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iacs are Obsessed With the Fake RAW novel - Chapter (8)
정확히 9번.
난 정확히 9번이나 레시우스에게 퇴짜를 맞고 있었다.
평소라면 근엄할 근위 기사는, 내 눈치를 보며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작님을 들이지 말라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속이 탔다.
헤센 영지가 공격받은 날로부터 벌써 3일. 무려 3일 지났다.
헤센 백작령은 베르웬 영지와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켈리언이 직접 오다니!’
원작대로라면 켈리언은 뒤에서 흑막처럼 조종만 해야 하는데…….
‘왜 오냐고, 왜!’
켈리언은 비공식적인 소드마스터.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 당장이라도 헤센 백작령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다시 고하라. 폐하께 긴히 전해야 할 말이 있다.”
레시우스가 날 막았다.
당연히 출전을 승인해 줄 줄 알고 팔랑팔랑 들고 갔던 출전 명령서엔 불허의 인장이 찍혔다.
‘베르웬 공작의 출전을 불허한다.’
‘하오나 폐하, 아시다시피 헤센 백작령의 지휘 체계가 엉망입니다! 게다가 바하트의 황태자는 종잡을 수 없는 자입니다! 부디 출전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짐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 돌아가도록.’
심지어 근신까지 받았다.
‘레시우스. 황제다운 결정을 해. 내가 출전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죽어!’
‘황제로서 말하지, 이 시간부로 베르웬 공작을 일주일 근신에 처한다. 사유는 항명.’
어쩐지 슬픈 낯으로 레시우스가 내 뺨을 쓸었다.
‘이번엔 안 돼. 르윈, 돌아가.’
그렇게 단호한 레시우스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저 굳건한 문은 안 열릴게 분명,
쿵-.
……할 텐데?
세밀한 문양이 새겨진 문이 둔탁하게 열렸다.
“들어오게.”
침실 안, 일 중독인 황제를 위해 마련된 책상 뒤 레시우스가 앉아 있었다.
외알 안경을 쓴 채 서류를 보던 레시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화났군.”
그래. 나 삐졌다.
친우로서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공작으로서 주군의 결정이 납득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아무리 내가 너랑 친한 친구여도 말이야.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내가 널 그리 키웠어? 응?’
쿵-.
무거운 문이 닫히고,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폐하. 이번 명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재고해 주시기…….”
“알았네.”
“예?”
레시우스가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올렸다.
굳은 표정에, 그나마 인상을 유하게 만들던 안경까지 벗으니 단숨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도드라졌다.
‘저래서 광공이구나.’
항상 입가에 미소를 달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서 저런 모습은 좀 낯설었다.
레시우스는 마른세수를 하더니, 곧 지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알았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얼굴 상한 거 봐. 어휴, 마음고생 좀 했나 보네…….’
다 죽어 가는 레시우스를 보자 양심이 콕콕 찔렸다.
“……예. 전 그리 알고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굴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레시우스와 그렇게 언쟁을 크게 한 적은 처음이라, 사실 지금도 약간 어색했달까.
“르윈, 나 너무…….”
물기에 잠긴 목소리가 내 걸음을 붙잡았다.
반쯤 돌렸던 몸을 다시 틀자 레시우스가 손바닥으로 제 한쪽 눈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너 설마 울어?
“미워하지 마.”
눈물은 걷어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아니, 잠시만.”
나는 레시우스에게 다가갔다.
“내가 널 미워하긴 뭔…….”
당황해서 뭐라 말도 안 나온다.
레시우스가 내 앞에서 운 건, 그래. 근래엔 선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을 때였다.
사실 지금은 운 게 아니라 울먹인 정도긴 하지만.
“……너 여전히 잘 우네? 예전엔 나한테 맞고 매일 울었는데.”
그래. 그랬었지.
어린 시절, 함께 검술 훈련하다가 실수로 레시우스를 때리면, 난 항상 우는 그를 달랬었다.
‘이상하긴 했지.’
훈련하면 할수록 레시우스의 실력이 줄었으니까. 그건 아직도 의문이다.
쟤 어릴 때, 검술 천재 소리 들었었는데.
“그래. 그럴 때마다 네가 안아 줬었지.”
그때와 같이.
레시우스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이젠 내가 커서 좀 그런가?”
“어?”
“안아 주기엔…… 너무 커?”
평소보다 레시우스가 울적해 보여서, 결국 거리를 좁혔다.
얘도 얼마나 힘들겠어.
의젓해 보이긴 하지만 아직 내 눈엔 애다. 애.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레시우스의 머리통을 껴안았다.
레시우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허릴 바짝 당겼다.
“네가 그랬잖아. 황제다운 결정을 하라고.”
아. 나 때문이구나.
힘들긴 했을 거다. 레시우스가 워낙 여린 성격이니까. 자기 혼자 끙끙댔겠지.
“난 그게 항상 어려워. 넌 잘 알잖아. 난 너밖에 없는 거. 너마저 없으면 난 누구한테 기대 울지?”
정교하고 세밀한 젖은 녹안이 날 올려다봤다. 날카로운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간헐적으로 내뱉은 그의 말소리와 함께,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에서 다부진 가슴 근육이 보일락 말락 했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담?’
로잘린이 ‘금욕적일수록 흐트러졌을 때 그리 맛이 좋다’며 배시시 웃었던 연애 소설의 남주랑 흡사했다.
‘아. 레시우스도 남주지.’
새삼 잘생겼네.
서브 남주긴 하지만, 세계관에서 가장 잘난 남자 중 한 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아주 눈을 못 떼겠네.
나는 레시우스가 잘생겨서, 레시우스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동안 빤히 서로를 응시했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나 소드마스터잖아.”
