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63)
깨어나자마자 나는 창밖을 확인했다. 어스름한 새벽빛을 보고 안도했다.
지각은 아니구나.
그런데 허리에 감기는 쿠션감이 냉궁에 비해 너무나 좋았다.
으음. 그 삐걱거리는 냉궁의 침대가 아닌데.
‘어라 나 왜 레시우스의 방에서 누워 있냐?’
눈을 뜨고 화려한 천장을 보고 나서야 레시우스 방임을 깨달았다.
아. 나 어제 취해서 막 걸었지. 무의식적으로 레시우스한테 왔나 봐.
“휴우.”
시선을 돌려 방의 주인인 레시우스를 찾아냈다.
그는 소파에서 긴 다리를 구기며 자고 있었다.
어휴. 나도 냉궁에서 저랬는데.
샤비얀이 괜히 나보고 침대에 올라오라 했던 게 아닌가 봐.
굉장히 불편해 보였달까.
그대로 레시우스를 들어서 침대로 옮기려던 나는, 드러나는 녹안에 잠시 침을 삼켰다.
“깼어?”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영롱했다. 눈동자가 어쩜 이렇게 예쁘냐.
“더 자.”
어쩐지 잠을 못 잔 듯, 레시우스의 얼굴이 퀭했다.
일하다가 잔 건가? 레시우스 옷은 편한 실내복이었다.
걷어붙인 소매 끝이 평소와는 달리 조금 지저분했다.
잉크가 묻어서 번진 건가?
“씻고 가. 르윈.”
어리광부리는 듯 내 배에 부슬부슬한 머리를 비비려던 레시우스가 멈춰 섰다.
마치, 잊고 있었던 걸 다시 깨달은 양.
어느새 달아오른 귓바퀴로 레시우스는 욕실 쪽이 아닌 큰 명화가 그려진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탁-.
그러곤 액자틀의 어떤 한 지점을 열자, 명화가 열렸다.
비밀 통로 문이구나!
놀라기도 잠시, 나는 아까 레시우스의 말을 떠올렸다.
씻으라며. 근데 왜 갑자기 비밀 통로 문을 보여 줘?
“씻으라며?”
“응. 여기서 말고.”
레시우스가 내 등을 살살 밀며, 어두운 비밀 통로로 나를 이끌었다.
‘나도 비밀 통로를 오고 다니긴 했지만 여기는 처음인데.’
냉궁을 오고 다니느라 비밀 통로를 자주 사용하긴 했다만. 황제 궁이 있는 이런 중앙 부분은 안 다녀 봤달까.
신기한 나는 발광석을 든 채, 앞서 걷는 레시우스를 보며 주위를 둘렀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가 보면 알걸?”
침침한 어둠 속에서 그의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복잡한 통로를 성큼성큼 걷던 레시우스가 여러 문 중 하나를 열었고.
“야아. 너 미쳤어?”
그 궁을 확인한 내가 레시우스의 등짝을 약하게 찰싹 쳤다.
“날 여기에 왜 데려와!”
“비어 있는 궁이 여기뿐이라.”
레시우스가 봐달라는 듯 청량한 웃음을 매달았다.
“여긴 네 미래의 부인을 데려와야지…….”
그곳은 황후 궁이었다. 비어 있는 황후 궁.
관리가 잘돼 있긴 하나, 궁인들이 없어 왠지 휑했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에 두 명의 걸음 소리가 퍼졌다.
레시우스가 비어 있는 가장 큰 방을 열었다.
“여기서 씻으라고?”
“어. 내 방에서 씻으면 불편할 거 같아서.”
그가 벌게진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뭐야. 예전 같으면 씻고 가라 개의치 않고 말했을 거면서?
뭔가 바뀐 레시우스의 행동에 조금 의아한 찰나.
“크흠. 너 필요한 건 다 준비해 놨어.”
화사한 황후 궁의 방은 지금 바로 사용해도 될 만큼 깨끗했다.
궁인들이 청소해도, 안 쓰는 궁이라 날마다 청소를 하진 않을 텐데.
끼익-.
실내화로 갈아 신고, 욕실에서 물을 받는 레시우스를 보며 알아챘다.
쟤가 나 자는 동안 치웠다는 걸.
걷어붙인 소매 끝이 더러운 이유가 이거였구나.
