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30
◈ 130화. 의뢰
사대거파 중 유일하게 건재하던 점창파가 무너졌다.
장문인 교현의 죽음과 함께 점창산에 남아있던 도사들은 혈교도의 맹렬한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차디찬 주검이 되어버렸다.
사천을 지원하고자 북상하던 점창의 무인들은 적의 계략을 알아채곤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발을 돌리려던 그들은 적모개가 보낸 거지의 설득에 분을 억누르고 북쪽으로 행보를 이어갔다.
사천맹의 붕괴와 사대거파의 변고.
삽시간에 퍼진 소문은 빠르게 천하로 퍼져 나갔다.
혈교가 대설산맥을 넘었다는 소식보다 변고가 먼저 들려왔으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암울한 이야기만이 들려온 것은 아니었다.
아미와 당가에 사천맹의 무인들까지 구한 젊은 영웅.
삼십여 년 전의 참사에서 벗어나 부활의 날갯짓을 펼치기 시작한 마도림의 소공자.
비보와 함께 들려온 사천의 광룡(光龍) 진무립에 대한 이야기는 당금 천하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천하의 눈과 귀가 사천으로 모여든 가운데, 결전의 날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주인이 바뀐 중목원의 최상층.
부서진 창문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혈교도들이 무천극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토록 바라던 풍경이지만 반가운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인경의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놈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사천맹을 먼저 친 것은 바른 선택이었다.
공위맹보다 사천맹에게 배후를 찔리는 것이 더 아플 테니까.
결과적으로 사대거파를 침몰시켰고 사천맹을 손에 넣었다.
문제는 공위맹에 자신들의 숨통을 조일 만한 날카로운 족쇄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주군.”
자인경의 목소리였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자인경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공위맹의 무인들이 파악산(巴岳山)에 진을 친 모양입니다.”
“파악산?”
“성도와 중경을 일직선으로 그었을 때, 사천평야가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곳입니다.”
사천평야가 끝나는 지점부터 중경까지는 강처럼 길게 뻗은 나직한 산맥 네 개를 넘어야 한다.
파악산은 그 중 첫 번째 산이었다.
“산이라, 역시 제대로 붙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전쟁이 시작되고 사대거파의 무인들만 오천이 죽었습니다. 중소방파가 건재하다곤 하나 정면에서 붙을 배짱은 없을 것입니다.”
진무립이 끼어든 아미, 당가와 달리 청성과 점창은 전멸을 면치 못했다.
거기에 사천맹에서 죽은 숫자가 이천오백이다.
무천극이 한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인경을 계속해서 중용하는 이유였다.
자인경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파악산으로 합류할 사대거파의 무인들은 대략 이천에 달할 것입니다.”
“그들이 합류하게 그냥 둔단 말이냐?”
진무립이 있다곤 하나 중소방파의 전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게 없었다.
하지만 유인책에 끌려나갔다가 살아남은 사대거파의 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인경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그냥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무천극의 눈이 가늘어졌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손바닥 보듯 꿰고 있는 서장이라면 모를까 우리의 땅이 아닌 곳에서, 어설프게 합류를 저지하겠다고 나섰다가 또다시 광룡에게 당할까 걱정스러웠습니다.”
“지금 겁을 먹었다고 말하는 것이냐?”
“광룡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은 제가 놈의 행방을 읽지 못했고 놈이 항시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는 분명 저보다 뛰어납니다.”
군사의 자리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
자인경은 지금 객관적으로 자신과 진무립을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인경 개인의 용기일 뿐, 무천극을 납득시킬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무천극의 전신에서 육중한 사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네 머리가 계속 목 위에 붙어있어야 할 이유를 말해보아라.”
쓸모를 증명하라는 말.
자인경은 고개를 들고 당당히 말했다.
“이 전쟁, 속하가 놈보다 부족하다고 하여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놈이 늘 예측을 벗어난 곳에 나타났다면, 이번엔 예측 가능한 곳에 두고 싸우면 될 일입니다.”
