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32
◈ 132화. 창과 방패
장마가 물러가며 찌는 듯한 더위가 다시 찾아왔다.
점심나절이 지나며 태양이 정점에 도달할 무렵.
일렁이는 지평선 끝에서 마침내 붉은 물결이 등장했다.
‘왔구나!’
적을 발견한 만복개는 바닥에 깔린 줄을 강하게 잡아당기곤 후방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그가 당긴 줄은 후방에 대기하던 초복개의 발목을 끌어당겼고, 초복개는 재차 후방에 신호를 보내며 후퇴했다.
마지막으로 산 밑 그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동초개의 발이 훅 끌려간다.
“억!”
정신이 번쩍 든 동초개가 즉시 줄을 풀고 일어났다.
“왔다. 왔다. 왔다!”
한달음에 산을 올라간 동초개가 즉시 적모개에게 보고했다.
“적이 왔어요!”
적모개는 밥그릇마저 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전방의 거지들과 비사각원들을 두 번째 대기 장소로 옮겨라.”
다른 길로 우회하는 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중경이 위험해진다.
이미 지원대를 포함해 수백의 무인들이 적모개의 지시로 넓게 퍼져 몸을 숨긴 상태였다.
“알겠어요.”
동초개는 움직이려다 말고 슬며시 돌아보며 말했다.
“영전(靈前)엔 뭘 올려드리면 될까요?”
“영전이라니?”
“고인의…….”
“이 새끼가 재수 없게.”
어금니를 꽉 깨문 적모개가 냅다 발길질을 했다.
“빨리 안 꺼져?”
잽싸게 물러난 동초개가 쏜살같이 사라진다.
“가요. 가! 죽지 말아요!”
씩씩거리던 적모개가 곁에 선 거지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영전에 동초개의 목을 올려다오.”
“…….”
“꼭이다.”
재차 당부한 적모개는 나무에 매단 종을 흔들었다.
따다다다당!
파악산의 정상에 타종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곧게 뻗은 들판 너머로 파악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천극이 발을 멈추는 순간 진군하던 대열이 거짓말처럼 멈춰섰다.
곁으로 다가온 자인경이 말했다.
“주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아무리 내공을 수련한 무인이라지만 날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먼 길을 서둘러 온 만큼 싸우기에 앞서 회복이 우선이었다.
무천극은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일사불란 움직인 혈교도들이 들판에 수백 개의 그늘막을 만든다.
구석의 그늘막에 들어간 흑랑 장우기가 투덜거렸다.
“대체 언제 싸우는 거야?”
은랑 장청이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안달하지 마라. 진짜 흑랑이 되고 싶다면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광룡인가 하는 놈이 그렇게 강하다지? 어떻게 생긴 놈이야?”
현진학이 파악산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알아보기는 쉬울 거다. 인세에 보기 드문 엄청난 미공자라고 하니까.”
“나보다 잘생겼나?”
“…….”
순간 주변에 싸늘한 정적이 깃들었다.
도를 꺼낸 도운수가 투명한 도신을 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도신에 비친 자신을 본 장우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놈은 내 거다.”
현진학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치듯 사라진다.
‘이 정도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휴식을 취하는 자인경의 곁으로 수라대주 가진천이 다가왔다.
“저들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흑사칠랑이 있었다.
“지켜보면 알겠지.”
한 번도 의뢰인을 배신한 적이 없는 흑사칠랑이라지만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세워둔 상태였다.
자인경이 당부하듯 말했다.
“이번 전투는 힘과 힘의 싸움이 될 것이다. 자네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니 충분히 쉬어두게.”
“알겠습니다.”
그들의 후방으로 십 장가량 떨어진 곳에는 뒤늦게 합류한 오십여 명의 장로들이 있었다.
윤기 나는 흑발에 시꺼먼 장삼을 걸친 노인이 섭선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덥구먼.”
그에 이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백의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 군사의 말은 기억하지?”
