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64
◈ 164화. 국주 나오라고 해라
동진상단의 후원.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태산을 축소한 듯 웅장한 가산이 운치 있게 들어온다.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 있던 노인이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고운 자태의 나이 든 여인이 인자한 미소로 물었다.
“이젠 날이 많이 춥지요?”
동진상단의 상단주, 채경승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땐 추위를 덜 타는 부인이 부럽구려.”
“화로에 불을 조금 피워야겠어요.”
자수를 내려둔 공여소가 의자에서 일어날 때였다.
그녀의 고개가 문밖으로 향하더니 이내 엄청난 외침이 들려온다.
“예!”
공여소의 눈에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상단의 무인들은 아니야. 대체 누구일까?’
외침에서 전달되는 힘이 왠지 범상치 않다.
잠시 후,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문밖에서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님! 상천의 천주가 단주님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문을 연 채경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누가 왔다고 했느냐?”
젊은 하인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상천의 천주. 무면산왕입니다!”
그는 대행수 송현이 태산표국이 아니라 대량표국의 깃발을 내건 상천의 무인들과 돌아왔음을 설명했다.
“음.”
채경승은 나직한 신음 속에 당혹감을 감췄다.
그 실체조차 모호한 무면산왕이 대놓고 찾아왔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턱밑에 들이민 칼이었으니까.
“모셔오너라.”
“알겠습니다.”
하인이 물러가자 공여소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상공.”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채경승은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부인께서는 염려할 것 없소.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옆방에서 기다릴게요.”
“그리하시구려.”
그녀가 나가자 시비가 들어와 차를 두고 나갔다.
구수한 다향 속,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채경승이 차갑게 머리를 식혔다.
‘분명 태산표국의 문제로 왔을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생각이 끝나는 순간 그의 두 눈이 노회한 상인의 눈빛으로 탈바꿈했다.
“상천의 천주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슬며시 문이 열리며 가면을 쓴 진무립과 시평이 나타났다.
“처음 뵙겠소이다. 본인은 본 상단을 이끌고 있는 채경승이라 하오.”
진무립과 시평도 정중히 예를 갖췄다.
“상천의 천주 진가요.”
“양산채주 시평이라 합니다.”
채경승의 노련한 눈동자가 두 사람을 빠르게 쓸어내렸다.
‘이들이 바로 무면산왕과 청옥공자. 생각보다 젊구나.’
그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구려.”
자리에 앉는 진무립과 시평의 눈이 슬쩍 우측 벽을 살피고 돌아왔다.
[주군.] [그래. 알고 있다.]옆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애써 살피지 않았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은밀했다.
채경승이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태산표국을 대신해 본 상단의 상행을 호위하셨다고 들었소. 연유를 물어도 되겠소이까?”
진무립이 답했다.
“그들이 알량한 태산표국의 이름을 믿고 우리의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오.”
“통행세를 내지 않았다는 말이오?”
“그렇소.”
상천과 오대표국의 관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큼 유명하다.
“듣자 하니 대량표국의 깃발을 내걸고 왔다고 하더구려.”
“대량표국은 우리의 가족이 되기로 했소.”
채경승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스치고 사라졌다.
‘대량표국을 흡수했다?’
대량표국의 국주 신노군의 대쪽 같은 성정은 익히 알고 있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가 어떻게 상천과 손을 잡았는지 궁금해졌다.
채경승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신국주와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 그는 잘 지내고 있소이까?”
그의 의도를 알아챈 진무립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중에 송행수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대량표국을 핍박하지 않았소. 본 천에 합류하기로 한 것은 그의 결정이오.”
상대가 자신의 속내를 간파하고 직설적으로 대답하자 채경승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거침이 없는 자로구나.’
진무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라신다면 이 자리에 송행수를 불러도 좋소.”
채경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천주께서 내게 거짓을 말씀하실 리 없지. 그래서 본인을 만나고자 한 연유가 무엇이오?”
“앞으로 태산표국과의 연을 끊고 대량표국과 거래를 해주시오.”
왠지 나올 것 같은 말이 나왔다.
채경승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시오?”
“내가 의미를 알고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나 상단주께서는 무슨 의미인지 반드시 아셔야 할 거요.”
“천주께서는 지금 본인을 협박하는 것이오?”
“목이 마르군.”
진무립은 가면을 슬쩍 들고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태산표국을 비롯해 천하오대표국은 머지않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오.”
“쉬운 일이 아닐 게요.”
“내겐 어려운 일도 아니지.”
넘치는 자신감이 목소리에서 짙게 배어난다.
채경승은 문득 상대가 보이는 자신감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당금 무림에서 오대표국의 위상은 중원무림맹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소. 태산표국만 해도 휘하의 표사가 일천을 웃돌며 무패의 백표대까지 거느리고 있지. 천주께서는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그대는 어찌 내가 못 할 거라 생각하오?”
채경승의 주름진 눈매가 가늘어졌다.
‘과연 상천이라는 집단의 수장이 될 만하구나.’
협상이 시작된 뒤.
상대는 자신이 질문으로 대화의 흐름을 가져오려 할 때마다 절묘하게 맥을 끊고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소.”
진무립은 깍지 낀 손을 느긋하게 턱에 받쳤다.
“앞으로 본 천의 영역을 통과하는 태산표국의 표행에는 통행세를 다섯 배로 받을 것이오. 반면 대량표국의 표행은 통행세를 절반만 받기로 했지. 이 사실은 보름 안에 산동의 모든 상단이 알게 될 것이오.”