“너 막 이러면 안 돼…….”
레시우스의 성의가 있어서 사양하지도 못하겠지만.
“황제가 막, 어?”
네가 이런 거 할 위치는 아니잖아!
나 때문에 괜히 번거로운 일을 하게 한 거 같아서 많이 미안했다.
“너 누가 부려 먹었어? 왜 이렇게 잘해?”
더욱이 목욕 용품을 챙기는 레시우스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발만 받던 애가 이렇게 수발드는 걸 잘한다고?
저거 누구한테 배운 거 같은데.
“난 다 잘해.”
레시우스가 황금빛의 향유를 들며 장난스럽게 잘생긴 코를 치켜올렸다.
진짜 집착광공이라 다 잘하는 건가? 그냥 자연 체득된 거?
“이건 ‘신의 은총’이라는 건데. 꼭 써. 르윈.”
“알아. 나한테 선물 준 거 아냐.”
저번에 선물 줘 서 요긴하게 사용 중이었다. 사용하고 나면 뭔가 활기도 더 돈달까?
“……그럼 난 나가 볼게. 씻어.”
레시우스가 어쩐지 붉어진 귀로 하얀 수증기가 도는 욕실에서 나가 버렸다.
욕실 문밖에서도 또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예 방을 나간 건가?
쟤가 왜 나랑 내외를 해?
의아함을 떨치지 못한 채 보송한 수건과 가운이 있는 걸 확인하곤 옷을 벗었다.
저택에서 씻기도 하지만, 보통은 냉궁에서 씻으니까.
항상 남들 눈치 보며 씻어야 했는데 여기 있으니 절로 긴장이 풀렸다.
‘으아. 좋다.’
욕조에 향유를 풀어 놓고, 따뜻한 물속에 다리를 들였다.
욕조에 등을 기대며, 보글보글한 거품 속에 몸을 묻으니.
이게 바로 천국이네. 천국이야.
왠지 미래의 레시우스 부인에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끙. 먼저 써서 죄송합니다.
‘레시우스는 결혼하면 진짜 자기 아내한테 잘해 주겠지?’
친구인 나한테도 이러니까.
레시우스는 황제고 황후를 맞이해야 하는 건 국가 중대사. 언젠간 그도 결혼을 할 것이다.
꼬르르-.
나는 물속에 얼굴을 완전히 가라앉혔다. 레시우스가 결혼하면 나랑은 누가 놀아 주지?
좋았던 기분이 저조해졌다.
‘르윈, 우리 둘 중 한 명이 여자였다면 우린 혼인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레시우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여자지만…… 난 평생 남자로 살아야 하니까.
“푸아.”
물속에서 나온 나는 생각을 털어 냈다. 그래. 레시우스는 내 친구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너 혹시 거기 있어?”
문을 열고 나가니,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실내화를 신기 전 밟은 바닥은 작은 부스러기 없이 깨끗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네.
내가 흑마법이 풀리고, 버려진 신전에서 눈을 떴을 때도 바닥이 깨끗했었지. 누군가가 치운 듯이.
‘에이……. 그럴 리가.’
나는 살짝 품이 큰 레시우스의 옷을 입고, 방문을 열었다.
탁-.
레시우스는 복도 끝 창문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의 흩날리는 금발에, 눈을 감은 옆얼굴에 태양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인기척에 눈뜬 레시우스가 기다렸다는 듯 와서 수건을 받아 들었다.
“머리, 말려 줄까?”
이쁘고 길쭉한 그 손이 내 정수리에 닿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근사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때 그 기사처럼.
***
그 시각.
바하트 사절단의 인사들은 더욱더 사나워 보이는 켈리언을 보며,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폐하께서 오늘 기분이 영 별로신 거 같습니다.”
“오늘 연회가 있으신데. 저 기분으로 가셨다간…….”
대신들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잠잠하다고 생각했는데. 더욱이 적국에서 사고 치셔선 안 됐다.
‘한 번은 실수여도 두 번은 변명할 수 없다.’
켈리언은 자신이 하일렌의 황제에게 번번이 휘둘리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 탓에 기분이 안 좋은 것이었다.
‘폐하, 공작을 갖기 위해선 하일렌 황제를 쓰러트리셔야 합니다.’
