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62)
‘그, 그럼 이번에 북부에 가셨을 때도 황녀 전하와 아무, 아무 일도 없으셨지요.’
‘예.’
공작님은 그리 말하셨다. ‘예’라고.
아무 일 없었다고.
그런데…….
“하하. 그럼 황자랑은 왜 그런 추문을 만드는 거지?”
“그야 두 가지겠지.”
바하트 사절인 관료들이 낄낄댔다.
“베르웬 공작이 가벼운 사내거나 아니면 꿍꿍이가 있거나.”
“허허. 꿍꿍이라.”
샤비얀은 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쿵쿵 어지럽게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컸으니까.
공작님은 자신에게 왜 거짓말을 하셨을까? 왜?
왜. 황녀 전하를 만나셨으면서 이를 숨기고 자신에게 그런 말들을 한 거지?
왜?
***
나는 현재 켈리언에게 붙들려 있었다.
‘하나 내 아우는 짐의 신민이다. 죽고 살리는 게 다 내 손에 달렸다는 말일세.’
일전에 냉궁에 쳐들어와서 한 켈리언의 협박이 유효했달까?
모든 업무를 마치고 냉궁으로 돌아가다 마주쳤다.
그 탓에 현재 나는 켈리언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중이었다.
“술 한잔하겠나?”
얼씨구, 술까지? 우리가 술 마실 사이는 아니지 않을까?
“안 마실 겁니다.”
켈리언의 탄탄한 가슴 근육에 방 안의 불빛이 흘렀다.
좀 잠가라. 맨날 풀어 놓고 있어. 너 몸 좋은 거 다 알거든?
“정말 안 마실 건가?”
켈리언의 검은 눈동자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자신한테 샤비얀의 목숨 줄이 달려 있으니 말 잘 들으라는 경고가.
“하. 주십시오.”
어느 정도는 괜찮았다. 더욱이 마기에 노출된 탓에 흑마법을 굉장히 세게 걸어 놓은 상태기도 했고.
술 몇 잔은 이제 괜찮다는 말씀.
“여기 있네.”
켈리언이 빈 잔에 투명한 술을 부어 내게 내밀었다.
한 잔 들이켜고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놓았다.
“됐습니까?”
“술맛이 어떤가?”
“폐하랑 마셔서 그런지 별롭니다.”
사실 맛있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산뜻하고 달콤했달까.
그전처럼 막 도수가 있는 편이 아니어서, 조금 더 마셔도 될 거 같았다.
“나는 공작과 함께 마셔서 맛이 더 좋은데. 섭섭하군.”
술잔을 비워 낸 켈리언이 태연히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냥 뻗은 척하며 마시지 말까? 싶기도 했지만.
“……샤비얀. 그 아이가 말을 더듬는 이유를 알려 줄까?”
켈리언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했다.
그간 단순히 샤비얀이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유가 있나?
도수가 약하니까 한 잔은 괜찮겠지. 저번에도 여러 잔 마셨어도 괜찮았으니까.
“뭡니까?”
나머지 한 잔을 비워 냈다.
샤비얀의 일에 단숨에 넘어가는 나를 보며 켈리언이 오묘한 미소를 지었지만.
“마셨지 않습니까.”
“그럼. 말해 주겠네.”
내 재촉에 켈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7살까지 제 어미와 같이 갇혀 살았네.”
“…….”
“어미가 죽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지. 그때마다 말이 어눌해서…….”
켈리언이 말을 멈췄다. 아 왜 하다 말아.
“더 듣고 싶으면 한 잔 더 하게.”
아이씨.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이야.
끙. 그렇지만 궁금한 사람이 마셔야지 뭐. 그렇게 한 잔 더 마셨다.
“……나와서 말이 어눌하니 사람들이 말할 때 마다 흉을 봤지.”
“…….”
“황실에서 교육해 고치긴 했다만. 긴장하면 그 이후로 말을 더듬네.”
아. 나는 샤비얀의 과거사에 빈 잔을 쓸었다. 하이고.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안쓰러워서 절로 눈썹을 내리는데…….
근데 켈리언이 내 앞에서 샤비얀이 말 더듬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샤비얀은 나 없는 평소엔 말 잘하는데?
“근데 폐하가 어찌 제 앞에서 전하가 말을 더듬는 걸 아십니까?”
