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rriage Life in the Grand Duke Family Is Too Easy, Though RAW novel - Chapter (158)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8)화(158/177)
#158.
신전에 들어온 이들 틈에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나탈리 후작은 성수대에 고인 핏물의 깊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을 텐데.”
“혹시 모르니 지상에 다녀올까요?”
제이드의 물음에 나탈리 후작이 힐끔 쳐다보며 답했다.
“저번부터 계속 지상에 가고 싶어 하는구나. 왜? 메이벨이 걱정되니?”
“그럴 리가요. 애초에 메이벨과 가까워지라 명하신 건 어머니신데, 설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남녀 문제라는 건 딱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노파심에 물은 거란다. 언짢았니?”
“아닙니다.”
흡사 상사와 부하의 대화 같았다. 이전에 내 앞에서 살갑게 굴던 것과는 이질적인 모습.
‘가슴으로 낳았다고 한 건 순 개뻥이었네.’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탈리 후작은 제이드에게 일말의 애정조차 없는 눈치였다.
‘하긴 애정이 있었다 해도 엠버가의 사생아란 걸 알았는데 전처럼 대하긴 어렵겠지.’
이미 쉐리를 통해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나탈리 후작이었다.
자신이 키운 게 호랑이 새끼였다는 걸 알았으니 경계하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도 제이드의 출신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저 가능성만 보고 입적시킨 것 같았다.
흑마법사들은 박해받은 후로 흩어져서 살았으니까.
그사이 제 출신도 모르고 낙오되는 흑마법사의 후손도 적지 않을 터였다.
제이드도 어릴 적엔 자신이 흑마법사의 피를 잇고 있는 줄 몰랐겠지.
아마 나탈리 후작을 만나지 않았다면 영영 모르고 살았을지도.
내가 한참 둘의 대화를 엿들을 때였다. 나탈리 후작은 또 무언가를 꾸미는지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아델쿠스인지 하는 악룡을 또 소환할 작정인 듯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감이 그랬다.
‘미쳤어, 미쳤다고.’
과거에 그 난리를 겪고도 또 소환하려고 마음먹은 걸 보면 정말 뚝심 하나는 기막힌 집단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제례 따위는 솔직히 사라져 주는 게 나았다.
해로운 집단이 설치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초에 그 악룡이란 놈이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을 확률도 낮고.
“준비되는 대로 시행할 테니 실수하지 말고.”
“예.”
부하들이 묵례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돌연 제이드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었다.
은신 마법을 해 두어 정체가 들키진 않았을 텐데 어쩐지 눈이 마주친 기분이었다.
“…….”
침 넘기는 소리마저도 신중해져야 할 때, 제이드는 우연히 마주쳤던 모양인지 별 대응 없이 나탈리 후작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모두 보이지 않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나는 풀썩 주저앉았다.
얼결에 저들이 무얼 계획하는지 엿들은 상황.
이제는 위로 올라가 그걸 막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올라갈 방도가 없다는 거.
‘이를 어쩐담.’
아까 옷을 빼앗은 흑마법사는 말단이라 문을 열 줄 몰라 옷 말고는 도움이 안 되었다.
일단 그자를 포박해 숨겨 두기는 했으나 임시방편이었다.
그가 동료 흑마법사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먼저 이곳을 나가는 게 제일 좋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 실현하기 요원해 보였다.
보아하니 허락된 몇몇만 문을 열 수 있는 듯했으니까.
분명 어중이떠중이에게 문지기를 맡기지는 않았을 테니 상대의 실력을 모른 채 선공을 날리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일단 문을 열 줄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약체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했다.
그 후에는 재빨리 습격해 문을 열도록 협박해야 했고.
‘시간을 끌어 봤자 나한테 좋을 게 없어.’
이곳은 온전히 나탈리 후작의 구역이었다. 일단 지고 시작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내가 막 은신처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생각한 것보다 더더욱 겁이 없는 분이셨군요.”
“!!”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소리소문없이 내 뒤에 선 제이드를 보고 바짝 얼어 버렸다.
다행히 그의 옆엔 후작이 없었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하기도 뭐 한데.’
하필 제이드에게 걸리다니.
그는 나탈리 후작이 후계로 삼은 이였다. 제대로 상대해 본 적은 없으나 상당한 실력자일 게 뻔했다.
나는 우선 뻔뻔해지기로 했다. 쫀 게 티 나면 뭘 해도 안 되는 법이니까.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그쪽이 오길 기다렸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마치 그가 찾아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구니 그가 놀라워했다. 물론 나는 그에게 들킬 줄 몰랐지만 말이다.
제이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은 일부러 제게만 기척을 드러냈다는 뜻입니까? 저와 따로 대화하고 싶어서?”
