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12
◈ 112화. 움직이는 자들
서장 전 지역에 무천극의 이름으로 소집령이 내려졌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혈교도들은 누구도 알지 못할 만큼 은밀히 종적을 감추고 창도 인근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변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서장을 오가던 일부 상인이 미세하게 오른 물가에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서천상단의 대행수, 조상이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창도의 시전을 둘러보고 객잔으로 돌아온 조상은 탁자 앞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마주 앉은 호위장 중곡이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철값이 전보다 두 푼 정도 올랐단 말이지.”
이 할도 아니고 두 푼이라는 말에 중곡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탁자에 올려진 화과주의 달콤한 주향과 오장항육의 먹음직한 냄새도 조상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중곡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그 정도 오르고 내리는 것은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그런데 이번엔 좀 달라. 철만 그런 게 아니고 비단, 약재, 고깃값까지 같이 올랐단 말일세.”
“철과 비단, 약재와 고기?”
중곡은 그제야 조상의 심각한 얼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주변을 살핀 조상이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쉿.”
중곡은 마른침을 삼키며 탁자에 가슴을 바짝 붙였다.
“정말 그들이 움직인단 말입니까?”
조상은 연신 곁눈질을 하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혈교가 드디어 움직이는 모양일세.”
“어서, 우리도 어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눈을 돌린 조상은 음식을 그릇 채로 들고 입안에 쑤셔 넣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배를 채운 중곡은 일어나는 조상을 따라 객잔을 나섰다.
그들은 창도의 외곽, 며칠간 머물 생각으로 빌려둔 장원에 도착했다.
날카롭게 주변을 살핀 중곡이 조상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행수님.”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무인도, 담장 너머로 들려와야 할 인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핏빛 무복에 복면을 쓴 두 사내가 걸어 나왔다.
‘혈교!’
조상과 중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 중 작은 체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서천상단의 대행수 조상. 그대인가?”
나직한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진다.
조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소. 설마 안에 있는 사람 모두 죽인 것이오?”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한 번 더 물으면 네 말대로 전부 죽이겠다.”
“…….”
섬뜩한 협박에 조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작은 사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을까지 이곳에 머물러라. 외부와 연락을 취하지 마라. 만일 내 말을 어긴다면…….”
복면 위로 드러난 짙은 혈광이 형용할 수 없이 오싹하다.
“네놈들은 뼛가루가 되어 돌아갈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가 큰 사내가 다가와 중곡의 검을 회수했다.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포박된 채 재갈까지 물고 있는 상단의 식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대들의 명에 순순히 따를 테니 포박은 풀게 해주시오.”
“허가 없이 담장 밖으로 나온다면 누구든 목을 벨 것이다.”
“알겠소.”
엄포를 놓은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큰 체구의 사내는 대문에 빗장을 걸고 앞을 지켰다.
조상은 무인과 쟁자수들의 포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다친 곳은 없는가?”
“송구합니다.”
무인들은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적에게 굴복했다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궜다.
조상은 애써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세상엔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네. 괘념치 마시게.”
그들을 다독인 조상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요숭은 어디 갔는가?”
이번 상행에 처음으로 따라온 쟁자수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멀리 장원이 보이는 가옥의 지붕 위.
조용히 장원을 주시하던 젊은 사내는 지면으로 훌쩍 뛰어내려 낡은 옷을 툭툭 털었다.
“움직이는가.”
주변을 은밀히 살핀 사내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 * *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황량한 초원.
수십 기의 인마가 검은 바람이 되어 질풍같이 내달린다.
선두에 선 흑면탈의 사내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외쳤다.
“서두른다!”
“예!”
뒤따르던 무인들은 힘주어 고삐를 휘둘렀다.
혈교 최강의 타격대, 수라대(修羅隊)가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창도의 남쪽에 위치한 이향산(異鄕山)이었다.
산자락의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던 여인과 맞닥뜨렸다.
“사, 살려주세요.”
흑면탈에 가려진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늦었나?’
매캐한 타는 냄새와 함께 짙은 혈향이 이곳까지 여실히 전해진다.
그때 안에서 핏빛 무복을 입은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사내는 흑면탈을 힐끔 쳐다보고는 젊은 여인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아악! 제, 제발 살려주세요!”
“소교주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마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때 흑면탈의 뒤에 있던 사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멈춰라. 이분이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설마 수라대주를 알아보지 못할까?”
“예를 갖춰라.”
“우리 염화대(炎火隊)는 오로지 소교주의 명에만 따른다.”
말에서 내린 흑면탈의 사내가 가면을 벗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베일 듯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청년.
바로 혈교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인, 무봉(武鳳) 가진천이었다.
“소교주는 어디에 계시냐?”
마치 무저갱의 어둠과 마주하는 듯한 섬뜩한 눈빛.
그것과 마주친 염화대원은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안에서…….”
말이 끝난 순간, 가진천의 소검이 번뜩이더니 염화대원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잡혀있던 여인은 머리채를 움켜쥔 손이 풀린 뒤에야 이변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던 여인은 그만 정신을 잃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부대주 금위상이 가면을 벗고 다가와 물었다.
“대주. 소교주의 부하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수라대가 이곳까지 온 것은 무혼광인을 가져와야 할 소교주 무초걸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진천은 개의치 않고 명을 내렸다.
“절반은 관을 확인하고 절반은 마을 사람을 구해라. 염화대가 저항한다면 죽여도 좋다.”
“존명.”
명이 떨어진 순간 수십 명의 수라대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가진천은 타오르는 마을에 발을 내디뎠다.
이따금 들려오는 쇳소리와 여인들의 비명이 점차 잦아드는 걸 보니 수라대원이 염화대와 만난 모양이다.
