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57)
레시우스가 손에 든 문서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그건 바로 샤비얀의 ‘귀환 명령서’였다.
이를 힐끔 본 대신들이 수군거렸다.
“제가 뭐라했습니까! 바하트의 새 황제가 직계 형제를 살려 둘 리가 없다니까요!”
“어허. 귀환을 명하는 거라면 당연히 죽이려고 불러들이는 것이겠지요?”
아이고 골이야.
가뜩이나 아까 전에 샤비얀을 보내라, 안 된다 하며 싸우지 않았나.
저 명령서로 나는 또 욕을 태반으로 받겠네.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려고 하는데.
“짐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귀환 명령서를 든 레시우스가 종이를 살랑 놓았다.
동시에 대신들이 몸을 들썩이면 ‘아니 됩니다!’ 하고 외치려는데.
“바하트가 하일렌을 우습게 보는군.”
예상치 못한 말에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협정서의 14조에 의하면 바하트 측이 포로의 귀환을 명할 수 있는 건 본국법에 의해 재판받을 때뿐이다.”
“…….”
“이외의 상황에선 포로의 귀환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하일렌에게 있다.”
레시우스가 탁상에 놓인 협정서를 톡톡 건드렸다.
“하일렌과의 협정을 가볍게 보는 게 분명한 듯한데.”
레시우스가 입술 끝을 올렸지만,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대신들을 훑었다.
“자네들은 기분이 안 나쁜가?”
여기서 샤비얀을 보내자 하면 하일렌을 무시한 바하트에 동조하게 되는 것.
대신들이 말을 잃었고.
“짐이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
“바하트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것만으로 자네들이 이리 불안에 떠는 것을 보면 말일세.”
레시우스가 종이의 끝부분을 매만지며,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바하트는 한때는 하일렌에게 공물을 바치던 왕국이었네.”
“예, 그, 그렇지요.”
“그리고 바하트 제국은 한 번도 하일렌을 이겨 본 적이 없네.”
레시우스가 나를 힐끔 본 뒤,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음울한 표정은 잘난 외모 덕에 그조차도 우수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자네들이 불안에 떠는 건 다 짐이 못 미더워서인가 보군.”
“아닙니다! 폐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이런 태평성대도 없는데요!”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레시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다들 너무해!
객관적으로도 레시우스가 즉위한 후 하일렌은 여태까지 없었던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를 맞는 중이었다.
어우. 저 속상한 표정 봐. 나중에 따로 달래 줘야지.
“레시우스.”
대신들이 다 사라진 후, 집무실에 가려는 레시우스의 옆에 붙어 섰다.
레시우스는 내가 올 걸 예상했는지 이미 보좌하는 이들을 멀찍이 물린 상태였다.
“응.”
“크흠. 내가 어디서 들은 말이 있는데.”
레시우스가 황태자일 때나 황제로 즉위할 때나, 그의 성정이 유약하다며 대신들이 많은 걱정을 했었다.
선황도 레시우스의 성격이 나약하다며 그를 자주 혼낼 정도였으니까.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도 없지만,”
“…….”
“굳고 강한 것을 치는 데 물보다 나은 것도 없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었다.
저쪽 세상에서 물로 30만 명을 몰살한 장군도 있다고.
“그래서 나는 네가…….”
“아. 그래서 내가 물로 보인다는 말이구나…….”
아니. 네가 물로 보인다는 게, 그 말이 맞긴 한데……. 그 물로 보인다는 게 하찮게 본다는 그 말이 아니라……!
“……나는 나무가 좋아.”
레시우스의 금발이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조각상 같은 옆태에 태양 빛이 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레시우스가 큰 손으로 내 얼굴에 닿는 햇볕을 막아 주었다.
늦여름 따가운 햇빛 대신 서늘한 그늘이 이마에 드리워졌다.
“힘들면 쉬어 갈 수 있는 나무.”
“…….”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초록색을 닮은 체향이 바람에 섞여 내 코끝을 간질였다.
어쩐지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한 거 같기도 하고.
“나는 눈도 나뭇잎이랑 닮았잖아.”
레시우스가 푸르른 초록색인 눈을 예쁘게 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르윈. 그러니까 힘들면 쉬어 가.”
“…….”
“난 언제나 내 옆에 있을 테니까.”
그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흘러들어 왔다.
어째 내가 레시우스를 위로하러 왔다가 되레 위로받은 느낌인데?
레시우스가 햇볕을 막아 주고 있음에도, 왠지 열이 오르는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휘어지는 그의 눈꼬리가 요망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보면 얘 진짜 선수 같다니까.
***
“[언니. 레시우스 선수 맞아.]”
로잘린과 오랜만에 폐저택에서 조우한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털어놨다.
“[아이. 아냐. 레시우스는 연애도 한 번 못 해 봤는데.]”
“[언니. 걔 집착광공이잖아. 그건 그냥 본능적으로 아는 거라고!]”
로잘린과 나는 복기록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켈리언이 황제가 된 후, 어떤 일이 생기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는 거랄까.
“[레시우스가 얼마나 능구렁인데. 국무 회의 때 레시우스가 한소리 한 걸로 지금 여론 다 바뀌었잖아.]”
흐음. 그렇긴 하지.
“[프레임을 다시 짠 거잖아. ‘샤비얀을 보내자’에서 ‘바하트 제국 놈들이 감히 하일렌한테 뭐라 해?’ 이렇게.]”
확실히 다들 그 이후로 내 욕을 안 했다. 샤비얀을 보내자는 소리도 쏙 들어갔고.
