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22
◈ 122화. 흑사칠랑, 그리고 사천맹
내리치는 번개가 어둑한 세상을 밝힌다.
콰르릉!
뒤따르는 천둥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공터를 중심으로 고작 여덟 채의 초옥이 장승처럼 둘러싼 산속 작은 마을.
남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에서 죽립을 눌러쓴 사내가 공터에 접어들었다.
입구 옆의 초옥 문이 벌컥 열리며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야성미 넘치는 중년인이 나타났다.
“늦었군.”
“비도 오고 제법 경계가 삼엄하더군. 비각까지 잠입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쯧. 그냥 정문으로 들어갈 것이지.”
처마 밑으로 걸어간 사내가 죽립을 벗자 평범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흑사칠랑 유일의 살수, 은랑(隱狼) 장청이 비를 털어내며 말했다.
“적당히 실력은 보여줘야 몸값을 올릴 거 아니냐?”
직접 비각주의 집무실에 서신을 남기고 온 이가 바로 장청이었다.
방에서 나온 중년인, 도랑(刀狼) 도운수가 벽에 기대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보면 사천맹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도 우기에게 먹이는 영약값이 모자랐는데 잘된 일이다. 은자 천만이라면 당분간 약값 걱정은 없겠지.”
도운수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한테 들어간 약값이면 성도 땅의 절반도 샀을 거다.”
“그놈의 무재(武材)는 진짜야. 분명 죽은 흑랑(黑狼)의 뒤를 이을, 아니 흑랑을 뛰어넘을 재목이다.”
흑랑 구중천.
천하대전 직전 목숨을 잃은 그는 젊은 시절 신룡 단소룡과 유일하게 무승부를 이끌어냈던 천하 최강의 낭인이었다.
잠시 휴식한 장청은 다시 죽립을 눌러쓰고 일어났다.
“사천 무림의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거 같다. 공동에 다녀올 테니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동굴.
불빛 한 점 들지 않는 공동에 살갗을 에일듯한 살기와 더불어 일진광풍이 몰아친다.
콰앙!
폭음과 함께 발바닥이 길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자욱하게 퍼진다.
“조심!”
비도를 회수한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그녀의 경고에 곁에 선 사내가 창대를 끌어 올릴 때였다.
흐릿한 인영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쾅!
창대가 마치 활처럼 휘더니 사내의 신형이 화살같이 튕겨 나갔다.
“큭!”
검은 그림자의 뒤로 두 자루 쌍검이 벼락같이 짓쳐 들었다.
쐐애액!
강렬한 검풍과 함께 쏘아진 검극이 그의 등에 닿기 직전, 폭풍처럼 회전한 검은 그림자의 손바닥이 두 자루 검신을 망치질하듯 후려쳤다.
쩌정!
손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과 함께 사내의 신형이 우측으로 미끄러진다.
반격에 성공한 검은 그림자가 거친 야수처럼 사내의 뒤를 추격했다.
말아쥔 주먹으로 육중한 내력이 모여들자 동굴이 지진을 만난 듯 진동한다.
드드드드…….
사내의 주먹이 전방으로 뻗어나가기 직전이었다.
“그만!”
나직한 외침이 공동에 울려 퍼지자 태산마저 무너뜨릴 듯했던 광폭한 기세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숨 막히는 비무의 끝.
공동의 입구가 열리며 새어 들어온 빛이 움푹 꺼지고 패여 나간 공동을 비췄다.
검은 머리띠에 단정한 외모의 청년, 검랑(劍狼) 서천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기. 그걸 쓰면 동굴이 무너질 겁니다.”
언뜻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서천휘는 불혹이 훌쩍 넘은 노련한 고수였다.
짧은 머리가 사방으로 뻗쳐 나간 야수 같은 인상의 청년, 장우기가 반항적으로 말했다.
“그럼 미련하게 얻어맞고 있으란 말이야?”
뒤에선 미모의 중년 여인, 비랑(飛狼) 비사령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야! 어깨 위에 머리가 붙어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 천화력권(天火力拳)은 이런 상황에서 쓰는 게 아니잖아?”
발끈한 장우기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시끄러워!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이 망할 할망구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사령의 눈에 불이 붙더니 전신에서 지독한 살기가 솟구친다.
