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59
◈ 159화. 대량표국
흔들리는 마차 안.
백환과 독대한 수문화는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이런 곳에서 군부의 이름 높은 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천의 총사 수문화입니다.”
“백환이오. 소문으로만 듣던 상천의 무인과 만날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구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수문화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귀 파가 나서준 덕분에 피해 없이 왜구를 소탕할 수 있었소. 관을 대신해 감사의 예를 표하오.”
“자비로운 황제 폐하께서 무림의 역할을 인정해주시오니, 무림 방파로서 천하의 안정에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없이 정중한 말투와 예법에 백환은 내심 탄복했다.
‘출신이 산적이라 그저 투박하고 거칠 것만 같았는데 선입견이었구나.’
확실히 이런 부분에선 진무립보다 수문화가 훨씬 나았다.
“내 돌아가면 이번 일은 반드시 상부에 보고해 귀 파의 공로를 널리 알리겠소이다.”
수문화는 겸양하며 말했다.
“저희가 과감하게 왜구를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용맹한 군사들이 뒤따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오니 저희의 공로를 알리기보다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시지요.”
백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공명에 초탈한 듯한 수문화의 말을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해졌다.
“제남에 간다고 하셨소이까?”
수문화는 올 게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곡부에서 잠시 쉬고 다시 출발할 생각입니다.”
“이만한 인원이 머물자면 적어도 객잔 서너 개는 잡아야 할 것이오. 그러지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
“아무래도 무림인이 군부에 머무는 것은…….”
백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오. 곡부의 대량표국주가 바로 본인의 매제라오. 빈방이 많으니 충분히 묵어갈 수 있을 것이오.”
최근 세가 기운 대량표국에 빈방이 많다는 것은 수문화도 알고 있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자 내심 쾌재를 부른 수문화는 모른 척 물었다.
“그렇게 폐를 끼쳐도 되겠습니까?”
“덕분에 병사들이 피해를 입지 않고 왜구를 진압할 수 있었소. 이건 그대들이 보여준 의기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수문화는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럼 대인께서 보여주신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백환은 반갑게 미소 지었다.
“고맙소.”
당초 수문화의 계획은 대량표국에 표행을 인계하며 자연스럽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백환이 돕는다면 더욱 자연스럽게 그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을 하니 하늘이 돕는구나.’
* * *
저녁 무렵, 백환과 동행한 그들은 순조롭게 곡부의 성문을 넘었다.
대로를 따라 움직인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장원 앞에 도착했다.
위사가 소식을 전하자 활짝 열린 정문으로 인자한 인상의 중년인이 달려 나왔다.
“아이고. 형님.”
그는 대량표국의 국주이자 백목표(百目慓)라는 무명으로 유명한 신노군이었다.
백환이 밝은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네. 매제. 그간 잘 지냈는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왜구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표사들을 준비시키던 참이었습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네.”
“수가 제법 많다고 들었습니다. 왜구 중에는 사이한 검술을 사용하는 자가 많으니 표사들이 함께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닐세.”
백환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구는 저들이 모두 처리했다네.”
신노군은 그제야 저 멀리, 어둠 속에 서 있는 자들이 관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저들은 누굽니까?”
백환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상천의 무인일세.”
“상천? 그게 정말입니까?”
신노군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상천과 표국의 관계를 잘 아는 백환이 저들을 직접 데려왔으니 당혹스러운 것이다.
백환은 작게 끄덕이며 속삭였다.
“자네와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선 저들에게 쉴 곳을 내어주게.”
아무리 불편한 관계라지만 백환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너희들은 저들에게 쉴 곳을 내어주거라.”
“예. 국주님.”
표사들이 일사불란 움직여 수레를 끌고 사람들을 숙소로 안내했다.
둘의 곁을 지나가며 슬쩍 쳐다본 진무립은 가면 속으로 미소를 감췄다.
‘역시 그렇겠지.’