말해 무엇하냐는 표정으로 우쭐대니 제이드의 표정이 깊어졌다.
사실 당시엔 눈이 마주친 게 맞는지도 확신하지 못했었다. 그가 나를 모른 척하고 후작과 사라질 줄 몰랐으니까.
한데 그는 나를 발견하고도 후작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말인즉, 후작 몰래 나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허풍을 떨어 보았는데 제법 먹히는 눈치라 다행이었다. 나는 마치 내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래서 나랑 뭘 거래하고 싶은 건지 물어도 될까, 소후작?”
겁을 주려던 상대가 오히려 우쭐해하니 제이드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입술을 몇 차례 달싹이다 말문을 열었다. 이미 나에게 말린 줄은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이걸 메이벨에게 전해 주십시오.”
제이드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열어 보지 못하도록 봉인 마법이 걸려 있어 정체를 알기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급해도 뭔지도 모를 물건을 전달해 줄 만큼 바보는 아닌데.’
내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그가 덧붙였다.
“어차피 그쪽도 이곳에서 나가고 싶을 거 아닙니까? 이것만 잘 전달해 주면 안전하게 나갈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안전하게 나갔다가 오히려 지상을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도 있지 않나?”
“딱히 그쪽에게 해가 될 건 없는 물건입니다. 이건 저와 메이벨의 문제입니다.”
“내가 꼈으면 내 문제이기도 한 거죠. 전 친구 뒤통수치는 사람 말은 잘 안 믿어요.”
“…….”
내 마지막 말에 제이드가 입을 딱 다물었다. 너무 자극했나 싶어 슬쩍 눈치를 보는데 그가 말했다.
“지난번 일은 유감입니다. 애초에 대공자비께서 정령사만 아니었어도 그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굉장한 화법을 사용하시네요. 쉐리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그쪽을 닮았네. 아주 남 탓하기 달인이야.”
“……역시 뒤를 봐 준 사람은 대공자비님이셨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모로.”
“그걸 이제야 알다니. 그쪽도 딱히 별거 없네요?”
내 도발에 제이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툭 튀어나온 적대적인 발언이었다.
아키드에게 상처 준 사람한테는 노력하지 않으면 살갑게 굴기 어려운 탓이었다.
게다가 난 저쪽한테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후라 더더욱 그랬다.
“원래 이런 분이셨습니까?”
그때 제이드가 다소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간 귀족이랍시고 겸손을 차린 모습만 보다가 돌연 본색을 드러내 많이 놀란 모양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강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굴어 버렸다. 뭐, 이왕 한 거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강강약약이라고 해 두죠. 그러니 이게 정확히 어디에 쓰일 물건인지 말해 줘요. 무턱대고 신뢰하기엔 이미 서로 칼을 겨눠 본 사이잖아요?”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제이드는 생각보다 단호했다.
“하는 수 없군요. 그렇다면 저도 어머니께 대공자비님을 데려가야겠습니다.”
제이드가 당장에 날 데려갈 것처럼 손을 뻗었다. 정령들이 이를 막아서자 내가 손바닥을 앞으로 뻗으며 황급히 말했다.
“자, 잠깐! 이대로 날 후작에게 데려가면 후회할 텐데요!”
“제가요?”
제이드가 그럴 리가 있냐는 듯이 뚱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이판사판이다 싶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전략을 꺼내었다.
“날 후작에게 데려가면 그쪽이 메이벨이랑 짜고 후작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는 걸 말하겠어요.”
“……생각보다 순진하시군요. 그쪽이 한 말을 어머니가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쪽이 엠버 가문의 사생아인 줄 모를 때의 일이죠.”
나는 나탈리 후작이 이미 제이드의 출신을 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말을 이었다.
“나탈리 후작이 엠버 가문을 모함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어요. 그 덕에 수장 자리를 차지한 것까지도요.”
“대체 그건 어떻게…….”
“그건 영업 비밀이고요. 확실한 건 후작이 그쪽 정체를 알게 되면 그쪽도 몹시 곤란해진다는 거죠.”
“…….”
“나야 뭐, 후작에게 잡혔다가 기회를 봐서 탈출하면 그만인데. 그쪽은 후작의 그늘 말고는 딱히 갈 곳도 없잖아요?”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되었다. 초장부터 세게 압박하는 게 상대를 정신 못 차리게 할 터.
다행히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니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 예상대로 제이드가 한 수를 접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셨군요. 벌써 거기까지 알아내시고.”
“짧은 순간 저에 대한 평가가 무척 다채로우시네요. 이쯤 되면 대충 저에 관해 다 파악하신 거 같은데, 이제 결정하시죠.”
화제 돌리지 말고 얼른 이 물건이 뭔지나 말하라는 뉘앙스에 제이드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