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rriage Life in the Grand Duke Family Is Too Easy, Though RAW novel - Chapter (57)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7)화(57/177)
#57.
의외로 정상적인 질문이 먼저 나왔다. 아키드가 뒷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래. 미안해야지. 세상에, 숨길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아픈 걸 숨길 수가 있니.”
“숨기다니요?”
아키드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엘레나가 말했다.
“의원의 말로는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을 거라고 하더구나.”
“아.”
아키드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엘레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역시 한 번이 아니었구나.”
“거리에 살 때, 한 번이요.”
“그때는 어떻게 버텼니. 의원에게 보였었니?”
“아뇨. 그냥…… 아프지 않을 때까지 계속 잤어요.”
“……미련하게 그걸 참았다고?”
“의원에게 가느니 빵을 사 먹는 게 나았으니까요.”
아키드의 덤덤한 대답에 엘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이 맞았다. 거리의 아이에게 의원을 찾아갈 만한 돈이 있을 리가.
나는 아키드가 유달리 아픈 것을 잘 참는 게 그때의 기억 때문이란 걸 알아채고 서글퍼졌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엘레나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네 상태를 의원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혹시 죽을병인가요?”
아키드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엘레나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동요한 것이었다. 엘레나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말렴.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
“그냥 네가 좀 특별한 거란다. 간혹 성인이 되기 전에 각성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있으니까.”
“각성이라고요……?”
“완전한 각성은 아니야. 각성할 때가 아닌데 각성한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거란다. 그래서 몸이 못 버티고 아픈 거고.”
“아.”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와 대공이 알아서 대비할 일이니 네가 염려할 건 없다.”
무뚝뚝한 말씨와 달리 아키드를 안심시키는 말이었다. 나는 유순해진 둘 사이를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노력이 아예 헛수고가 아니었구나.’
서로 관심도 없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관계 개선이었다. 게다가 아키드가 제로니스와 같은 대단한 먼치킨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니.
장래가 기대되니 얼른 7년이 지났으면 좋겠다. 물론 합방 때문은 아니다. 진짜로. 흠흠.
“대공비 전하, 파블로입니다.”
“갈 시간이 되었나 보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엘레나가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제 못다 한 검진을 하러 가자는 의미였다.
“금방 다녀올게요.”
나는 아키드의 손을 한 번 꼭 잡은 뒤 엘레나를 따라나섰다.
* * *
프로디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하델루스 성으로 돌아왔다. 하루밖에 묵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에드워드 에셀과 남주인 제로니스를 만났고, 아키드가 예기치 못한 발작을 일으켰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프로디움에 가게 될 거다. 명목은 여행이나 자선 행사가 좋겠고.’
엘레나는 아키드의 원활한 각성을 위해서는 프로디움에 정기적으로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프로디움이 자파르시아의 레어였던 곳이라 마나의 흐름을 고르게 잡아 주어 아키드의 몸에 좋다면서.
제로니스가 자파르시아의 유적지를 이곳저곳 돌아다닌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황실과 달리 하델루스가(家)는 프로디움과 같은 북부이고, 이미 정기적으로 후원도 하고 있어 방문 목적을 만들기가 수월했다.
엘레나는 프로디움을 떠나기 전, 나와 아키드에게 제로니스를 정식으로 소개해 줬다. 앞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탓이었다.
‘황태자 전하시란다.’
‘허억! 지, 지, 진짜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엘레나의 태연자약한 목소리에 나는 놀라는 척하느라 진땀을 뺐다.
거참,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먹고살기 힘들다.
‘앞으로 잘 부탁해. 종종 만날 테니까.’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제로니스가 아키드에게 악수를 청하던 장면은 여전히 뭉클했다.
원래라면 앙숙처럼 지냈을 두 사람이 하하 호호, 하며 친밀하게 악수를 하다니.
최애와 차애의 조합은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아키드의 발작 사건으로 제로니스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에드워드 에셀이 이곳에 있던 것부터가 서로 만날 운명이었구나, 싶기도 했다.
남주와 이렇게 빨리 엮이게 될 줄은 몰랐어서 다소 얼떨떨했다. 동시에 메이벨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신전 소속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을 터였다. 그녀가 루이스가의 후예라는 건 아주 나중에 밝혀지게 되니까.
‘고아원 이름이 이스터스였던가.’