대량표국의 장원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상천의 무인 일백과 상인, 쟁자수를 모두 수용하고도 방이 남는다.
그 말은 그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빠져나갔다는 것이기도 했다.
내부 형편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표사 중엔 낡은 무복을 기워입은 자도 있을 정도였다.
대량표국은 한 해 전의 마도림보다 상황이 더욱 나빠 보였다.
숙소 배정이 끝나자 진무립의 방에 주요 인원이 모여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시평이 말했다.
“곧 식사를 준비해준다고 하는데…….”
말끝을 흐린 시평이 백하진과 한천유를 흘겨봤다.
“이런 건 너희가 알아보는 게 맞지 않겠어?”
백하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한천유는 능글맞게 웃었다.
“처음이라 몰랐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이거 나 못지않게 뻔뻔한 놈이네.”
“구걸할 때부터 그런 소리 자주 들었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둘을 비롯해 함께 온 무인의 대다수는 부모를 일찍 잃었거나 버림받고 산채로 흘러든 이들이었다.
한천유가 일어나자 백하진도 뒤에 시립했다.
“흠.”
시평은 헛기침을 하며 그가 내준 자리에 앉았다.
진무립을 중심으로 단려화, 수문화와 두용청에 시평이 원형 탁자에 둘러앉았다.
수문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군. 어쩌면 일이 쉬워질 수도 있겠습니다.”
두용청과 시평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단려화가 물었다.
“왜죠?”
시평이 곧장 답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통하는 곳이 있다면 협상은 더욱 수월해질 겁니다.”
단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은 대량표국도 우리와 손을 잡길 원한다는 말인가요? 아까 보니 국주의 표정이 별로던데요.”
진무립이 말했다.
“국주가 아니야. 백환이다.”
두용청이 진무립의 말에 살을 붙였다.
“백대인이 관인이라곤 하나 표국과 상천의 관계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릴 데려왔다는 건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 단려화는 손뼉을 쳤다.
“아! 그렇구나. 백대인은 대량표국이 우리 상천과 손을 잡길 바라는 것이로군요?”
진무립이 실소를 머금었다.
“언제부터 우리 상천이 되었지?”
화령주의 딸인 그녀였으나 말하는 것만 보면 상천의 사람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사소한 것에서 꼬투리 잡지 말아요.”
수문화가 진땀을 닦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쨌든 백대인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매제를 돕고 싶을 겁니다. 다만 관인이다 보니 개입할 방도가 없었겠지요. 그가 거든다면 서로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겁니다.”
대량표국을 인수해 상천의 산하에 넣는 것.
그것이 이곳 곡부에 온 목적이었다.
진무립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두용청이 그의 말을 받았다.
“천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신국주는 능력 있는 인물이나 대쪽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량표국이 태산표국에 밀려난 것에는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성격도 한몫했지요. 표국과 상천의 관계를 보았을 때 어지간한 조건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겁니다.”
진무립의 관점에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대쪽같은 성정은 모르겠고, 그다지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집안이 망해가도 끝까지 자존심만 지키는 자가 무슨 유능한 수장인가? 내 기준에선 태산표국주가 훨씬 뛰어난 인물이다.”
두용청을 제외한 좌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수문화가 어리둥절한 두용청에게 말했다.
“내 식구의 밥줄만 지킬 수 있다면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게 주군의 지론입니다.”
뒤에 서 있던 한천유가 탄성을 흘렸다.
“크으! 역시 멋지단 말이지.”
백하진이 그를 툭 치며 눈치를 줬다.
“조용.”
“십 년 넘게 봐왔지만 우린 참 안 맞는 거 같아.”
“동의한다.”
진무립이 말했다.
“일단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본다.”
그때 문밖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국의 사람들이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진무립은 다시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놓인 여러 개의 상에는 밥과 서너 가지의 단출한 반찬이 전부였다.
무인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나오는 가운데 수문화가 담장 옆의 작은 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홀대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서너 명의 아이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한심하군.”