전쟁은 일대일의 생사투가 아니다.
자인경은 오랜 시간 고심해온 방책을 말했다.
“장로들까지 합류한 이상 전력은 분명 본 교가 월등히 앞섭니다. 힘과 힘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습니다.”
말이 끝난 순간, 무천극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어서 들려온 엄청난 굉음이 사천맹을 뒤흔들었다.
콰아앙!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벌떡 일어난 자인경이 부서진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지붕을 밟고 뛰어내린 자인경은 소리가 들려온 북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이 병기를 빼든 채 밖을 노려보고 있었고 인근의 무인들이 하나둘 빠르게 나타난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비켜라.”
자인경은 말끝을 흐리는 부하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깨져나간 문짝이 바닥을 뒹구는 가운데, 문밖으로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팔 인의 흑의인이 보인다.
“네놈들은 누구냐?”
짧은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야수 같은 사내, 흑랑 장우기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진짜 뻘건 놈들밖에 없네. 이러면 곤란한데.”
딱!
도랑 도운수가 그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대뜸 힘부터 쓰면 어쩌자는 거냐?”
장우기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왜 때려! 돈 줄 놈이 사라졌는데 화가 안 나면 그게 사람이야?”
홍일점 비사령이 두 사람의 머리채를 잡아 반대로 휙 당겼다.
“그만해. 창피하게 무슨 짓이야?”
“아아! 이 망할 할멈이!”
“이거 안 놔?”
자인경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검과 도, 쌍검과 창을 비롯해 개성이 뚜렷한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분명 비각주의 집무실에 흑사칠랑을 고용하려 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청부금이 필요하지만 어떤 일에도 실패한 적이 없는 전설적인 낭인들.
천하대전에서 활약한 흑사칠랑의 명성은 서장까지 들려올 만큼 유명했다.
“그대들이 흑사칠랑인가?”
지적인 인상의 중년인, 지랑 현진학이 앞으로 나섰다.
“미안하군. 사천맹 비각의 의뢰가 있어 이곳에 왔네만 의뢰인이 사라진 바람에 대장이 흥분한 모양이야. 부서진 문 값은 두고 가지.”
은자 스무 개를 바닥에 내려둔 현진학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자인경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돈이 부족한가?”
“그것이 아니다.”
자인경의 입가에 모처럼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사천맹에선 그대들을 얼마에 고용하려 했는가?”
흑사칠랑은 절대 의뢰인을 배신한 적이 없는 이들.
돈으로 고용할 수만 있다면 분명 전력이 된다.
“우, 우릴 고용하겠다고?”
장우기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현진학은 빙그레 웃었다.
“은자 천만.”
* * *
파악산 동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는 비슷한 형태의 산이 있는데 바로 벽산(璧山)이었다.
정상에 올라선 두 사내가 산 아래로 펼쳐진 초원과 그 너머의 파악산을 눈에 담았다.
“전쟁이라. 평화가 길긴 했지.”
“북방에선 수시로 전쟁이 벌어지잖아요?”
“무림의 전쟁 말이다.”
베일 듯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은 바로 황궁에서 무림을 감시하는 흑전원의 수장 국영승이었다.
“당신이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궁에서도 이번 싸움을 주목하는 모양이에요.”
마주 선 일자 머리의 앳된 청년은 천하십대고수 중에서도 최강을 다투는 궁황 투월초였다.
그는 지천명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외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국영승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혈교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 촌락 여러 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난 그것을 조사하러 온 것이다.”
보통 무림인에 의해 양민이 살해당할 경우 그 지역을 관장하는 방파에 일임하거나 흑전원의 무인을 파견해 조사한다.
그러나 이번은 사안의 중차대함을 감안해 수장인 국영승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증거는 찾았나요?”
“현장에 도착했을 땐 시신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더군. 그런데 너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드디어 화령이 움직이는 것이냐?”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대목의 딸이 광룡이라는 녀석과 함께 있거든요.”