흑과 백으로 절묘하게 대비되는 두 노인은 바로 흑백쌍노(黑白雙老)였다.
뒤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했더라.”
“벌써 노망이라도 온 게야?”
“그런 영감은 제대로 기억하는가?”
“전투가 벌어지면 북쪽으로 우회해 벽산에 가라고 했잖나.”
“어디라고?”
백노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벽! 산!”
“아, 그랬지. 북산.”
“……여기에 땅 파줄 테니 그냥 들어가시겠는가?”
그들의 대화에 흑노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냥 우리 뒤만 따라오라고 해.”
“그래도 알 건 알아야지.”
백노는 재차 장로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중경을 노리는 척 적을 흔들고 후방을 덮치는 것일세. 잊지 마시게들.”
핏빛 적삼의 노인이 킥킥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오랜만에 피 맛도 볼 겸 전부 다 죽여버리면 안 되겠는가? 클클클.”
“그럴 힘은 있고?”
“읍지.”
“…….”
시답잖은 농담에도 장로들의 수발을 드는 혈교도들은 그들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
장로 전원은 과거 서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대마두들.
나이가 들어 한층 혈기가 줄어들긴 했으나 수틀리면 사람 목숨을 개미처럼 짓밟는 건 여전했다.
‘장로들께서 함께하시는 이상 이 전쟁에 패배는 없다.’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파악산의 중턱.
상대에게 실혼인이 있는 이상 섣불리 기습을 가할 순 없었다.
적진의 코앞에서 여유롭게 쉬는 모습이 공위맹 무인들에게 왠지 모를 초조함을 안겨준다.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 긴장감은 단려화의 피부에 와닿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진무립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잖아.”
굳어있다면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면 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진무립에겐 이번에도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왠지 재수 없어.”
살랑이는 면사 사이로 눈을 흘기는 모습에 진무립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제법 큰 웃음소리가 퍼져 나가며 잔뜩 굳은 무인들의 표정을 녹여간다.
지금까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해낸 무인.
자신들과 함께하는 인물은 바로 그런 무인이었다.
진무립을 향한 경외감은 점점 자신감으로 변해갔다.
‘광룡과 함께라면…… 정말 이길 수 있을지도.’
육군명과 용추, 유대하가 곁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건 쓰면 안 되겠지?”
육군명이 말하는 것은 도성의 무공 흑무진천도였다.
유대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여기서 그거 쓰면 천하가 뒤집힐 겁니다.”
아직은 시야에 보이지 않으나 전투가 시작되면 분명 사방에서 세작들이 나타날 것이다.
진무립이 말했다.
“난전이 벌어지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다. 적당히 눈치껏 써라.”
“할 수 없군.”
그때 단려화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움직여요.”
모두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그늘막에서 벗어난 혈교도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산의 정상, 망루 위에서 타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자 무인들이 일사불란 북쪽 비탈을 내려간다.
이들이 전장으로 선택한 곳은 놀랍게도 산이 아닌 들판이었다.
적모개는 즉시 초평천을 찾았다.
“맹주님. 가시지요.”
초평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
공위맹 무인들이 일제히 산을 내려오자 자인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스스로 내려온다고?’
격차가 있는 만큼 분명 유리한 전장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기회다.
처음부터 산에 틀어박힐 적을 끌어낼 생각이었으니까.
“수고를 덜었군.”
무천극의 말에 자인경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역시 본 교가 여길 지나쳐 중경으로 갈 것을 경계하는 모양입니다.”
“아직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놈들도 있다.”
자인경은 느낄 수 없었으나 무천극의 예리한 감각은 산속에 숨어있는 적까지 감지하고 있었다.
“원진이 포위되면 뒤를 들이칠 모양입니다. 대비하겠습니다.”
둥글게 밀집한 공위맹 무인들이 병기를 뽑아 들고 이곳을 노려본다.
빠르게 가까워진 두 무리의 간격은 오십 장.