켈리언이 술을 비워 내며, 제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읽었네.”
“……예?”
“그 아이의 기억을 읽었다고.”
켈리언이 거의 사라진 술병을 보다가, 진한 웃음을 매달았다.
“이 술의 장점이자 단점이.”
“…….”
“처음에는 가벼운 듯하다가 뒤에 훅 온다더군.”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어지러운 거 같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몇 잔 안 해서 저번처럼 별일은 없을 거 같았는데.
“짐이 그대에게 왜 술을 먹였다고 생각하나?”
켈리언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바짝 내게 몸을 들이밀었다.
그가 앉은 의자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대의 기억을 한번 읽어 보고 싶더군.”
켈리언이 내 턱을 그러쥐었다. 그가 어딘가 통증이 이는지, 눈매를 찌푸렸지만.
또렷한 그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뭔가 머릿속을 휘젓는 이질감과 술기운이 뒤섞였다. 이건 저번에 막사에서 느꼈던…….
‘진짜 내 기억을 읽는 거구나!’
그 이질적인 감각을 막아 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당황한 나머지 몸의 균형을 잃었고.
우당탕-.
의자가 나뒹구는 소음 속에서 켈리언이 넘어지려는 내 등허리를 잡았다.
그대로 중심을 잃은 나는 켈리언의 팔에 가둬졌다.
이 자세 로잘린이랑 물리도록 연습한 자센데. 왜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당하고 있냐고!
“폐하. 잠시 무례하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켈리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 어쩌면 정말 술기운이 도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서 의기양양하게 일어났다.
어떠냐 소드마스터의 발차기가!
“……아프군.”
켈리언은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다리를 붙잡았다. 켈리언도 나만큼 강하니까 아플 리가 없을 텐데.
“엄살이 심하십니다. 전 가 보겠습니다.”
어이구. 그나마 적국의 황제라서 살살 친 거거든?
나는 살짝 묵례를 하곤 밖으로 나왔다. 살짝 알딸딸한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장 잘 쉴 수 있는 곳으로.
***
그리고 그 시각.
레시우스는 르윈이 켈리언과 함께 있다는 소리에 급하게 켈리언의 궁으로 들이닥쳤다.
쾅!
거대한 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렸고.
“잘 왔네.”
부술 듯이 문을 열고 온 레시우스를 보며 켈리언이 침상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바닥을 뒹구는 의자와 술병을 보던 레시우스의 눈이 분노에 잠기더니.
“멍청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멍청하군.”
바닥에 떨어진 훈장 하나를 집어 올렸다. 르윈의 옷에서 떨어진 거였다.
“하하. 그대만 할까?”
켈리언이 분기로 핏발이 선 레시우스의 눈을 바라봤다.
평소에 아닌 척하고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저 성질머리를 어찌 참고 살지?
“자네는 이때껏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을 걸세.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 생각하겠지.”
레시우스가 굴러다니는 술병을 발로 차며 걸어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네.”
“착각이라.”
“짐을 만난 이상은 그 착각 속에서 깨어나야 할 걸세.”
“…….”
“예전처럼은 못 살 테니까.”
레시우스는 켈리언이 오기 전 조치를 이미 취해 놨었다.
“지금 느끼고 있을 텐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황실의 보고에서 켈리언을 막을 만한 고대 신물들을 준비한 상태였다.
“뭐. 이딴 짓을 할 사람이 그대라는 건 알고 있네.”
“알면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거겠군.”
레시우스가 켈리언의 멱살을 쥐어 챘다.
“대 전쟁에서 악마들에게 이긴 건 신의 뜻을 받든 인간이네.”
“…….”
“악마 새끼들을 죽일 때 쓴 여러 물건이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이지.”
지금 이 궁전만 해도 마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신물이 여럿 설치된 터였다.
‘신의 은총’이라는 신물을 르윈에게 향유라 속여 선물해 주었고, 레시우스 본인도 사용 중이었다.
“지금 이 손으로 자네의 면상을 지져 버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눈을 번뜩이며 레시우스가 멱살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신의 은총’에 잔뜩 절여진 손이다.
이 물질에 닿으면 악마는 통증을 느끼고 심하면 산화된다.
켈리언은 결국 회복할 테지만, 얼굴이 낫는 동안은 어디 못 다니겠지.
