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dicine-Selling Crown Prince RAW novel - Chapter 613
613화. 외전 : 용왕비의 초청장 (2)
“다들 안녕하시어요? 저는 황주 도화동의 심가네 여식이자, 용왕 배길수 님을 지아비로 둔 청이라 하여요.”
“…….”
어이가 없다.
믿기지가 않는다.
시각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기분. 혹은, 멀쩡하게 잘 지니고서 살아온 청각에 대한 의구심이 새삼스럽게 쑴펑쑴펑 솟구치는 느낌.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 저기…….”
라키엘은 당혹스러움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말이 원활하게 잘 나오지가 않았다. 지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정보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뭐야. 심가네 여식 청이……?’
그는 눈길을 들었다.
용왕비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20대 초반의 평범한 여자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함 그 자체였다. 너무나 전형적인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마치 조선시대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러니까 이건…….
‘왜 조선 사람이 여기서 나와?’
어째서 조선 여인이 용왕의 아내인 건데? 게다가 이름이 뭐? 심가네 청이? 그럼 성이 심씨라는 거고. 이름이 청이라는 거면. 합치면…….
‘심청이?’
효녀 심청?
심청전에 나오는 그?
혼란스러웠다. 이게 맞나 싶었다. 누구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한데 그런 심정은 천사장도 비슷한 거 같았다.
‘어이? 이게…… 맞아?’
쿡, 쿡.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천사장 로이드가 이쪽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하지만 역시나…… 모르겠다. 이게 맞는 건지. 대체 어찌 된 영문인 건지. 물론 그 와중에도 살짝 별개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데미안이나 지옥왕은 용왕비를 보면서도 나처럼 놀라지는 않고 있는데…… 어째서 천사장만 나랑 반응이 비슷한 거지?’
조금 이상했다.
혹시 천사장이 심청전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설마 한국인도 아닐 텐데 어떻게? 심지어 여긴 차원마저도 다른 곳인데?
“…….”
그러고 보니 전에 천사장, 지구로 출장을 제법 다녔다고 했지. 혹시 그때 심청전을 접하기라도 한 걸까.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고 미심쩍다는 건 변하지가 않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저기, 아, 저는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라고 합니다. 마젠타노 제국의 아드리아 대공이기도 하고, 으음, 다른 한편으로는 마계를 다스리고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한 용왕비를 우두커니 세워두고서 마냥 놀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빨리 정신머리를 수습하며 소개를 했다. 뒤이어 천사장과 지옥왕, 데미안도 용왕비와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먼 길을 오시느라 참으로 노고가 많으시었어요. 예로 드시어요.”
“아, 옙.”
그녀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널따란 대청이 나왔다.
대청의 구조마저도 너무나 친숙했다.
마치 사극 촬영 세트장에 온 것만 같았다. 혹은 용인에 있는 민속촌이라거나. 어쨌건 딱 그런 전통 한옥식 마당과 툇마루가 눈앞에 펼쳐졌다.
“후아…….”
감탄사가 이쪽의 입이 아닌, 천사장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덕분에 잠깐이었지만 볼 수 있었다. 이쪽의 눈길을 의식한 듯이 빛의 속도로 표정을 수습하는 천사장의 모습을.
“…….”
자꾸만.
뭔가가.
찜찜한데?
하지만 그런 의문을 더 느낄 틈은 역시나 이번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자아, 다들 앉으시어요.”
“옙.”
촤촥!
용왕비의 온화한 말에는 뭔가 모를 힘이 있었다. 권위나 위압감과는 정반대의 따스한 권유. 그러나 거역하기가 싫어지는 그런 종류의 힘이랄까. 마치, 저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엄청 나쁜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그러나 궁금한 건 못 참겠다.
결국, 라키엘은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어 질문을 꺼냈다.
“저기…… 용왕비님?”
“네에, 마계왕님?”
“혹시,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건너오신 분이신지요?”
“아아, 저 말씀이신가요?”
“넵. 혹여나 조선분이 아니신가 해서…….”
“어머나? 그 사실을 어찌 아시었어요?”
“아, 그게, 사실은 제가 비슷한 곳에서 온 처지라서 말입니다.”
“비슷한 곳이라니요?”
“한국입니다. 조선 다음에 세워진 나라인데…….”
“어마마, 어머나?”
이쪽의 말을 들으며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용왕비. 그녀의 만면에 반가움의 웃음꽃이 피어났다.
“설마하니 마계왕님이 같은 땅에서 나신 분이시었다니. 그 말씀대로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어요. 어찌 이런 연이 있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으음, 그래서 제 한국에서의 이름을 말씀을 드리자면, 이한입니다.”
“하오면 마계왕께선 이씨 가문의 장부이시었군요?”
“아, 옙.”
“어디 이씨 가문이시었나요?”
“어, 그게, 전주 이씨…….”
“네에?”
본격적인 호구조사(?)에 돌입하려던 찰나, 이쪽의 대답을 들은 용왕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그녀가 놀라움이 담긴 눈빛으로 물어왔다.