자신의 측근인 흑마법사인 바투가 말했던 바가 맞았다.
공작을 가지려면 하일렌 황제를 쓰러뜨려야 했다. 더욱이 그는 샤비얀, 그 작은 아이도 어쩌지 못하지 않나.
“……죽일까?”
공작을 쥐고 흔들 패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죽여도 상관없을 거 같긴 했다.
“그 아이를 죽이면 기분이 나아질까 모르겠군.”
켈리언의 자조 섞인 말에 대신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결국 궁전의 뒤에 모인 바하트 대신들이 속닥거렸다.
“폐하께서 8황자의 존재를 거슬려하시는 게 맞습니다.”
“예. 작위를 내려 주지 않으신 건 곧 죽이려고 그러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들 역시 샤비얀의 존재는 껄끄러웠다.
황제의 자식이 아니다, 악마의 혈통이다, 갖가지 소문이 있는 켈리언 아닌가.
거기다 패륜까지 저질렀으니…….
정당성이 약한 켈리언에 비해 황제의 직계인 샤비얀은 그들의 눈엣가시였다.
“폐하도 저리 싫어하시는데. 없애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한 대신이 용기내서 말했다.
“맞습니다. 황도에 일찍 오셔서 한 일도 8황자를 찾아가신 거였습니다.”
“황자를 죽이고 싶은데 베르웬 공작 때문에 못 그러시는 거 아니실까요?”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의기투합했다.
“8황자를 죽이면 폐하께서도 바하트로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돌아가고 싶었다!
바하트 사절단 명목으로 왔지만 사실상 켈리언이 하일렌 황궁으로 놀러 온 거 아닌가.
“그래서 어찌할 것인가?”
“연회를 노립시다.”
좋은 생각이라는 듯 대신들이 모여 속닥거렸다.
***
그리고 하일렌의 냉궁.
아침이었으나 커튼을 친 방 안은 어두웠다.
궁인들은 걱정이었다.
“주무시니 나가자.”
“그래.”
한창 기분 좋게 외출했던 샤비얀이 돌아오고 난 후로 말수가 사라진 것이었다.
한참을 앓으시다가 괜찮아지셨더니. 또 몸이 안 좋으신 건가.
탁-.
궁인들이 문을 닫자, 방이 더욱 어두워졌다.
샤비얀은 눈을 감은 채로 몸을 틀었다. 찬찬히 눈을 뜨니, 닫힌 문이 보였다.
“전하는 주무시나?”
“예.”
“낮이신데. 벌써 주무시나? 혹시 몸이 또 안 좋으신 건가?”
문밖에서 난 소리에 샤비얀이 다시 눈을 꾹 감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공작님께 여쭤볼 말이 많았다. 하지만…….
‘무서워.’
만약 자신이 물어봤다가 공작님이 모든 걸 시인하시면?
공작님은 거짓말하신 게 맞다.
‘바하트 제국의 정보부에서 도는 말이야.’
그냥 사교계에 도는 그런 추문과는 달리, 믿을 만한 정보라는 거다.
탁-.
문을 열자, 감은 시야가 밝아졌다. 공작님은 제 옆에 와서 이마에 손을 올리셨다.
다른 향, 고급 향유.
평소 공작님이 쓰시는 향유 향이 아니었다.
황궁 내에서 방금 씻고 오신 건지, 진한 향유 향이 공작님 주위에서 넘실댔다.
“깨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더 주무십시오.”
“어…… 디 갔다 오셨어요?”
연무장. 그래. 그런 곳이라면 이해가 되지.
그런 곳이라면 황궁 내이고, 이 냉궁 근처니 씻고 바로 오셨을 거다.
“아. 저택에 갔다 왔습니다.”
태연스럽게 거짓말하는 공작님을 샤비얀이 올려다봤다.
내가 틀렸던 게 아냐.
‘내가 미쳤던 게 아냐.’
자신은 꾸준히 공작님에게 드는 의심들을 보며, 자신이 아버지처럼 미친 줄 알았다.
질투에 미쳐서 의심하고 집착하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내가 맞았어.’
샤비얀의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떠졌다.
검게 가라앉은 사위 속에서 오묘한 푸른색의 안광이 빛났다.
‘아. 이제 알 것도 같아.’
왜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둬 뒀는지.
불안해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