“할망구?”
정신이 번쩍 든 장우기가 움찔하며 서천휘의 뒤에 숨었다.
“좀 말려줘.”
“하하하!”
그때 입구로 들어오던 빛에 그늘이 지더니 장청이 나타났다.
“맹에서 우리 요구를 수용했다.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조금 더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동굴의 그늘 속에서 지적인 외모의 중년인, 지랑(智狼) 현진학이 쌍검을 회수하며 걸어 나왔다.
“가지.”
장우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딜?”
서천휘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천하에 새로운 흑랑이 탄생했음을 선포할 시간입니다.”
* * *
무천극과 헤어진 진무립 일행은 성도를 끼고 돌아 북동쪽으로 달렸다.
추적추적 비가 쏟아져 내리는 음산한 들판.
선두에서 달리던 진무립은 후방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소를 발견했다.
단려화가 멈춰 서며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역시 잘 안된 모양이네요.”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도 안 했다.”
사천맹을 설득하겠다던 그녀를 말리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그녀가 한천월과 사천맹의 실태를 눈으로 직접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의 제자들을 이용해 다음 계획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어느새 이들 앞에 도착한 자소가 가쁜 호흡을 고르며 반장을 취했다.
“여기 계셨구려.”
진무립이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한천월은 당연히 사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진무립의 말에 따라 서월각주 정연을 만난 자소는 그녀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장문령을 발동해서라도 제자들을 구하려 했으나 정연은 위기에 빠진 사천맹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자소는 그대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나의 업보인 게지.’
진무립의 말처럼, 자신의 무관심이 사천맹을 그들만의 세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자소는 쓴웃음을 감추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동쪽으로 탈출하라고 말해두었다오.”
“일단 가시죠. 놈들이 곧 행동을 개시할 겁니다.”
자소가 달리기 시작한 진무립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은공.”
“말씀하십시오.”
“맹을 벗어나 백 장 정도 나아갔을 때, 구양무가 빈승을 기다리고 있더구려.”
단려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무대주요?”
“아미의 일을 궁금해하기에 솔직하게 말해주었지. 그리고 정연에게 했던 말을 그에게도 해주었소.”
진무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일행의 앞에 저 멀리 나직한 야산이 나타났다.
진무립을 발견했는지 유대하가 튀어나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여깁니다!”
그의 뒤로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 나타난다.
근 일 년만의 해후.
쉰 명의 광룡대가 입가에 손을 모아 외쳤다.
“소공자를 뵙습니다!”
한달음에 달려간 진무립이 광룡대의 면면을 살피며 씩 웃었다.
외형상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이들이 풍기는 자연스러운 기도는 과거의 광룡대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쓸만하군.’
새삼 백채륜의 능력에 감탄이 나온다.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으나 시간이 없구나. 이번 일부터 해결하고 거하게 마셔보자.”
빙그레 웃은 풍연이 물었다.
“임무를 알려주십시오.”
진무립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곧 사천맹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퇴로를 확보하고 패퇴하는 무인들을 구출하는 게 이번 임무다.”
한경이 도파를 툭 치며 말했다.
“드디어 실전이로군. 저희는 언제든 싸울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광룡대 전원은 달라진 자신들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곧 싸움이 벌어질 거다. 나머지는 다음 장소에서 설명하지. 가자.”
몸을 돌린 진무립이 신법을 전개하자 은무대와 광룡대가 일제히 그 뒤를 따라붙었다.
후방에서 광룡대의 면면을 살피던 자소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천맹의 천무대 못지않게 강렬했다.
‘마도림이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었구나.’
앞에서부터 뒤까지 그들을 둘러본 자소가 눈에 띄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설마 소림에서 지원을?”
잔뜩 인상을 구긴 전유가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오!”
* * *
사천맹을 둘러싼 울창한 숲속.
내리는 빗줄기가 잎새를 타고 흐르는 가운데 가지런히 누운 아홉 구의 시신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흑천대주 흑염공이 바닥에 부복했다.
“감시자를 모두 처리했습니다.”
무천극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보고로 들었던 평소의 감시체계와 다르지 않군. 역시 진무립에게 듣지 못한 것인가?”