“광룡……. 광룡 진무립?”
당금 천하에서 사람들의 입에 그보다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은 없었다.
이어서 국영승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설마 광녀라고 불리는 여아가 소룡의 딸이란 말이냐? 온 세상이 천중일화라고 떠받드는 그 아이가?”
단려화의 본모습을 떠올린 투월초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핫! 언젠가 그런 무명이 붙을 줄 알았다니까.”
국영승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하루나 이틀 안에 싸움이 시작될 거다. 저대로 두면 위험하지 않겠느냐?”
투월초는 빙그레 웃었다.
“자룡이가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 분명 괜찮을 거예요.”
“괜찮지 못하면?”
“그때는…….”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섬뜩하게 변한다.
“저도 나서볼까요?”
* * *
멀리 사천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나직한 야산.
파악산으로 불리는 이곳은 혈교를 상대하는 공위맹의 집결지였다.
능선에 앉아 노을 진 평야를 응시하는 하종보의 눈이 짙은 슬픔에 잠겼다.
“점창이…… 결국 무너졌구려.”
곁에 앉은 강유월의 표정에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청성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하종보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 앞에선 가까스로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인생 전부를 보낸 사문의 몰락은 이들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강유월은 애써 북받친 감정을 억눌렀다.
“비록 청성과 점창은 무너졌으나 아직 이곳엔 우리의 제자들이 있다오. 마지막 싸움을 앞둔 지금 우리가 흔들린다면 그들 또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울 것이오. 슬픔은 잠시 뒤로 미루십시다.”
한숨을 삼킨 하종보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도가 잠시 추태를 보였구려.”
“제자들이 살아있는 이상 사문은 언제든 재건할 수 있을 것이오. 우린 제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종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제자들과 곡주라도 한잔해야겠소이다.”
돌아서는 하종보의 귀로 강유월의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진인.”
쏟아지는 노을 속에 두 사람의 복잡한 시선이 교차했다.
강유월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사문의 재건을 위해선 최고 어른인 자신들이 무너져선 안 된다.
하종보도 그에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이외다.”
조용히 움직이는 무인들의 발소리가 제법 멀리까지 퍼져 나갈 만큼 파악산의 밤에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모두가 잠이 든 시각.
작은 막사의 휘장 너머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시꺼먼 그림자에 가려진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밖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진무립이 벌떡 일어났다.
“들어오십쇼.”
휘장이 걷히며 밝게 웃는 초무강이 들어온다.
“오랜만이구나.”
“숙부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도착해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오는 길이다.”
진무립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서 앉으십시오.”
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올 차는 없었지만 모처럼 만난 숙부와 조카의 대화에는 한 잔의 물이면 충분했다.
“어딜 가나 네 이야기로 진동을 하더구나.”
초무강의 얼굴엔 뿌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평범한 조카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거물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무립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낭중지추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 여전한 자신감도 반갑구나.”
나직한 웃음이 휘장 밖으로 새어 나간다.
“숙모님과 유림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네 숙모야 사방에서 몰려든 식솔들을 살피느라 바쁘고 유림이는 매일같이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사는 모양이다.”
초유림과 어울리며 진무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아이들이 늘어난 까닭이다.
전과 달라진 진무립의 위상, 덩달아 탄탄해진 마도림의 입지.
죽은 누님을 떠올린 초무강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마냥 기뻐하기엔 아직 마지막 고비가 남았기 때문이다.
“무립아.”
“예. 숙부님.”
“이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비단 본 림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천 무림의 존폐가 걸려 있는 싸움이기에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의 행보를 돌이켜 보았을 때, 만일 전쟁에서 패한다면 사천 땅에는 혈교를 제외한 모든 무림 방파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진무립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지는 싸움을 할 조카가 아닙니다.”
사천 무림의 존속도 중요하지만 진무립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도림이 옛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도림이 사천제일세의 위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때는 하늘에 계신 모친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