나는 어색하게 침묵을 깼다.
짙어진 녹안으로 레시우스가 내 배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뜨거운 숨이 셔츠 너머로 느껴졌다.
“……자고 가.”
레시우스가 유독 낮아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내일 약식으로 새벽에 출정식 일정 잡을 테니까.”
여전히 품에 이마를 기댄 채, 레시우스가 내 옷을 꽉 쥐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잘 시간도 부족할 거야. 준비는 내가 시종장한테 시킬게.”
흠. 합리적이긴 하네.
여기서 베르웬 공작저로 가는데 한 시간. 다시 황궁에 오는 데 한 시간.
‘도합 두 시간을 길에 버리는 일이지.’
차라리 사람을 시켜 내 갑옷을 챙겨 오도록 하는 게 더 낫긴 했다.
“르윈, 설마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레시우스가 핏발 선 눈으로 고갤 들었다.
버림받을까 무서워하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지만.
기이하게도 실핏줄이 터진 눈은 묘하게 배덕감을 불러일으켰달까.
……저거 꼭 흥분한 거 같잖아.
“뭐. 네가 안 불편하다면 나야 좋지.”
나야 시간 아끼고 좋았다.
“그럼 진짜 자고 간다?”
레시우스가 내 셔츠에 비비적거리며 머릴 끄덕였다.
살짝 흐트러진 셔츠를 정리하며 난 황제의 거대한 침대로 걸어갔다.
‘아.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흑마법으로 위장했으나, 완벽히 남자가 된 건 아니었다. 키나 상체는 괜찮아도…….
옷을 달라하면 아예 나이트가운을 가져올 기세라, 그냥 겉옷만 벗었다.
“넌 언제 자게?”
얇은 셔츠 상태로, 침대에 모로 누웠다.
“난 아직 서명해야 할 문서가 있어서.”
레시우스가 답하며, 창문을 열었다. 바깥의 찬기가 실내에 스몄다.
“혹시 추워?”
“아니.”
소드마스터한테 별걱정을 다 한다 싶다.
“너도 빨리 와서 자. 일정대로면 너도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거잖아”
“못 참을 거 같아서.”
엉뚱한 말에 레시우스를 바라봤다.
“……잠을.”
레시우스의 붉어진 눈가가 반듯이 접혔다.
“할 일이 많아서 자면 안 될 거 같아.”
역시. 황제의 삶도 힘들다니까.
저렇게 레시우스가 제국민을 위해 힘쓰는데, 로잘린은 왜 매번 색안경만 쓰는지.
‘내가 이십여 년 동안 본 게 있는데 말이야.’
어휴, 레시우스 불쌍해. 그렇게 푸념하며 눈을 감았다.
***
“폐하.”
침대에 걸터앉은 레시우스. 르윈을 보는 그의 눈빛이 애달았다.
그에게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하명하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아마 켈리언 측도 지금쯤 토호르족과 맞닥뜨렸을 겁니다.”
“그렇군, 혹시 모르니 대공 쪽 일도 신속히 처리하라. 쓰러트릴 방법이 있었다면 깨울 방법도 있겠지.”
“예.”
순식간에 그림자가 사라지고 다시 고요한 방.
레시우스가 살포시 좁혀지는 르윈의 미간을 살살 어루만졌다.
‘어떤 악몽을 꾸는 건지.’
기껏 제국 내의 승냥이들을 다 치웠더니, 이젠 제국 밖의 이리 떼가 난리라니.
레시우스는 이 상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널 편히 재우기가 이리 힘들어. 르윈.’
레시우스의 시선이 단아한 르윈의 얼굴에 닿았다.
***
그리고 그 시각.
바하트의 2황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깊숙한 협곡에 설치된 켈리언의 진영.
핏물이 줄줄 흐르는 칼을 끌며, 켈리언이 막사 밖으로 나왔다.
“전하!”
눈을 휘둥그레 뜬 기사가 켈리언과 검을 번갈아 봤다.
“설마 죽이셨습니까?”
“그래. 거슬려서 죽였다.”
기사가 숨을 들이켰다.
저 안에 있던 자들은 토호르족의 사신.
아마 은밀히 거래를 제안하러 왔을 것이다.
야만족들답게 그들은 재고 따지지는 않지만, 때때로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주군은 인내심이 적으니 저들의 헛소리를 듣다가 베어 버렸겠지.
“어찌…… 전하. 저들이 당장 황도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전하의 병력이 황도로 쳐들어온 저들에게 묶인다면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다시 활개를 칠 수도 있습니다!”
켈리언은 일말의 동요 없이, 머리에 튄 피를 털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셔야 합니다!”
“돌아가지 않는다.”
켈리언이 피로 물든 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챙그랑, 하는 쇠붙이 소리가 잘게 났다.
“내가 그동안 많이 궁금했었거든. 베르웬 공작은 한동안 국경 방위군 수장이었어. 한 번쯤은 나랑 마주쳤어야 정상이지. 안 그러나?”
“…….”
“근데도 그러질 않았어. 이상하게 항상 엇갈렸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거 같군.”
이제 와서 생각하니, 다 하일렌 황제의 짓이었다.
문서나 들여다보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이런 짓까지 할 만큼 대담한 놈이라니.
“토호르족을 충동질한 거, 이거 아무래도 하일렌 샌님 짓인 것 같거든.”
“그게 무슨…….”
“공작과 내가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수작 같은데.”
켈리언이 피 묻은 목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그러나 이미 손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가 더 많아 오히려 묻히는 꼴이 됐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켈리언의 한쪽 입꼬릴 올렸다.
그의 눈이 광폭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 하일렌 제국이 있는 곳이었다.
“이러니까 더 보고 싶어지네?”
아름답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