자인경이 답했다.
“사천맹이 싫다고 나간 놈입니다. 굳이 말해줄 의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놈은 결코 이번 싸움을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놈도 사천맹이 쉽게 무너지길 바라지는 않겠지요. 어느 순간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진무립이 숲속에서 두 사람에게 새긴 강렬한 인상은 이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자인경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곧 우리의 존재를 알아챌 겁니다. 여기서 지체하면 기습의 의미가 없습니다.”
숲을 경계하는 무인들을 제거한 이상 일각 안에 움직이지 않으면 사천맹에서 낌새를 알아챌 게 분명했다.
무천극은 고저 없는 음색으로 담담하게 물었다.
“당가는?”
“전령이 당가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남문에 퇴로를 열어둘 것입니다. 당가의 지원부대가 이동할 길목에 매복을 준비해 두었으며, 본가를 비우는 순간 들이닥칠 부대 또한 은밀히 이동 중입니다.”
“당가에는 독왕이 있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두었느냐?”
“독왕이 제아무리 십대고수라곤 하나 이런 날씨에 수라대주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턱을 매만지던 무천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대주 가진천은 자신을 제외하면 교에서 적수가 없는 고수.
충분히 이번 일을 믿고 맡길 만한 남자다.
“가지.”
“존명.”
바스락거리는 수풀의 울부짖음이 점점 거칠어진다.
수천의 무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사천맹이었다.
* * *
고요한 운룡각의 지붕 아래.
나란히 선 두 남녀가 먹먹한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네요.”
진설란의 표정 또한 하늘색과 다르지 않게 우울해 보인다.
당천은 정말 모처럼 풍광에 눈을 돌리며 감상에 젖어 들었다.
“마치 하늘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군.”
진설란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당천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 보니 나온 말이다. 신경 쓰지 마라.”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진설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는 이곳에서 모두가 함께였는데.”
무인들이 빠져나간 운룡각은 금호대가 단독으로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죠.”
진설란이 못내 아쉬움을 삼킬 때였다.
활짝 열린 정문 밖에 천무대의 조장 당자경이 나타났다.
“소가주!”
넓은 마당을 달려오는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다급하다.
당천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주변을 살핀 당자경이 나직한 어조로 힘 있게 말했다.
“구양대주가 아미의 장문인 자소사태와 만났다고 합니다. 청성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그런…….”
진설란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리는 가운데 당천의 표정이 그답지 않게 딱딱히 경직됐다.
아무런 언질조차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성이 무너진다고?’
아미의 장문인이 직접 찾아와 말할 정도면 거짓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당자경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사태의 말로는 지금 청성을 무너뜨린 적이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라 합니다.”
“맹에서는 어찌 아무런 반응이 없단 말입니까?”
“반파된 아미파를 적도에게서 구한 것이 다름 아닌 광룡이기 때문입니다.”
당자경은 아미산의 전투, 자소가 진무립의 이름을 꺼내지 않은 이유와 청성이 무너진 것을 의심하는 까닭을 차례로 설명했다.
‘그 녀석이…….’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진무립의 미소가 떠오른다.
진무립의 추측이라면 믿을 만하다.
당천의 눈빛이 깊어진다.
“비각에선 전혀 감지를 못했단 말입니까?”
“함께 서장에 다녀온 소가주라면 익히 아실 것입니다. 비각의 정보만을 맹신하다가 우리 천무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게다가 지금의 비각주는 문경 형님의 능력에 미치지 못합니다.”
당자경은 실종된 비각주 당문경의 사촌.
그는 당문경이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를 한천월에게 천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천의 어깨를 덥석 잡은 당자경은 두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소가주. 잘 들으셔야 합니다. 전투가 벌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뭘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상황이 온다면 무조건 동문을 넘으셔야 합니다. 동문으로…….”
그때 세 사람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솟구치자 세 사람은 동시에 운룡각의 지붕으로 뛰쳐 올랐다.
“정말…… 이었네요.”
흔들리는 진설란의 동공에.
“…….”
딱딱하게 굳은 당자경의 두 눈에.
차갑게 식어 내린 당천의 깊은 눈에 비친 것은 무너진 담장을 돌파하는 붉은 바람, 혈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