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3)
베르웬 공작령에서 황도로 오고 난 후.
나는 쏟아지는 편지들을 보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한쪽은 군부에서 온 거고, 한쪽은 초대장이네.’
거친 편지지에는 소드마스터가 된 걸 축하한다, 이제 군부를 이끌 차기 총사령관이 되셨으니 어쩌구…….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고.
“하긴, 사교 시즌이긴 했지.”
다른 유려한 편지는 자신들의 무도회에 와 주면 영광이겠다는 내용의 초대장이었다.
원래는 초대장 잘 안 보내는데. 어차피 안 갈 거 아니까.
‘미친 황녀 소문 이후로 초대장이 더 많아진 거 같단 말이지.’
암암리에 내가 황제가 점 찍어 둔 황녀의 신랑 후보감이라는 말이 있긴 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랑 황녀가 잘될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갑자기 황녀가 미쳤다고 하니 ‘혹시?’ 하면서 작은 희망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거겠지.
‘다들 틀렸네요.’
저는 여자랍니다.
“공작님. 황궁으로 입궁할 준비는 다 됐습니다.”
“알겠네.”
나는 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며,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엔 내가 있었다.
잿빛 머리에 은회색의 눈을 가진 미청년.
‘다 흑마법 덕이지.’
살짝 웃으며 나는 짧은 머리를 매만졌다.
여자지만 남자로 사는 인생. 내 인생에 혼인이나 사랑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침대에 늘어지게 자는 거뿐인데 말이지.
“휴우.”
나는 공작의 품격에 맞는 거대하고 푹신한 침대를 바라봤다.
저런 침대가 있으면 뭐 하냐고! 누울 시간이 없는데.
나는 그렇게 오늘도 침대를 등지고 나아갔다.
그리고…….
“하일렌의 방패를 뵙습니다! 검의 정수에 오르신 걸 경축드립니다, 공작님!”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기사들에게 요란한 인사를 받아야만 했고 말이다.
***
기사들에게 인사를 연신 받고, 오후가 돼서야 황태자 궁에 도착했다.
그러곤 그간의 ‘미친 황녀’의 이야기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황녀 전하의 별명이 무엇이라고?”
“……광년.”
“…….”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무표정을 짓고 싶었으나 볼이 절로 씰룩거렸다.
웃지 말자. 웃으면 안 된다. 친구의 동생 일인데 웃으면 안 돼.
“웃고 싶으면 웃어도 돼.”
레시우스의 허락에 결국 배를 잡고 웃었다.
그 가녀리고 순하다는 로잘린 황녀에게 광년이라니.
너무도 매치가 안 되는 단어 아닌가.
‘얘기를 들어 보니 미쳤다기보단…….’
사고방식이 개방적으로 바뀐 것 같은데 이 시대 사람들에겐 충격적인 행동들이긴 했다.
“미안.”
너무 웃었나?
머쓱해져서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아냐.”
레시우스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간데. 덥나?
“그래서 이게 황녀 전하가 말한다는 그 내용이야?”
“응.”
“흐음.”
받아든 종이엔 대륙 공용 문자가 가득했다.
황녀가 말한다는 그 언어를 들리는 대로 적어 놓은 모양샌데.
“특히 로잘린이 그 말을 많이 하더라고.”
“무슨 말?”
“[씨X.]”
풉!
레시우스 입에서 나오는 친숙한 욕설에 결국 들이켜던 차를 뱉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고.
명백한 한국어였다.
내가 전생에서 쓰던 나의 모국어.
“괜찮아?”
“어. 너무 놀라서.”
레시우스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물기를 닦아 내며 생각했다.
‘우연인가?’
[씨X]이라는 어감을 가진 단어가 이곳에도 있을 수도 있지.살짝 축축해진 손수건을 접으며, 종이에 적힌 글을 눈으로 훑었다.
“[집에 보내 줘.]”
“[하지 말라는 게 존X 많네.]”
“[이쁘긴 이쁘네.]”
“[치킨 먹고 싶다. 이런 수프 말고 치키이이인!]”
글자를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있으니.
“르윈. 이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게서 손수건을 건네받던 레시우스가 잠시 표정을 굳혔다.
대답해 주고 싶지만…….
“황녀 전하는 지금 어디 계시지?”
“아마 궁에 있을 거야. 후작 부인을 쓰러트려서 폐하께 근신을 받았거든.”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한국어를 쓰는 황녀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황녀 전하를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지금?”
“그래. 지금 당장.”
진지한 내 표정에 덩달아 레시우스도 진중해졌다.
“베르웬 공작이 시급히 황녀에게 방문하겠다 하니. 이를 황녀 궁에 알리게.”
“예. 전하.”
기사가 나가자마자,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너도 가게?”
나는 따라 일어서는 레시우스를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르윈. 너 혼자 로잘린을 만나는 게 더 이상해 보이는데.”
레시우스가 손에 들린 접힌 손수건을 보며 만지작거렸다.
고갤 숙인 그의 눈은 볼 수 없지만.
“이제 너희 둘은 다섯 여섯 살짜리 애들이 아니잖아.”
잠시 낮아진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고갤 들어 올리며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단둘이 만나면 추문이 붙을 나이야.”
흐음. 그렇겠지.
어렸을 때야 레시우스를 따라 갓난아기였거나 완전 꼬맹이인 황녀를 몇 번 봤었지만.
커서는 자주 못 봤다. 내가 바쁘기도 했고, 뭐랄까 여기의 이성 관계는 굉장히 까다롭달까.
하다못해 교제 관계 정도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거리도 정해져 있으니. 할 말 다 했지 뭐.
그래도!
“너 바쁘잖아. 요즘 폐하도 편찮으시고.”
