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5)
‘상상력들 대단하다니까.’
황녀를 안고 궁에 도착한 후엔 황녀의 미친 썰 대신 다른 소문이 황궁을 휩쓸었다.
“저것 보세요. 황녀 전하가 몰라보게 얌전해지셨잖아요.”
“호호. 그게 바로 사랑의 힘 아니겠어요.”
황녀가 내게 반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런 소문에 불을 지핀 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황녀.
“[언니. 그런 멍한 표정. 집착광공스럽지 않아요.]”
꼬질꼬질하던 첫 만남과 달리,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제가 말했죠. 언니는 다정한 스타일이라 광공의 모습을 더 함양해야 한다니까요?]”
머쓱함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을 찌르는 쓴맛에 설탕을 넣으려 하자…….
“[집착광공은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아요.]”
그럼 달콤한 쿠키라도…….
“[집착광공은 쿠키도 먹지 않는다고요.]”
너무해.
“[그 광공이란 거,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요?]”
근엄한 표정을 애써 유지했지만, 허탈한 한숨은 숨기지 못했다.
‘집착광공이 뭔지는 대충 들어 알고 있지만…….’
이게 사는 건가? 쿠키도 못 먹고 쓴 커피만 마시는 게?
“[그래서 제가 준비한 게 있죠.]”
내 푸념을 무시한 황녀가 손수건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 있는 록슨 영애가 얇은 책 1권을 들고 우리에게 걸어왔다.
“고마워요. 영애.”
완벽한 손짓으로 황녀가 책을 건네받았다. 그녀의 미소에 록슨 영애의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도대체 일주일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건 뭔가요. 전하.”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외국 서적이죠.”
외국 서적?
그런 거 부탁한 적 없는데.
나는 표지를 넘기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했다. 페이지마다 동글동글한 한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으니까.
“[그거 만든다고 고생 좀 했어요. 여기 보이죠. 다크서클.]”
황녀가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감쌌다.
그녀의 어조는 얌전했으나, 말투는 영 건들건들했다.
“[이게 뭐예요? 직접 만든 거 같긴 한데.]”
“[원작에 대해 복기한 거 적어 둔 거예요.]”
그녀의 말처럼, 짧지만 간략히 요약된 원작의 이야기.
책 내용을 읽기 시작한 내 입매가 점점 굳어졌다.
“[이거, 범죄 소설 아닌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집착광공은 범죄자인 거 같은데.]”
툭하면 화내기, 협박하기, 강제로 키스하기, 벽 치기, 감금하기, 등등.
“[제가 이걸 해야 한다고요?]”
나는 얼이 빠져서 황녀를 보았다.
“[아뇨. 언니한텐 기대도 안 해요.]”
황녀가 조용히 잔을 내렸다.
나 역시 안도하며 책 커버를 덮었다.
“[언니 성정으로는 이 정도까진 못할 거 같고…….]”
“[말 흐리지 마요. 불안하니까.]”
“[순한 맛으로 할게요.]”
순한 맛이라.
“[떡볶이 좋아한다 했죠. 시킬 때 무슨 맛 먹어요?]”
“[가장 매운맛이요.]”
아 자극적인 거 좋아하는구나.
황녀가 씽긋 눈을 접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다행히 소설이 샤비얀 시점으로 많이 진행돼서 샤비얀의 취향 정도는 알거든요.]”
“[그게 뭔데요?]”
“[샤비얀은…….]”
그녀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무를 숭상해요. 강자에 대한 동경이 있거든요.]”
티스푼을 든 황녀가 설탕을 잔에 톡톡 뿌렸다.
“[거기다 집착을 뿌려 주면 돼요. 샤비얀이 원하는 건 맹목적인 사랑이니까요.]”
황녀가 잔뜩 달콤해진 홍차를 마시며 황홀하게 웃었다.