“[국무 회의에서 한 소리로만 그렇게 됐겠어. 분명 뒤에서 또 손썼다는 거에 내가 이 깃털 펜을 건다!]”
로잘린이 손에 쥐고 있던 화려한 깃털 펜을 흔들었다.
“[솔직히 원작이 샤비얀 시점으로 진행돼서 그렇지.]”
로잘린이 복기록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레시우스가 샤비얀 몰래 저지른 일도 꽤 많을걸. 그걸 샤비얀이 몰라서 책에 안 나오는 거겠지.]”
“[내 친구 모함하지 마.]”
“[쳇.]”
‘말해 줘도 안 믿으니. 쯧.’ 로잘린 중얼거리며 다시 책을 뒤졌다.
야아. 너라면 믿을 수 있겠니. 오늘 오전만 해도,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있는 듯 없는 듯한 나무가 될 테니 힘들면 쉬어 가라잖아!
“[레시우스가 언니를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런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
로잘린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원작의 레시우스는 되게 싸가지 없는데.]”
“[권태롭고 냉철하다고?]”
“[응.]”
로잘린이 엎드린 채로 종이 위에 글자를 끼적였다.
“[그러니까 이상하단 말이지!]”
켈리언이 황제가 된 후 벌어질 일을 요약하던 로잘린이 빽 소리쳤다.
“[레시우스가 샤비얀한테 관심도 없는데 왜 켈리언이 샤비얀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냐고!]”
흐음. 이상하긴 해. 원작이 바뀌었는데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양상이.
아무리 바꾸려 해도 원작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쩐지 옆에서 로잘린의 눈빛이 느껴졌다.
왜?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데?
“[흐음. 설마 켈리언이 언니 좋아하는 거 야냐?]”
음? 황당한 얘기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나? 나를 왜?
“[로잘린. 나는 샤비얀 같지 않잖아.]”
소드마스터에 호리호리하긴 해도 키도 컸다. 물론 남장 모습이긴 하지만.
“[아냐. 언니는 꽤…….]”
로잘린은 켈리언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닐 거라 굳건히 믿고 있는 날 보며 말을 삼켰다.
“[꽤? 뭐?]”
“[……아냐. 그냥 저기 복기록이나 봐.]”
로잘린이 고갤 저었다. 꽤 뭐? 꽤 뭐가 어떤데?
야아. 너 말을 하다 그만두냐. 그러면 되게 궁금하거든?
내 재촉하는 눈빛에 로잘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언니는 본모습이나 남장 모습이나…….]”
로잘린이 희미한 달빛에 젖은 내 얼굴을 보다가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꽤 켈리언의 취향이야!]”
“[…….]”
“[울리고 싶은 얼굴이라고.]”
……울리고 싶은 얼굴이 뭔데?
난 안 울고 싶은데?
***
그리고 바하트 제국.
켈리언은 들어온 재상을 바라봤다.
“나가라.”
즉위식에 입을 옷을 재단하던 재단사를 켈리언이 내보냈다.
동시에 재상이 켈리언에게 하일렌에서 온 공문서를 건넸고.
“귀환 명령서를 반환했군.”
완성되지 않은 화려한 즉위복을 걸친 켈리언이 문서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뜻은 명백했다. 샤비얀의 귀환을 거부한다는 말이었다.
같이 온 협정서를 보니, 하일렌의 거부엔 근거가 있었다.
공작에게 술 좀 먹여 보려다가 너무 불리한 협정서에 승낙해 주었군.
“바투를 끌고 와라.”
켈리언의 말에 근위 기사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흑마법사 바투를 끌고 왔다.
재상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흑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재상이 알기론 저 흑마법사는 켈리언을 어렸을 때부터 돌본 걸로 아는데.
“재상은 나가 보라.”
“예. 폐하.”
인정 없는 켈리언의 모습에 재상이 학을 떼며 밖으로 나갔고.
“네놈이 말했지. 지금 내 능력으로는 공작이나 황제의 기억을 읽는 건 무리라고.”
“……예. 폐하.”
마른 목소리가 흑마법사의 입에서 나왔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의 기억을 읽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
“폐하께서 일전에 공작의 기억을 읽은 건 아마도 공작이 취했기 때문일 겁니다.”
켈리언도 그리 생각했다.
그때 공작은 거의 무방비한 상태였고, 그 탓에 무심결에 공작의 기억을 읽은 것이겠지.
“그렇군.”
그래서 샤비얀을 불러들여 그간 있었던 일을 알고자 했다.
샤비얀의 기억을 읽는 거쯤은 가능할 테니까.
“당최 하일렌 황제의 심중을 모르겠군.”
하일렌의 황제는 공작을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샤비얀은 그의 눈엣가시일 것이다. 그런데 왜 샤비얀의 귀환에 반대하는 것이지?
켈리언은 이때껏 하고자 한 바를 이루지 못한 게 없었다.
궁금하다면 알아내면 될 테지.
“가 봐야겠군.”
“……어딜 말이십니까?”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켈리언의 말에 흑마법사가 눈을 크게 떴다.
“하일렌에.”
켈리언은 가뜩이나 심심하던 차였다. 이제 원하던 황위도 가지지 않았나.
이곳에 있어 봐야 문서나 보며 따분히 시간만 죽여야겠지.
“네놈이 그랬지 않나?”
켈리언이 흑마법사와 거리를 좁혔다. 검은 눈동자엔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짐이 공작을 좋아한다고.”
“……그, 그건 그렇지만.”
켈리언이 입가를 쓸다가, 송곳니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확인해야겠다. 짐이 직접.”
내가 공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