황녀와는 단둘만 만나야 한다고!
“넌 공부해야지. 그래야 성군이 되지.”
나는 못 본 새 더 커진 레시우스의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혔다.
“성군……. 그래, 성군.”
날 올려다보는 그린 듯한 레시우스의 표정이 일순 깨졌다.
‘방금 뭐였지?’
눈을 깜빡이자, 으레 그렇듯 그는 다정히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잘못 봤나?
“누구의 분부인데 거역하겠어.”
레시우스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그대로 내 뺨에 댔다.
어쩐지 손수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내 턱을 감싼 모양새가 됐는데.
“응……? 갑자기 왜?”
“르윈.”
그의 뜨거운 손이 천 사이로 느껴졌다. 부드러운 천이 내 턱선과 입술 주변을 느릿하게 닦았고.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서.”
레시우스가 날 선 눈매를 흩트리며, 웃었다.
으응? 분명히 내가 다 닦았는데?
***
‘혼자 갈게. 어?’
레시우스는 단 한 번도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황녀 궁으로 갔건만.
호기롭게 길을 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황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황녀의 시녀인 록슨 영애는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저러지?
“아닙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 결례입니다.”
정석적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데.
“저, 영애님.”
뺨이 붉어진 영애에게 궁인이 다가와 속삭였다.
평범한 이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만.
“황녀 전하가 사라진 게 맞습니다.”
소드마스터라 귀가 극도로 좋은 내게는 선명히 들렸다.
“아……!”
앞에는 제국의 공작이 떡하니 서 있고, 황녀는 사라지고…….
영애가 충격에 이마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녀로서는 이건 십여 년의 인생에서 만난 가장 큰 고난일 거다.
“괜찮으십니까?”
“네.”
나는 기사도를 발휘해 그런 영애를 받아 들었다.
“영애께서 이리 몸이 안 좋으시다니. 급한 대로 의무실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네에…….”
점점 빨개지는 얼굴로, 영애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의무실에 도착한 후엔, 영애는 부끄러운지 도망치듯 인사하며 사라졌고.
그렇게.
“흠.”
나는 덩그러니 의무실이 있는 궁의 복도에 남았다.
‘여길 다시 올 일이 있겠나.’
황제나 황태자가 머무는 중앙 부분은 자주 드나들겠지만 이런 외곽은 거의 올 일이 없을 거다.
‘황녀를 보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온 김에 산책이나 할까.’
하는 마음으로 정원 외곽을 걸을 때.
퍽퍽!
무언가 발로 차는 소리와 함께 수풀이 흔들렸다.
“[뭐로 만든 거냐? 왜 이리 안 빠져.]”
익숙한 언어에 저절로 발이 멈췄다.
황녀?
쓱쓱-.
무언가를 쇠톱으로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퍽퍽 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천천히 다가가 수풀을 걷자, 나이프로 철창을 갈고 있는 황녀가 보였다.
옆엔 이미 날이 나간 나이프가 한가득이었다.
“[아아! 이제 좀! 다 된 거 같구먼!]”
두꺼운 철장을 얼마나 갈았던지 한 부분이 거의 잘릴 듯이 금이 가 있었다.
저건 오늘 하루 동안 간 게 아니라 꾸준히 갈아 온 거다.
와. 근성 하나는 최곤데?
‘그러고 보니…….’
황녀답지 않게 무난한 옷차림. 옆에 놓인 이민 가방에 버금갈 배낭.
‘가출이다. 이건 백 퍼센트 가출이야.’
베르웬 공작으로서 이를 막아서야 할지, 아니면 친구 동생의 일탈을 눈감아 줘야 할지.
짧은 갈등이 일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뭐 합니까?”
“[아. X 됐네.]”
어차피 금방 잡힐 게 뻔했으니까.
이런저런 물어볼 얘기도 있었고.
“[X도 없으면서.]”
“[너 뭐라고 했…….]”
험상궂게 고개를 돌리던 황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이프를 쥔 그녀의 손이 휙-, 하며 나를 향했다.
“[너, 너, 너 뭐야!]”
“베르웬 공작입니다. 황녀 전하.”
멋들어지게 인사를 했는데, 황녀는 나이프를 휘두르며 뒷걸음쳤다.
나는 머쓱해진 손을 거뒀다.
“아니. 그거 말고 아까 한 말 말이오.”
황녀의 입에선 능숙한 대륙 공용어가 튀어나왔다.
“[이것 말입니까?]”
“[그렇소! 아니 왜 이 말로 이 어투야. 그래요!]”
황녀의 말에 턱을 쓸었다.
뭐라 설명해야 하지.
“[제가 전생을 기억하거든요. 이건 제 모국어였던 한국어고요.]”
묘해지는 황녀의 표정. 그녀는 놀란 듯 나이프를 든 손을 떨궜다.
“[……전생이라고요?]”
“[네.]”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태어났다는 소린 거죠?]”
“[네. 교통사고로 죽고 눈 떠 보니 아기더라고요. 그래서 아 다시 태어났구나, 했죠.]”
나로서는 당연한 추리였다.
죽고 나서 태어나 보니 다른 세계. 당연히 환생한 걸로 생각하지.
그렇다면.
‘황녀는 어찌 된 걸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거참 이상하네요…….]”
황녀는 숯덩이처럼 얼룩덜룩한 얼굴로 심각해졌다.
“[전 책 속에 빙의됐거든요.]”
“[네?]”
이번에 놀란 건 나였다.
“[집착광공한테 목이 댕강 잘려 죽는 악역으로요.]”
믿을 수 없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여기가 책 속이라고?
“[더 놀라운 사실 알려 드릴까요?]”
얼빠진 나를 보며 황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