“전주 이씨 가문이라 함은, 임금님의 집안이 아닌가요?”
“아……. 그건…….”
“파가 어찌 되시는지요?”
“덕천군파…….”
“세상에나. 이런 귀한 분을 모시게 될 줄이야.”
“…….”
“아, 제가 이럴 때가 아닌 듯하여요. 모처럼 귀하디귀한 분이 걸음하시었는데 얼른 상이라도 내어 드리어야…….”
용왕비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녀는 이쪽이 말릴 틈도 없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대청 안쪽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이윽고 안쪽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초청장을 가지고 왔던 리빙아머가 밖으로 달려나왔다.
엄청난 규모의 밥상을 두 손에 들고서였다.
“삐각! 삐가각!”
쿠와앙-!
리빙아머가 밥상을 이쪽의 앞에 내려놓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일순간 지축이 흔들렸다. 그럴 법도 했다. 밥상의 크기만 해도 가로 길이가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으니까. 그 위에 어지간한 종가집 제사상을 한참이나 능가할 밥과 반찬이 군단급으로 차려져 있었으니까.
“……히에에엑?”
천사장 로이드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지옥왕 하비엘은 아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당장 들어오는 반찬의 가짓수만 해도 60가지는 충분히 넘을 듯했으니까.
한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코로롱! 코롱!”
“꼬이! 꼬이이!”
늙은 만티코어가 뚠뚠한 몸을 드러냈다. 그 널따란 등판 위에 더 많은 밥상이 얹혀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가고일이 밥상을 슉슉 들고서 지상으로 내려놓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뚜둔! 뚠! 뚜두둔!”
대청 옆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골렘이 두 손 가득 냉면과 육회가 담긴 상을 들고서 걸어왔다.
거기에 마지막은 불꽃의 도마뱀, 살라만더가 장식했다.
“더더더더더덕-!”
화르륵!
살라만더의 기합과 함께 가스레인지 10개를 켠 듯한 화염이 치솟았다. 그 위에 솥뚜껑이 얹혔다. 갓 꺼낸 삼겹살이 지글지글. 돼지기름에 김치와 마늘도 지글지글. 덕분에 실감할 수 있었다. 아아. 사람이 냄새만으로도 도파민을 뿜뿜할 수 있는 거였구나, 라고.
“차린 건 별로 없는 모자란 상이랍니다.”
“…….”
이거, 차려진 반찬만 다 들고 가도 5성급 호텔 뷔페 한식 코너를 10개는 충분히 채우겠는데요?
절로 감탄이 나왔다.
옆에서 천사장도 함께 감탄했다.
아니, 군침을 꿀꺽꿀꺽 삼켜댔다.
가만히 보니 그런 천사장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겉절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상차림.
그곳 한구석에 소박하게 쌓인 김치.
분명 이번에 김장을 하며 새로 담근 것으로 보이는 새김치 겉절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사장의 시선은 겉절이와 함께 모락모락 기름기 반질반질한 수육과, 그 옆에 놓인 무말랭이 무침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저 눈빛은 바로…….
‘조합하고 있어, 시선으로! 상상으로!’
겉절이에 수육과 무말랭이를 조합하는 천사장이라. 분명 수육을 먹어본 사람이다, 천사장은. 모종의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한국인 냄새가 나는데.’
그러고 보니 미심쩍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전에 함께 한국에 갔던 때에도 그랬다. 천사장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사람처럼 구는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걸 계속 숨기는 느낌도 든단 말이지.’
왜일까.
이유는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보고 싶었다.
하여 용왕비를 향해 빵긋 웃으며 말했다.
“우와……. 감사합니다. 설마하니 이런 엄청난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유, 아니어요. 차린 것도 없는 밥상이랍니다.”
“아이구, 이게 차린 게 없으면 다른 밥상은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역시 뭐랄까. 용왕비님 덕분에 타지에서나마 이렇게 고향의 음식을 먹게 되니 눈물이 나올 것 같네요.”
“귀한 분께서 맛나게 즐겨 주시면 제가 더 감사하답니다. 어서 드시어요.”
“옙, 잘먹겠습니다아.”
밥숟갈을 들었다.
그러자 용왕비가 흐뭇한 얼굴로 제일 맛있어 보이는 수육 접시를 은근슬쩍 이쪽 앞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역시나 이것이 한국인의 혈연빨인가.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참아냈다. 솟구치는 기쁨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곁눈질을 스윽. 천사장을 훔쳐보았다.
“…….”
한편, 천사장 로이드는 마계왕의 눈빛을 눈치챘다. 녀석의 의도 또한 단박에 깨달았다.
‘이 녀석, 나도 한국인이라는 걸 눈치챈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 사실을 숨기는 이쪽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이쪽이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밝히는 거라 여기는 거겠지.
“…….”
그러나 밝힐 수는 없다.
한국인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일단 어디 살았는지부터 서로 물어볼 거고. 몇 년생인지, 학교는 어디인지도 다 까야 할 건데.’