그러면 르윈을 불러 내서 헛짓거리 하는 것도 못 하겠고.
“친구 일에 너무 격하군.”
켈리언은 레시우스의 한껏 돌아 버린 눈깔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저런 자가 온화하다고?
공작은 참으로 순진하단 말이지.
“지져 보게. 그러면 공작에게 가서 자네의 가식을 털어놓을 테니. 증거가 있으니 이번엔 좀 믿어 줄지도 모르겠군.”
켈리언이 레시우스의 약점을 살살 건드렸다.
‘공작’이란 말에 레시우스의 손아귀 힘이 약해졌다. 켈리언은 이를 알아차리고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선 떨지 말게. 솔직히…….”
“…….”
“너도 누구보다 이러고 싶잖아?”
켈리언이 점잖은 어투를 버리고 이죽거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일렌의 황제와 자신은 동류라는 걸.
제 본능대로 멋대로 굴고,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든 가져야 하는 족속이란 걸.
“그대와 나는 한 끗 차이네.”
곧 볼이 팰 만큼 어금니를 꽉 깨문 레시우스가 던지듯 멱살을 풀었다.
그의 말에 동감해서가 아니었다. 이성을 찾은 거였다.
자신은 저 망나니와 달랐다.
‘어차피 신전에서 사람이 온다.’
자신이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 없겠지. 레시우스는 르윈의 훈장을 꼭 쥔 채, 방문을 잡았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착각하는 게 있는데.”
“…….”
“그 한 끗 차이가 간혹 모든 걸 뒤바꾸기도 한다네.”
레시우스가 밖으로 나오자 켈리언의 수하들과 대치하고 있던 그림자들이 경계를 풀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레시우는 생각에 잠겨 황제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도 누구보다 이러고 싶잖아?’
자신이? 르윈에게? 자신은 그 짐승 같은 놈과는 다르다. 르윈을 누구보다 아껴 주고 싶은…….
“……르윈. 뭐 해?”
레시우스는 자신의 침대 기둥에 기대 꾸벅 조는 르윈을 보며, 목울대를 움직였다.
“공작님께서 취한 듯하셔서…….”
“알겠네. 나가 보게.”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이 이뻤다.
달빛에 비친 르윈의 가는 목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흰 목에 생긴 마수가 낸 상처. 그리고 그 상처에 입술을 묻었던 자신.
긴장감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레시우스?”
“응.”
“레시우스?”
술 취한 게 분명하군.
레시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멀쩡한 르윈 앞에서도 자신은 이리 긴장하는데. 술 취한 르윈은 얼마나 감당이…….
“억울해.”
“뭐가 억울한데.”
레시우스가 달아오른 손으로 다정히 르윈의 몸을 침대에 누이려 하는데.
“[이건데. 내가 얼마나 연습했는데. 덮치기 자세.]”
갑작스런 르윈의 손길과 함께 그의 시야가 반전됐다.
침대에 등을 댄 레시우스의 위에 올라온 르윈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꽤나 야릇한 자세로.
“내가 해야 하는 데. 왜 저가 하냐고.”
“……뭘?”
“[덮치기 자세.]”
알 수 없는 말로 귀엽게 쭝얼거리던 르윈이 점점 고개를 숙이며 잠들어 버렸다.
‘너도 누구보다 이러고 싶잖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얼굴이 화끈했다. 동시에 짐승 같은 놈이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신은…….
“르윈.”
누구보다 그러고 싶은 게 맞았다.
과일 향내가 나는 술 내음을 색색 내뱉으며 자는 르윈을 보던 레시우스가 입안을 물어 이성을 차렸다.
그러곤 르윈을 바로 눕혔다.
그는 이 지독히 끓어오르는 소유욕과 독점욕을 억누르며, 그녀의 행복만을 빌 것이다.
“잘 자.”
내 옆에서는 잘 자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잘 자. 르윈.
힘이 들어가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레시우스가 부드럽게 르윈의 머리칼을 쓸었다.
오늘 밤도.
***
그리고 하일렌의 냉궁.
샤비얀은 창백한 낯으로 공작님을 기다렸다.
‘언제쯤 오실까.’
왜? 왜 자신에게 거짓말한 거냐는 말을 묻기 위해.
하지만 공작님은 오시지 않았다.
밤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