동부에 위치한 고아원이니 수소문을 한다면 확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혹시 몰라 아실에게 조용히 동부의 이스터스에 ‘메이벨’이라는 이름의 여자애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 * *
유리로 된 천장에서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 나는 아키드와 엘레나와 함께 온실 속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누가 없으니 성안이 조용하고 좋구나.”
엘레나가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 ‘누구’가 하델루스 대공이라는 걸 아는 나는 잠자코 코코아를 홀짝였다.
얼마 전, 대공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스티그 섬의 일이 끝나지 않아 좀 더 머물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일이 꼬인 게 분명했다. 아키드가 엘레나의 말에 반응했다.
“생각보다 일이 더뎌지나 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영지를 비우신 적이 없었는데.”
“오염으로 인한 균열은 마수가 끊이질 않으니까. 아마도 황실에서 좀 더 머물러 달라 부탁했겠지. 북부의 정예부대는 마수 토벌 경험이 많으니까.”
“오염의 원인은 밝혀졌나요?”
“글쎄. 어떻게 된 게 스티그 섬의 오염 원인을 알 수 없다는구나. 원인이라도 알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 일도 아니고.”
나는 오염의 원인이라는 말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어, 혹시 괜찮다면 제가 정령에게 물어볼까요? 오래 산 친구들이라 오염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 같았어요.”
지난번에 알려지지 않은 오염의 원인도 알고 있던 걸 보면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엘레나는 미처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두 눈을 빛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제가 한번 부탁해 볼게요.”
“들어줄지 모르겠구나. 듣기로 정령들은 입이 무겁다던데.”
“그거 잘못된 기록 같아요.”
내가 정색하며 반박하자 엘레나가 눈을 끔벅였다.
“엄청 시끄럽거든요. 안 물어본 것도 술술술 말할 정도로 아주 가벼운 입을 가졌어요.”
― 시끄럽다니, 너무해!
― 너도 오랫동안 깨지 못하고 있어 봐,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
― 로에나는 우리의 위대함을 잘 모르는 거 같아. 속상해!
곁에 있던 정령들이 분노하며 부르르, 떨었다.
엘레나는 흰나비들이 내 머리카락을 붙잡아 당기는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셋이서 있는 티타임이라 정령들을 실체화한 채 내버려 둔 탓이었다. 엘레나가 정령들을 손가락질하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저러는 거라니?”
“반항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나비들을 무심하게 툭툭, 쳐내자 엘레나가 입가를 쓸었다. 위대한 정령을 홀대하는 현장에 기가 찬 표정이었다.
잠시 후, 엘레나가 말했다.
“정령들이 도와준다면야 원인을 알아내기 수월하기는 하겠구나. 어떻게 하면 원인을 알아볼 수 있는지 물어보겠니?”
사근사근한 말씨로 엘레나가 정령에게 손을 뻗었다. 인자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으로 보아 상대를 구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했다.
토라진 정령들이 엘레나의 반응에 도로 활기를 찾았다.
― 그 지역의 흙을 보면 알 수 있어.
“흙?”
갑자기 웬 흙이냐는 내 질문에 정령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 흙은 자연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 주거든. 오염된 땅뿐만 아니라 죽은 땅의 흙을 가져오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어.
― 맞아, 우리가 그 흙을 먹어 보면 자연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 때문에 오염이 시작된 건지 알 수 있어!
― 간단한 원인이라면 네가 굳이 현장에 가지 않아도 자연이 자정 능력을 되찾을 정도로 정화도 가능해.
가만히 정령들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령들을 놀려 먹는 것에 재미가 든 탓이었다.
“우와, 너희 흙도 먹어?”
내가 일부러 장난친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정령들이 파르르, 떨었다.
― 흙이 뭐 어때서!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는데. 물론 죽은 땅의 흙은 우리도 먹기 싫어, 맛도 없고 기분 나쁘니까!
― 맞아! 우리에게도 식성이란 게 있어. 우린 뭐, 맨날 델루스 꽃만 먹으며 살아야 하니?
― 힝, 머리는 빨갛고 눈은 파라면서 버릇없다니, 실망이야!
내 생김새와 버릇없는 게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열렬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왁왁거리며 반응해서 더 놀리고 싶은 건데, 정령들은 모르나 보다.
또다시 내 머리카락을 물어뜯기 시작하는 정령들에 엘레나가 당황해 뻗은 손을 어물쩍 물렸다. 내가 엘레나에게 정령들의 말을 전했다.
“아버님께 스티그 섬의 흙을 좀 구해 달라고 해 주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