그럴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 하필이면 이놈도 한국대학교 출신인 거냐고.’
심지어 자신보다 한참이나 학번이 높았다. 삼촌뻘 수준으로 말이다. 물론 학과가 다르니까 그냥 아저씨 취급을 하면 되기는 하는데, 지금의 확고한 서열이 꼬이는 자체가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쓰읍, 젠장!’
천사장 로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자신도 먹어보고 싶었다. 용왕비가 은근슬쩍 스윽 추천해주는 제일 맛있는 반찬을.
하지만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대신 품에서 환상종들을 꺼내었다.
“에휴. 이 좋은 것들을 나만 먹을 수는 없지. 얘들아?”
“뽀동!”
“방울!”
“하망!”
“비벙!”
“꼬밍!”
그의 품에서 나온 햄스터, 방울뱀, 아기 하마, 비버, 뱁새 환상종이 눈을 반짝거렸다. 녀석들이 천사장이 따로 담아준 접시의 음식들을 보며 행복감에 젖었다.
그걸 본 라키엘도 얼른 품에서 환상종 꼬슴이와 뽀복이, 코몽이를 꺼냈다. 덕분에 양쪽의 환상종들이 서로 궁디를 씰룩거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더불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졌다. 이윽고 용왕굴의 늙은 만티코어를 비롯한 마수들도 함께가 되었다.
그 사이 라키엘과 데미안, 로이드와 하비엘의 배도 잔뜩 불러왔다.
행복지수가 꼭대기를 쭉쭉 찍었다.
“하아. 정말로…… 잘 먹었습니다아.”
라키엘은 불러오는 배를 슥슥 문지르며 진정성 가득한 감사의 말을 건네었다. 진심이었다. 너무나 맛있었다. 단지 오랜만에 고향의 음식을 먹은 때문만이 아니었다. 용왕비의 요리 솜씨가 실로 상상 초월의 경지인 덕분이었다.
그런 이쪽의 진심이 전해졌음일까. 용왕비의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가 배시시 배어났다.
그녀가 말하였다.
“귀한 분들께서 만족하며 드시었다니 저도 참으로 뿌듯하답니다. 하오니 여기, 이것도 조금만 드셔 보시어요.”
“아, 넵? 감사합니다!”
“어떠신가요?”
“아아, 정말 맛있습니다.”
“다행이어요. 하오면 이것도 조금 드셔 보시어요.”
“아아, 옙. 우물우물.”
“어떠신가요?”
“역시나 끝내줍니다.”
“참으로 다행이어요. 그럼 이것도 조금만…….”
“아, 옙? 이것도……?”
“네에. 조금만 드셔 보시어요.”
“아아, 넵. 우물우물…….”
“어떠하신가요?”
“이것도 끝내줍니다.”
“실로 다행이어요. 그럼 이것도…….”
“예에?”
용왕비가 또 척하고 내미는 접시.
그 위에는 탱글탱글 잡채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그걸 본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배가 고파서? 식욕이 솟구쳐서?
아니.
위기감을 느껴서였다.
‘위, 위험해, 더 이상은.’
배가 너무 불렀다.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 먹으라니.
더는 뭔가를 위장에 쑤셔 넣을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마계왕으로서 지닌 나름의 권능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는 건데도!
그러나…….
“차린 것도 별로 없는 마당이랍니다. 하온데 이 잡채만은 아직 누구도 손을 대지 않으셨으니, 한 입만 맛을 보아 주시어요.”
“…….”
탱글탱글 잡채 접시 너머에서 생글생글 웃는 용왕비.
그녀의 미소를 향해 차마 ‘NO’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저쪽 대청 너머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용왕 베르키스가 어느 순간부터 살벌한 눈치를 보내어 오고 있기도 했다.
“…….”
하.
인생.
결국, 라키엘은 눈물을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가, 감사합니다. 우물우물…….”
“어떠하신가요?”
“우물우물……. 물 좀…….”
“여기 식혜라도.”
“가, 감사합니다, 벌컥벌컥!”
“하오면 이제 후식을 내어오겠어요.”
“……네에?”
“떡과 과일에 한과, 그리고 으음, 곶감도 있고…… 엿도 있으니 엿도 드시어요.”
“…….”
“앞서의 차린 것도 별로 없던 밥상처럼 ‘단출하게’ 내어올 터이니 다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될 듯하답니다.”
“…….”
여전히 빵긋빵긋 웃는 용왕비.
심지어 그녀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보너스 같은 날벼락성 멘트도 빼먹지 아니하였다.
“오늘 이토록 귀한 분들을 모실 수 있어서 어찌나 기쁜지 모를 지경이랍니다. 하오니 다짐컨대, 내년 김장에 여러분을 초청할 때에는 상차림에 더욱 만전을 기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할 생각이어요.”
“…….”
하, 하지 마세요. 그런 최선. 제발.
라키엘과 데미안, 천사장 로이드와 지옥왕 하비엘은 누구 하나의 예외도 없는 끔찍한(?) 기분에 젖어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