실소를 흘린 진무립이 허공에 손을 까딱거렸다.
곧이어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바닥에 부복한 서진환이 나타났다.
“찾으셨습니까. 주군.”
“네가 마을에 좀 다녀와야겠다.”
상천의 무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백환과 독대한 신노군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형님.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백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대로는 태산표국에 잡아먹힌다는 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상천이라니요. 저들은 산적입니다.”
그간 상천의 영역을 통과하며 납부한 통행세를 생각하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흑전원에서 보증한 무림 방파일세. 내 눈으로 저들이 왜구를 진압하는 것만 다섯 번을 보았네. 더는 산적으로 대해선 안 될 것이야.”
신노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백환은 혀를 찼다.
“자네는 나보다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고리타분하단 말인가?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단 말일세.”
“형편이 어렵다고 그들의 손을 잡으면, 이제까지 산적들에게서 표물을 지켜온 표사들이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굶을지언정 그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 사람하고는.”
생각 이상으로 태도가 완강하다.
백환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렇게 하세. 내가 자리를 마련해 볼 터이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차나 한잔 함께하시게. 그래도 손님이지 않은가?”
손위처남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만 할 수는 없었다.
신노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단출한 식사가 끝난 뒤 무인들이 하나둘 숙소로 돌아갔다.
무인들이 순서를 정해 수레를 지키는 가운데 쪽문이 열리며 젊은 표사가 들어왔다.
수레에 앉아있던 한천유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국주님께서 상천의 총사를 청하십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리며 수문화와 복면을 쓴 진무립이 나타났다.
“안내해주시오.”
“예.”
두 사람은 표사를 따라 안채의 전각에 도착했다.
마당까지 나온 백환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어서 오시구려.”
그의 뒤로 조용히 예를 갖추는 신노군이 보인다.
“대량표국주 신노군이오.”
“상천의 총사 수문화입니다. 산동 무림에서 이름 높은 백목표(百目慓)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노군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사라졌다.
수문화의 예가 생각 이상으로 정중한 탓이다.
호위로 따라온 진무립을 힐끔 쳐다본 백환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진무립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벽에 바짝 붙었다.
어색한 정적 속,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김과 함께 구수한 다향이 단출한 실내에 퍼져 나간다.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한 백환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총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예.”
“대량표국을 도와주시오.”
미간을 좁힌 신노군이 백환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형님.”
백환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리게.”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수문화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내부를 둘러보았으니 짐작하겠지만 산동무림에서 대량표국의 입지는 나날이 좁아지는 중이라오. 알다시피 나라의 녹을 먹는 나는 매제를 도울 수 없는 형편이오.”
“그렇지요.”
백환은 차분히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것을 풀어놓았다.
“상천도 언제까지 통행세에만 의존할 수는 없을 거요. 대량표국과 손을 잡고 표국업에 뛰어드는 것은 어떻겠소?”
신노군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문 가운데 수문화가 말했다.
“물론 표국업은 저희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함께할 수 있는 표국이 있다면 좋지요.”
백환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본 천이 마음먹고 나선다면 대량표국이 태산표국을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백환의 만류에 듣고 있던 신노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소.”
예상했던 태도다.
묵묵히 끄덕인 수문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본인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영문 모를 상황에 백환과 신노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총사. 주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진무립이 복면 위로 차갑게 눈을 빛냈다.
“아직 배가 덜 고픈 모양이군. 그럼 이대로 굶어 뒈지실 텐가?”
진무립의 싸늘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문화가 말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본 천의 천주님이십니다.”
뚜벅뚜벅 걸어간 진무립은 그들의 머리가 정리되기 전에 의자에 앉았다.
“표사들은 옷을 기워입고 밥상에 찬이라곤 풀 쪼가리가 전부더군. 대가리가 융통성이 없으면 아랫사람이 고생하는 법이지. 대량표국이 몰락한 것은 전부 그대의 무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