이제껏 속내를 감춰왔던 채경승은 처음으로 눈을 부릅떴다.
“지금 당장 오대표국과 한판 벌일 작정이란 말이오?”
“참고 참아도 음해가 끊이질 않는데 전쟁은 당연한 수순 아니겠소? 올 게 왔을 뿐이오.”
“…….”
“대량표국을 이용한다면 표행비는 남들이 내는 것의 절반으로, 거기에 통행세까지 십 년간 면제해드리지.”
태산표국에 지불하는 표행비가 매년 올라가는 지금 진무립의 제안은 마음이 흔들릴 만한 것이었다.
단, 상천이 천하오대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진무립은 그 마음을 눈치챈 사람처럼 말했다.
“큰 거래일수록 위기가 수반되는 법. 이건 상단주께도 다시 오지 않을 큰 기회요.”
“옳은 말이오. 그러나 그 위기가 너무도 위험하구려.”
자칫하면 수백이 넘는 식솔들까지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는 일이다.
“나 역시 내 가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일을 허투루 하겠소?”
“내가 거절한다면 어찌하시겠소?”
“같은 제안을 들고 강서상단을 찾아갈 것이오. 찌르고 찌르다 보면 태산표국에 불만을 가진 자 중 하나는 걸려들지 않을까 싶은데.”
강서상단은 동진상단과 비슷한 규모를 가진 곳으로 처지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상단주를 핍박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거절한다면 이대로 돌아가겠소.”
진무립은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가장 먼저 우리의 손을 잡으면 동진상단은 산동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상단이 아니라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상단으로 거듭날 수 있소. 내 보장하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경승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선택의 기로인가.’
상천이 칼을 뽑은 이상 자신뿐만 아니라 산동의 모든 상단은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태산표국이 승리한다면 달라질 건 없겠지만 이 싸움에서 상천이 이긴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진무립의 말대로 손을 잡는다면 지금이 가장 큰 기회였다.
채경승은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천상 상인이로구나.’
상천이 내민 제안이 현실로 이뤄진다면 상단은 한 발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의 무게추가 조금씩 상천으로 기울어간다.
“머물 곳을 마련해드리겠소.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물론이오.”
고개를 끄덕인 진무립이 시평과 함께 처소를 나섰다.
문을 닫은 진무립은 옆 방 앞으로 걸어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인.”
그들이 떠난 뒤, 옆 방에서 나온 공여소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응시했다.
‘보통 고수들이 아니로구나.’
심장 박동까지 조절하며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있었는데 들키고 말았다.
태산표국의 대표두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내심을 감춘 그녀는 웃으며 채경승의 처소로 들어갔다.
“대화는 마음에 드셨는지요.”
심력을 소모한 채경승은 다소 지친 미소를 보였다.
“솔깃한 제안을 하더구려. 그러나 너무 위험한 길이오.”
“제게 확신을 주고 갔습니다. 저들을 믿어봐도 될 것 같습니다.”
채경승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녀의 안목은 믿을 만하다.
동진상단이 산동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성장한 것에는 아내의 예리한 안목도 크게 몫을 했기 때문이다.
공여소는 차분히 그의 곁에 앉으며 손을 잡았다.
“쉽게 무너질 사람들은 아닙니다. 저쪽에 걸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 *
상천의 무인들이 배정받은 숙소로 하나둘 들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물러가며 커다란 장원에 어둠을 드리웠을 때, 식사를 마친 진무립이 단려화와 함께 장원을 나섰다.
“상단주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상인이다.”
당연한 말에 그녀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건 알죠.”
가면 속 진무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기에 내 제안을 거절하지는 못할 거야.”
두 사람의 뒤로 시평과 백하진, 한천유가 천으로 덮은 수레를 끌고 나왔다.
죽립을 눌러쓴 시평이 곁으로 다가왔다.
“준비되었습니다.”
“가자.”
진무립과 단려화가 양쪽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가운데, 누런 소가 움직이며 수레를 이끌기 시작했다.
고삐를 쥐고 있던 한천유가 설레는 얼굴로 물었다.
“가서 한판 붙습니까?”
찌푸린 백하진이 차갑게 눈을 흘겼다.
“제정신이냐?”
천에 덮여 있는 것은 여섯 구의 시신.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태산표국이었다.
밤이 내린 태산표국의 정문.
좌우의 횃불이 주변을 밝게 비추는 가운데 문을 지키는 두 명의 위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오늘따라 정문 앞에 유독 무거운 긴장감이 감도는 것은 청옥공자가 제남에 들어섰다는 소식 때문이다.
“전쟁이 벌어지게 될까?”
“표행에 나선 표사들이 돌아오지 못한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때 좌측의 어둠 속에서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오싹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을 때, 진무립 일행이 어둠에서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을 스쳐 지나가나 싶던 수레가 정문 앞에 멈춰섰다.
침을 꿀꺽 삼킨 위사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 표국을 찾아오셨습니까?”
죽립을 눌러쓴 시평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
“오늘은 업무가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주십시오.”
“내가 업무를 보러 온 사람 같나?”
피식 웃은 시평은 슬쩍 손을 들었다.
그에 백하진과 한천유가 수레의 천을 걷어내자 가지런히 누운 시신들이 드러났다.
“헉!”
경악한 위사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시작해라.’
진무립과 시선을 교환한 시평이 당당하게 말했다.
“양산채주 시평이다. 국주 나오라고 해라.”