붉게 타오르는 무천극의 두 눈이 전장 어딘가에 있을 진무립을 탐색했다.
그에게 있어 이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독왕 당조도, 성무검(成武劍) 초평천도 아닌 광룡 진무립이다.
‘광룡. 오늘은 도망칠 곳이 없을 것이야.’
적사곡을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교의 행보를 방해해온 녀석이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런 싸움에서 놈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니까.
‘어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아라.’
무천극의 전신에서 은은한 사기가 쏟아져 나온다.
“긴말할 것 없다. 전부 죽여라.”
묵직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자 혈교도들은 일제히 목청을 키웠다.
“존명!”
지면을 박찬 혈교도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든다.
원진의 중심에서 무천극의 목소리 못지않게 육중한 외침이 하늘로 솟구쳤다.
“사천 무림의 안위가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초평천의 말에 공위맹 무인들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예!”
서로 간의 간격이 삼 장까지 좁혀졌을 때였다.
선두에 선 태광삼귀의 첫째, 폭귀 마사추가 히죽 웃으며 도를 치켜들었다.
“우하하하! 전부 덤벼봐라!”
내리친 도신에서 시뻘건 검광이 솟구치더니 전방의 적을 집어삼킨다.
한 걸음 뒤에 있던 육군명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도를 쓰는 거야?”
번개같이 뽑혀 나온 도가 사선으로 그어지며 시꺼먼 검광을 쏟아냈다.
검고 붉은 두 기운이 허공에서 엉키는 순간.
콰아앙!
귓전을 강타하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땅거죽이 들썩인다.
쓸만한 상대가 나타나자 마사추는 신이 나서 외쳤다.
“하하하! 제법이로구나!”
마사추와 육군명의 격돌을 시작으로 돌진하던 혈교도들이 바위에 걸린 물살처럼 좌우로 갈라진다.
중앙의 작은 바위 위에 올라선 적모개가 전장을 살피며 눈을 빛냈다.
‘역시 포위망인가.’
진무립과 함께 계획을 세울 때부터 예상했던 움직임이다.
순식간에 삼천이나 되는 혈교도가 이천오백의 무인들을 에워쌌다.
“모조리 죽여라!”
거친 함성을 토해낸 혈교도들이 농도 짙은 사기를 쏟아내며 원진으로 달려들었다.
외곽에 선 사대거파의 제자들이 격렬하게 맞서 싸우며 치열한 전쟁의 막이 올랐다.
적모개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실혼인은?’
실혼인이 나타나야 다음 계획을 전개할 텐데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적모개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일 장 앞에 서 있던 진무립이 뒤를 돌아본다.
“네 위치에서 조급함은 독이다.”
“…….”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맹주를 보필하는 자신에게 냉정함은 필수다.
적모개가 가까스로 뛰는 가슴을 가라앉힐 때, 진무립의 손이 검파에 닿았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타나게 하면 그만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진무립이 꺼지듯 사라지더니 벼락같이 전방으로 치달았다.
갈지자로 움직인 진무립은 순식간에 동료들을 비집고 최전방에 도착했다.
“어?”
태광삼귀의 막내, 광귀 상위겸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대하던 아미의 여승 바로 옆에서 진무립이 튀어나온 까닭이다.
“넌 뭐야?”
“널 죽일 놈.”
씩 웃은 진무립의 은광검이 빗살같이 뽑혀 나왔다.
“헉!”
손이 움직이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검신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미의 여승에게 적응한 두 눈이 진무립의 빠름을 쫓아오지 못한 것이다.
당황한 상위겸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순간.
서걱!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그의 목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며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어서 진무립의 하체가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머리 잃은 몸뚱어리를 거칠게 후려 찼다.
꽈앙!
굉음과 함께 터져나간 육신에서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허무한 상위겸의 죽음.
당황한 혈교도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피를 흠뻑 뒤집어쓴 진무립이 말했다.
“뭘 봐.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