마을의 중앙, 지독한 사기가 문밖까지 느껴지는 장원에 도착한 가진천은 반쯤 부서진 대문을 걷어찼다.
쾅!
혈흔이 낭자한 마당, 수십 구의 시신이 널브러진 가운데 중앙의 굳게 닫힌 방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악! 제, 제발!”
탓!
지면을 박차는 순간, 꺼지듯 사라진 가진천은 순식간에 방문을 열어가고 있었다.
“소교주.”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광경이 가진천을 맞이했다.
내장이 훤히 드러날 만큼 처참한 몰골의 여인.
시뻘건 눈동자, 피에 젖은 몰골로 여인의 목을 움켜쥔 사내.
토악질이 나올 만큼 역겹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소교주 무초걸은 아무렇지 않게 히죽 웃었다.
“왔어?”
“소집령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저 없는 가진천의 음색이 북풍한설처럼 차갑다.
“잠깐만. 이년 좀 먹고 나서…….”
그 순간 가진천의 소검이 번뜩이더니 여인의 목을 단숨에 잘라냈다.
서걱!
“어?”
물어가던 목이 날아가자 무초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가진천을 돌아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가셔야 합니다.”
죽은 여인을 응시하던 무초걸이 혈광을 희번덕이며 발악하듯 외쳤다.
“내가 지금 배가 고프잖아!”
가진천의 전신에서 태산 같은 기운이 솟구치더니 건물이 무너질 듯 몸을 떨었다.
“소교주.”
낮게 깔리는 음성과 함께 지독한 살기가 전신을 옥죄어오자 무초걸의 두 눈은 본래의 빛을 되찾아갔다.
피에 젖은 무초걸의 세상이 하얗게 변해간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는 영문 모를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냐?”
가진천은 그제야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수라대주 가진천이 소교주를 모시러 왔습니다.”
* * *
일렁이는 촛불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실내.
활짝 열린 창가에 선 한천월은 쏟아지는 비를 응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손이 나란히 내 속을 긁는군.’
무림에 출두해 승승장구하던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초평천.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분열시킨 진무립.
자신이 이뤄온 모든 걸 망친 자들이 사천맹을 돕겠다고 무혼광인의 약점을 알려왔으니 속에서 천불이 치미는 것이다.
마도림과 중소방파의 연쇄 이탈에 더해 사대거파의 고수들까지 빠져나간 사천맹은 한동안 내부 정비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만일 혈교의 위험성을 알리며 사대거파를 설득하지 못했더라면 사천맹은 지금쯤 와해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후후후.”
살기 가득한 웃음소리가 빗소리에 사라져 갈 무렵, 누군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맹주님.”
비각주 정운창의 목소리에 한천월은 창을 닫고 돌아섰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정운창이 들어와 예를 갖췄다.
“서장에서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연락이 끊겨?”
한천월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패였다.
비각주에 부임한 정운창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서장행에서 약점이 노출된 정보망의 재구축이다.
자신이 보기에도 빈틈이 없던 정보망이 멈췄다고 하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정운창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혈교가…… 움직인 모양입니다.”
“음.”
나직이 침음한 한천월은 탁자 앞에 앉았다.
‘비록 중소방파가 빠져나갔으나 전력은 그들이 있을 때보다 더욱 강해졌다. 충분히 혈교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다.’
공위맹의 위상은 나날이 상승하고 사천맹의 명성은 끊임없이 추락하는 지금.
한천월은 이번 전쟁이 역전된 두 맹의 평판을 반전시킬 기회라고 여겼다.
“사대거파에 소식을 전파하고 대설산맥 인근의 경계를 두 배로 늘리게.”
“맹주님. 사대거파를 모두 본 맹에 불러들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본진을 비우잔 말인가?”
“예. 적의 움직임이 모호한 상황에서 그 편이 대처하기 쉬울 듯합니다.”
한천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사대거파일세. 본진이 불타오른다면 누가 본 맹을 믿고 힘을 실어주겠는가? 언제든 움직일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게 나아.”
지난 사건의 여파로 사대거파에서 재차 지원을 받은 게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정운창은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대거파에 소식을 전파하겠습니다.”
그가 나가자 한천월은 차갑게 눈을 빛냈다.
‘혈교도, 마도림도 이번 전쟁이 끝난 뒤엔 내 발밑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 * *
쏟아지는 장대비가 쉴 새 없이 지붕을 두드린다.
여느 때 같으면 제법 운치 있게 느껴질 빗소리였으나 오늘만큼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서장의 상인들이 전부 억류됐다?”
의혹으로 가득한 목소리는 바로 진무립의 것이었다.
흠뻑 젖은 적모개가 비를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쟁자수로 따라갔던 제자가 억류되기 전에 가까스로 탈출해 소식을 전해왔소.”
“맹주님께 보고는?”
“지금 다녀오는 길이오. 곧 각주들을 소집하실 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비를 뚫고 달려왔다.
“대전으로 모이라는 맹주님의 전언입니다!”
적모개가 씩 웃었다.
“빠르군. 갑시다.”
두 사람이 대전에 도착했을 땐, 흠뻑 젖은 수뇌들이 탁자 앞에 둘러앉은 상태였다.
초평천이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둘이 함께 오는 걸 보면 이야기는 들었겠구나. 혈교가 움직였다.”
진무립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당장 소거령을 내리고 모든 방파의 무인과 식솔들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놀란 각주들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집을 비우잔 말씀이시오?”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진무립을 믿는 그들이라지만 지금의 말은 섣불리 동조하기 힘들었다.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사문을 비우라는 것은 그들로서도 망설여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무립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부서진 집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는 법입니다. 자존심을 지키고 사람을 버리는 실수를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