러곤 샤비얀의 머리칼을 몇 가락 쥐어뜯었다.
‘안 돼! 자작이 대신 공작님께 묘약을 먹이려는 거야!’
샤비얀은 그걸 되찾으려 난간 위에 다급히 올라섰다.
“제가 베르웬 공작보단 못 하지만 이 정도면 쓸 만한 얼굴 아닙니까?”
자작은 샤비얀의 행동을 재롱 보듯이 하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려 했지만.
“아악!”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서 샤비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작의 물병 든 손을 깨물었다.
“이게 진짜!”
그에 화가 난 자작이 샤비얀을 내쳤고,
‘어?’
난간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