“[그런 면에서 언니가 최상의 상대죠. 하일렌의 최강자에, 우리는 무려 세상을 걸고 샤비얀을 꼬시는 거잖아요? 집착이라면 우리 쪽도 이제 뒤지진 않아요.]”
“[울면서 빌더라도 될 때까지 해 봐야겠네요.]”
“[네. 이게 바로 집착광공의 모습이죠.]”
황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수업은 주 1회, 언니는 연기 연습이 좀 필요해요.]”
“[……그런 거까지 해야 해요?]”
“[당연히 그런 거까지 해야죠. 그 대신 그 시간에 제 검술도 좀 봐 주세요.]”
생뚱맞은 황녀의 발언에 고개를 쳐들었다.
“[검술을요?]”
“[예. 정말 목이 댕강 잘리는 상황이 온다면 한 번 발악이라도 할 거예요. 아니면 도망치든가.]”
흠. 이해는 간다.
검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근데 어디서 검술 연습을 해요? 사교계를 휘어잡겠다면서요. 황녀가 검을 쓰는 모습을 걸리면 사교계에서 거의 퇴출당할 텐데요.]”
사교계의 꽃과 칼이라.
나는 괜찮지만, 이곳 귀족들은 못 받아들일 조합일 거다.
“[당연히 몰래 배워야죠. 쓸 만한 곳을 알아요. 마침, 황제 폐하가 비밀 통로도 알려 줬거든요.]”
황녀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더니.
“[나 빙의자잖아요. 그걸 잊지 말라고요 언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
그날 밤.
끼익, 하며 오랫동안 방치된 방문이 열렸다.
“[황궁에 비밀 통로가 있단 것도 놀랄 일인데, 이런 장소가 있었네요.]”
나는 썰렁한 방 안을 살폈다.
가구를 덮어 놓은 흰 천에 쌓인 먼지들, 부서져 덜렁거리는 액자들. 삐걱대는 바닥.
“[나중에 샤비얀이 와서 지낼 냉궁이에요.]”
여기가?
“[5년 후에 그가 여기서 지내요.]”
“[뭔가 기분 찝찝하네요. 약간 무단 침입죄 같은…….]”
“[뭐 어때요. 다 치우고 가면 되죠.]”
내 말에 황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펜싱용 검이 잘그락 소릴 냈다.
“[언니는 황궁 밖에서 오니까, 제가 미리 준비했어요.]”
황녀가 두 개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언니는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저를 유혹하면 돼요.]”
다짜고짜 유혹하라니.
내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황녀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자. 한번 해 봐요.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뭐야? 벌써 시작한 건가?
‘나도 뺨을 쓸어 주면 되나?’
그런 생각으로 황녀의 볼을 향해 손을 뻗는데.
“[아니죠. 볼이 아니라 허리를 잡아요.]”
똑 부러지는 그녀의 눈빛에, 손을 내려 허리를 잡았다.
“[확 잡던가 아니면 확 끌어안던가. 널 너무 사랑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느낌으로.]”
내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다그치는 황녀.
‘이, 이렇게?’
어색하게 그녀를 끌어, 내 품에 꼭 껴안았지만.
‘뭐야 무서워…….’
그녀는 여전히 불만스럽게 고갤 저으며, 날 올려다봤다.
눈빛 봐, 호랑이 선생님이 따로 없네.
“[아니에요. 다시.]”
조그맣고 엄한 선생님과의 첫 수업이었다.
***
르윈과 로잘린, 이 둘은 몰랐겠지만.
‘제발 떨어지세요!’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냉궁에 숨어든 레시우스의 수족인, 그림자.
황궁의 동태를 살피던 그가, 비어 있던 냉궁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오게 된 것이다.
“[이젠 제 차례죠.]”
한참을 붙어 있던 르윈과 로잘린이 떨어지더니,
“[잡아요. 검.]”
르윈이 음산하게 바닥에 놓인 칼을 잡았다.
뒤이어 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로잘린 역시 검을 집었다.
챙-.
그 후, 한참이나 칼 부딪치는 소리가 냉궁에 울려 퍼졌다.
대부분은,
“[스톱, 스톱!]”
“[검술엔 그런 거 없어요. 막아 내 봐요.]”
“[같은 한국인끼리 이럴 거예요?]”
“[동향이니까 더 잘 가르쳐야죠. 그리고 나 지금 완전 살살하고 있거든요.]”
두 사람의 아웅다웅.
그 모습을 관전하는 그림자는 르윈의 움직임을 보며 감탄했다.
‘많이 봐주고 계시군.’
역시 소드마스터.
황녀가 다칠까 봐, 힘을 빼고 설렁설렁 움직이는 듯해도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오히려 힘 조절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르윈의 미간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도 열의가 넘치시고.’
물론 열의만 넘쳤다.
전력으로 막아 내는 로잘린의 팔이 안쓰럽게 달달 떨렸다.
챙-.
결국, 로잘린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다시 해요!]”
로잘린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검을 주워 들었다.
열의 넘치는 제자의 모습에 어느새 르윈의 입가에도 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근성 하나는 좋은 거 같다니까.’
곧 칼 소리가 다시 냉궁을 뒤덮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의 끝자락.
서류에 사인하고 있던 레시우스의 손이 멎었다.
“……뭐라고 했나?”
레시우스의 반문에, 책상 앞에 시립해 있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새벽 한 시경, 황녀 전하께서 비밀 통로를 이용해 냉궁으로 이동하셨고, 공작님 역시…….”
그림자는 점점 더 싸늘해지는 분위기에, 잔뜩 위축되어 보고하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를 통해 냉궁에서 접선한 공작과 황녀, 그리고 그들의 농밀한 스킨십까지.
‘그 누가 알겠는가.’
온순하다는 황태자가 역대 황제들과 비교해도 가장 냉철하고 무자비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는걸.
“따로 두 분을 주시할까요? 하명을 주시면…….”
등 뒤로 들려오는 수족의 말에,
“됐다.”
레시우스가 반쯤 고갤 틀었다.
달빛에 음영이 진 얼굴은 조각상처럼 차가웠다.
“그러다가 르윈이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르윈은 소드마스터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림자의 존재를 알아차릴 거다.
레시우스는 쓰게 웃었다. 자신의 연정은 이런 것이었다.
세상이 알면 안 되는 일, 상대가 알면 혐오할 일.
“르윈이 아는 레시우스는.”
“…….”
“그런 추잡한 짓 따윈 하지 않아. 친우의 뒤나 캐고 다니는 그런 짓 말이다.”
자신의 연정은 철저히 숨겨야 한다. 질식할 것 같은 질투와 분노에도.
레시우스가 완전히 몸을 돌렸다.
“왜냐면 아주 순진하거든. 미련할 정도로.”
달빛을 등진 레시우스의 녹안이 분노로 일렁였다.
“……르윈과 가족이 될 수도 있겠군.”
레시우스가 표면이 매끈한 만년필을 쥔 채, 이를 악물었다.
내 친구가 내 여동생의 남편이 된다라…….
시선을 내린 채, 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느리고 긴 호흡 끝에, 레시우스는 평소와 같은 그린 듯한 미소를 얼굴에 드리웠다.
“나는 르윈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너의 남은 애정의 부스러기라도 얻기 위해서. 이따위 것도 참고 넘길 것이다.
하지만.
온화한 말투와 달리,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레시우스의 손이 벌겠다.
시뻘건 손바닥 안에서 두 동강 난 만년필이 더욱 으깨져 부서졌다.
“……그런데 점점 참기가 힘들군.”
단정한 미소 위, 눈가를 살짝 찡그린 레시우스.
그의 손에서 검은 잉크가 뚝뚝 떨어졌다.
마치 피처럼.
진득하고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